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국교회부흥

일부 교회의 무속화 현상 2

새벽지기1 2021. 12. 23. 06:45

일부 교회의 무속화 현상 2


기독교뿐만 아니라 한국에 들어와 있는 모든 종교는 무속적인 요소를 어느 정도는 갖고 있는게 사실이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기독교의 경우 무속화 현상이 기복신앙과 연결되어 기독교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지금 한국 교회에 필요한 것은, 기독교에 침투해 있는 무속적인 요소를 찾아내어 제거하고, 기독교의 참된 모습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무속신앙이 갖고 있는 몰역사적이고 비윤리적인 측면을 알아보고 이것이 기독교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분석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하겠다.

Ⅰ. 뿌리 깊은 혼합주의


무속, 즉 샤머니즘은 한 마디로 우리 민족의 종교적 심성을 규정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유교나 불교 등과 같은 우리의 전통 종교가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무속은 우리 민족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우리 민족의 건국신화라고 할 수 있는 단군신화에 이미 토테미즘 등과 같은 무속적 요소가 들어 있는 것은 이를 잘 말해 준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우리 민족이 외래종교를 받아들이는 정신적 근저에 무속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교나 유교의 경우,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후 이미 존재하고 있던 무속과 자연스럽게 융합, 일종의‘혼합주의(Syncretism)’의 형태로 발전해 나갔다.


불교가 지배종교였던 고려시대에 무속적인 색채가 진한 팔관회가 유행했던 것은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유교가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정착된 조선시대에 있어서도, 오래 가뭄이 계속되면 왕이 직접 기우제를 올리곤 했던 것은 일반 민중 뿐만 아니라 지배계층 역시 무속적 습성에 깊이 침잠해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무속은 종교적인 현상이면서도 우리 민족 문화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근대 이후 이 땅에 전래된 기독교 역시 이와 같은 무속적인 문화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렇게 볼 때 한국의 기독교가 무속적인 요소를 담게 된 것은 우리 민족의 정서로 볼 때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의 기독교가 이와 같은 무속적 심성을 개혁 내지 정복하고 건전한 기독교 문화를 창출하기보다는, 그 심성에 영합해 버렸다는 사실에 있다. 이는,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토착종교의 제의 형태나 신화 체제를 흡수하기는 했지만 유일신 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야훼종교의 특수성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은 것과는 전혀 반대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라인홀드 니버가 말한 이른바 ‘문화 변혁자’로서의 기독교가 아니라, 불건전한 문화에 영합하는 모습을 한국 기독교가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무속이 우리 민족의 가장 기초적인 종교적 심성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무속적인 요소를 담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이유는, 한국 기독교의 모든 문제들이 바로 무속적인 요소들과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물론, 무속이라는 타 종교 자체를 무조건 비판할 수도 없고 또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할 부분은, 무속이라는 부정적인 종교현상이 곧바로 한국 기독교의 부정적인 요소와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한국 기독교는 무속과 영합하면서 무속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그대로 기독교에 옮겨다 놓았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무속화된 한국 기독교에 대해 비판을 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Ⅱ. 기복신앙·보수성의 근원


그렇다면, 무속이 갖고 있는 부정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무속을 한 마디로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신과의 교통이 가능하다는 샤먼(무당)이라는 존재를 중심으로 주술이나 제의를 통해 재앙을 멀리하고 복을 가져오게 하는 종교현상을 일반적으로 무속, 혹은 무교(巫敎)라고 부른다고 보면 크게 빗나가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속의 중요한 특징을 발견한다. 무속의 목적은 재앙을 멀리하고 복을 부르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복’이란 다산(多産)과 풍작(豊作) 등 한마디로 풍요로움이다. 무속이 갖고 있는 부정적 요소의 출발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먼저 무속은 재앙을 멀리하고 복을 부름에 있어 모든 책임을 천지신명과 같은 ‘초월적 존재’에 의탁한다. 우리 모든 생활의 길흉화복은 우리가 개척해 나가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천지신명 혹은 다른 신에 의해 운명적으로 지워지는 것이다. 그 신적 존재를 잘 대접하면 길하고 잘못 대접하면 망한다. 인간의 주체적인 책임이란 없다. 말하자면, 윤리의식이 결여돼 있을 뿐만 아니라 운명에 대해 의타적이다.


또한, 역사는 자연의 순환에 의해 반복되는 결실을 그 정점으로 한다.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복은 사람이나 육축이 후손을 많이 낳는 것과, 농사에서 풍요로운 수확을 얻는 것이다. 말하자면 역사의 목표가 없다. 그저 현실에서 많은 것을 얻게 되면 그것으로 끝이다. 역사의 진보는 없이 현실에 안주하며 평안하면 된다는 지독한 현실주의요 보수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를 바르게 하려는 자기개혁의 노력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범신론(汎神論)을 근간으로 하는 무속적인 정서가 우리 민족에게 있었기에, 기독교가 말하는 ‘ 하나님’에 대해서도 별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속의 영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우리 민족은 기독교 역시 무속과 같은 ‘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현실적인 종교로 받아들인 측면이 강하다.


