좋은 말씀/한국교회부흥

한국 교회가 멍들게 된 두가지 이유

새벽지기1 2021. 11. 15. 21:44

한국 교회가 멍들게 된 두가지 이유

 

필자가 중고교 시절에 가장 부러웠던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오른편에 매달린 강도였다. 이 세상에서는 자기 멋대로 살다가 인생 막판에 구원을 받은 사람처럼 행복한 사람이 있을까라는 유치한 생각에서였다. 부흥사 목사들이 와서 "천국가서 개털모자 쓰지 말고, 열심히 봉사하여 금 면류관을 받자" 고 목청을 돋우어도 필자는 그리 흥분되지 않았다......

한국 교회를 멍들게 한 두가지 이유: 값싼 은혜 공로 사상

1 개털 모자면 어떠랴?

 

필자가 중고교 시절에 가장 부러웠던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오른편에 매달린 강도였다. 이 세상에서는 자기 멋대로 살다가 인생 막판에 구원을 받은 사람처럼 행복한 사람이 있을까라는 유치한 생각에서였다. 부흥사 목사들이 와서 "천국가서 개털모자 쓰지 말고, 열심히 봉사하여 금 면류관을 받자" 고 목청을 돋우어도 필자는 그리 흥분되지 않았다. "믿고 천당가는 것은 따놓은 당상인데 "개털 모자" 를 쓰던 "금 면류관" 을 쓰던 무슨 대수인가? 왜 같은 예수를 믿고 천당가는데 나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고생을 해야만 하는가? 누구는 인생을 살면서 큰 고통 당하지 않는데, 왜 나는 돈이 없어 학교를 휴학해야만 하는가?" 가난하게 살았던 사춘기 시절, 주변의 부유한 동료 그리스도인 친구들을 보면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의문은 누를 길이 없었다.

필자가 이런 생각을 가진 것은 한국 교회가 "값싼 은혜" (cheap grace) 를 선포한 때문이었다. 입술로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소위 "예수 믿고 천당" 이라는 단순 논리가 교인들 사이에 팽배해 있다. 한국의 상당수 교회들이 진정으로 죄의 용서를 갈구하지 않는 자들에게 죄의 사유를 선포하고, 진정한 권징과 징계가 없는 세례를 베풀며, 참된 고백이 없는 성찬을 베풀고 제자로서 마땅히 치루어야할 댓가를 언급하지 않는 은혜를 선포하고 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뒤를 따를 것을 준엄하게 요구하지 않는 은혜이기에 값싼 은혜라고 부르는 것이다. 외도를 하면서도 하나님이 한번 자신을 선택했으면 끝까지 구원할 것이라고 큰 소리를 치면서 집을 돌보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보면 한국 교회의 값싼 은혜의 선언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극명하게 알 수 있다. 이 사람의 주장은 최소한 "부끄러운 구원" 은 받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보이는 윤리 불감증은 "부끄러운 구원" 으로 대표되는 신학적 천박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구원이면 구원이지, 과연 "부끄러운" 구원도 있는가?"

2 공로 사상

 

한편 은혜를 이렇게 강조하는 한국 교회가 상급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상급은 행함으로 받는다고 강조하면서 봉사와 헌금을 강조하는 것은 한국 교회의 일반적 현상이다. 백만원을 단번에 헌금으로 드리면 될 것을 소위 "일천 번제"라고 하면서 천원씩 일천번, 그것도 기명으로 헌금을 내고, 그때마다 이름을 불러주며 기도하는 목회자가 적지 않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듣고 있다. 이렇게 행함이 있으면 세상에서도 복을 받고 내세에서도 큰 상을 받는다고 굳게 믿고 있다. 한국 교회만큼 "오직 은혜만으로"를 소리높이 외치면서 동시에 "행함" 으로 상급을 얻는다는 공로 사상이 팽배한 교회는 지구상 어디에도 별로 없는 것 같다.

한국 교회는 "값싼 은혜" 와 "공로 사상" 이라는 양 극단의 틈바구니에서 지금 멍들어 가고 있다. 한국 교회는 양 극단이 혼재하는 기이한 현상을 드러내고 있다. 과연 구원은 은혜로 받고, 상은 행함으로 받는 것인가? 어떻게 서로 상충되는 두가지 개념이 동시에 강조될 수 있을까?