한국 기독교의 기복신앙의 근원이 여기에 있다. 또한 우리나라의 일부 목회자들은 대중들의 이러한 정서에 쉽게 영합, ‘샤먼’과 비슷한 ‘중재역할’을 자임했다. 심방이나 안수기도 등을 통해 복을 빌어준다든지, 부흥회 등을 통해 병고침의 기적을 일으킨다고 자랑하는 것 등이 이와 같은 행태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를 무속적인 정서의 바탕에서 받아들인 것은 대중의 몫이었겠지만, 이를 극복하고 기독교의 참모습을 전해야 할 목회자들의 일부가 오히려 앞장서서‘샤먼’, 즉 무당의 역할을 맡고 나선 것이다. 다음으로, 현세에서의 풍요를 ‘최고의 복’으로 여기는 무속의 정서는 기독교를 물량주의로 물들게 했다. 즉 기독교를 믿는 목적을 물질적인 성공에 둔다는 것이다. 이같은 정서는 일반 교인이나 목회자나 마찬가지여서, 일반 교인들은 부자가 되는 것을, 그리고 목회자들은 수만 명이 모이는 큰 교회에서 목회하는 것을 최고의 축복으로 여기게 됐다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의 물량주의가 단순히 무속적인 정서의 산물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정서 속에 감춰져 있던‘부(富)에 대한 동경’을 기독교가 부추긴 측면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특히, 부의 축적을 축복의 표상으로 떠받들어 가르친 많은 목회자들은 이러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무속이 갖고 있는 길과 흉(吉凶), 그리고 화와 복(禍福)의 단순한 이원론은 길함과 복받음에 대한 무조건적인 동경을 만들어냈다.


Ⅲ. 무분별한 미국제 방식

 

이는 선교 초기, 가난하고 나라까지 잃은 우리 민족과 우리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복받은 서양 제국’을 비교하게 만들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하나님을 믿어 복을 받은 나라 미국’에 대해서는 무조건 좋게 받아들이는 풍토를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심어 줬다.


그리고 이같은 풍토로 인해, 한국의 기독교는 오랫동안 ‘친미 반공’ 의 보루에 서게 됐으며, 더 나아가 미국을 비롯한 서양 제국의 타락한 자본주의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계기를 만들어 줬다. 그리고 이로 인해 한국 기독교의 물량주의는 타락한 자본주의와 같은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무속의 역사의식이다. 한 마디로 무속은 순환적인 역사의식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순환적 역사의 목표는 자연의 순환에 따라 반복되는 현실에서의 풍요로움이다. 이같은 무속의 역사관은 보수적이고 현실적인 사고방식과 맞닿아 있다.


 뚜렷한 역사의 목표의식을 갖기보다는 현실에서 풍요를 누리는 것에 만족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이 풍요롭다면, 역사가 발전할 필요도 없고, 현실을 개혁할 필요는 더군다나 없다고 생각한다. 묘하게도, 이같은 사고방식은, ‘현상유지’ 에 안주하려 해 온 우리나라의 보수적인 기독교계의 역사인식과도 상통하는 바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뚜렷한 목적을 지닌 기독교의 직선적인 역사의식과는 완전히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부’ 와 ‘권력’ (현세의 복)을 축으로 하는 보수성과 현실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렇게 볼 때, 한국교회의 무속화 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우리 민족의 종교적 심성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Ⅳ. 무속의 ‘비종교화’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어차피 무속이 우리 민족의 기본적인 종교적 심성이라면, 굳이 이를 무시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다만 무속이 갖고 있는 사고체계가 기독교의 본질과는 어긋나는 부분이 많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이와 관련해서 많은 학자들이‘무속의 비종교화’ 를 제기한다.


 무속의 종교적인 색채를 기독교에서 제거하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무속의 길흉화복과 기복성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면, 기독교는 인간의 삶과 죽음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으므로, 역사의 목표인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가르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목적도 부와 명예, 혹은 권력과 같은 ‘현세적인’ 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실현하는 데 있으며, 따라서 기독교인은 성경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치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속은 아예 없어져 버려야 할 과거의 유산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무속이 우리 민족 문화의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면, ‘문화현상’으로서의 무속을 기독교가 수용하는 방안도 검토될 필요가 있다. 종교적 색채를 배제한 무속의 문화적 측면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무속이 지닌 ‘오락성’ 과 ‘공동체성’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추수감사 제의 등을 지내면서 많은 사람들이 음악과 춤을 즐겼다는 역사의 기록이 있다. 그리고 그 같은 의식은 그들이 속한 공동체를 엮어 주는 하나의 끈 구실을 했다. 기독교는 이와 같은 문화적 전통을 받아들여 종교가 아닌 제의의 ‘축제성’곧 놀이문화로 강화하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제의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에 존재하는 교회로서 지역사회 공동체의 연대감을 창출해 내는 대동놀이 프로그램 등을 교회가 창조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