 

이런 이상한 혼재 현상이 가능한 것은 한마디로 이야기 하자면 율법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3 지나치게 부정적 율법관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0)" 는 바울의 말을 근거로 율법은 은혜와 반대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율법은 생명을 줄 수 없다. 그것은 단지 범죄를 더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제정된 것에 불과하다" 고 일부 인사들은 주장한다. 이렇게 율법에 대해서는 부정적 견해를 드러내면서도 대부분의 한국 교회는 아직도 십일조와 주일 성수를 매우 강조한다. 신약 시대에는 율법 가운데서 도덕법은 남고 시민법과 제사법은 다 폐기되었다고 주장하면서도, 그들 스스로 도덕법에 속한다고 인정하지 않는 십일조와 주일 성수와 성전 건축은 강조하는 모순을 보이고 있다. 과연 율법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고 주신 것이며, 저주만을 가져다 주는 것인가?

4 율법은 보은의 규칙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이스라엘을 구해낸 다음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을 때 였다. 따라서 율법은 애굽에서 구원 얻기 위한 조건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이건 신약이건 간에 단 한번도 율법을 "구원얻기 위한 조건" 으로 주신 적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고통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을 듣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기억하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셨다 (출 3:6,15).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보이신 열가지 재앙의 기적과 홍해 사건을 통해서 자신이 구원의 하나님이심을 보이셨다. 더우기 한번 약속하면 끝까지 그 약속을 지키시는 충성스런 하나님이심을 보이셨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시겠다" 고 선포하셨다. 이 어찌 복음이 아닌가?

이렇게 은혜를 베푸시고 난 후에 자신과 언약을 맺고 언약의 규정인 율법을 지키면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백성이 되고,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기에 율법은 이미 받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태도를 삶의 전 영역에서 보이기 위해 제정된 보은 (報恩) 의 규칙인 것이다. 그러기에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이미 구원받은 이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을 지키는 자는 이미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로 지키는 것일 뿐 상을 달라고 요구할 수 없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눅 17:9-10). 그러나 주님께서 은혜스러우시게도 우리가 마땅히 행한 일에 대해서 상을 주신다. 그러기에 상급은 보상이 아니라 선물인 것이다.

5 율법은 저주가 아님

 

여호와께서는 구원의 은혜를 먼저 베풀고 난 후에, 율법을 지키겠다고 맹세할 수 있는지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였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은 자발적으로 언약의 주의 뜻이 담긴 율법대로 살겠다고 피로 맹세하였다 (출 24:7-8).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죽음의 저주를 받겠다는 의미에서 피로 맹세를 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피로 맹세하였기에 언약을 어기면 이스라엘의 생명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율법 자체에서 저주가 나와 재앙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겠다고 맹세를 하였기에,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이 맹세로 인해 저주가 임하는 것이다. 신약에서 바울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0 ) 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인 것이다. 따라서 율법 자체를 저주로 이해해서는 아니된다.

6 누가 진정한 은혜론자인가?

 

은혜와 요구, 복음과 율법, 선물과 과업은 함께 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후에, 우리에게 율법을 주시며 절대적 순종과 충성으로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하신다. 이에 하나님의 백성은 은혜에 감사하여 율법을 지킬 것을 맹세하며 언약을 맺는다. 이것은 구약 백성이나 신약 백성 모두에게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옛 언약이나 새 언약 안에 모두 복음과 율법이 있는 것이다. 새 언약 안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의 복음과 새 계명이 함께 들어 있는 것은 이를 잘 반증한다. 복음과 율법은 결코 떼어내서는 아니된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고 상급은 행위로 받는다는 이분법적 사고는 겉으로 보면 은혜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값싼 은혜" 와 "공로 사상" 을 부추기는 심각한 폐해가 있다. 필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이미 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아무런 보상을 염두에 두지 않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본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마땅히 우리가 할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상으로서가 아니라 또 은혜로 상을 주신다. 은혜를 덤으로 받았기에 감사해서 "언약의 주" 의 요구에 더욱 순종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그러기에 필자처럼 복음과 율법을 강하게 연결시키는 사람들은 겉으로 볼때에는 행위를 강조하는 행위론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은혜에서 시작하여 은혜로 끝나는 "은혜론자" 인 것이다. 오히려 은혜만으로를 외치면서 그리스도가 피로 사신 보배로운 은혜를 값싼 은혜로 전락시키다가도, 신자들의 사욕을 채워주기 위해 상급과 보상을 이야기하는 자들이 "행위론자" 인 것이다. 값싼 은혜와 천국의 상급 사이를 왔다갔다 좌충우돌하는 가운데 점차 깊어만 가는 한국 교회의 상처는 언제 치료될 것인가?

 

김지찬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