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카이퍼

제 67장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다

새벽지기1 2021. 10. 13. 06:13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 누군가를 이야기하면서 그를 아는지 물을 때, 그 의미는 두 가지가 될 수 있다. 묻는 의미가 그냥 여러분이 그 사람을 만났다면 그를 알겠는지 하고, 별 생각 없이 묻는 것일 수가 있다. 그 질문이 그 사람의 성격에 관한 것이라면, 여러분이 그 사람을 알고 있는지를 묻는 의미가 된다. 

 

여러분이 해외로 떠나기 전 날에 아주 중요한 문서를 여러분에게 맡기면서 그곳에 사는 어떤 사람에게 전달해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이 여러분이 그 사람이 누군지 아느냐고 물을 때는 여러분이 그 문서를 엉뚱한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묻는 것이다. 반면에 한 사람이 이 사람이나 저 사람과 어떤 사업을 하려는 일에 관해 자기 아버지에게 의견을 구하는 경우라면, 그에 대해 '그 사람을 아니?'라고 묻는 아버지의 질문은 "그 사람이 존경할 만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며, 그 방면에 유능한 사람이라고 확신하니?’’라는 뜻일 것이다.

 

성경에서, 종교에서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이 용어를 사용할 때는, 어떤 사람을 개인적으로 안다는 문제에 나 
타나는 이같이 매우 다른 두 의미를 고려해야 한다. "안다"는 것은 언제나 근본적으로 어떤 차이를 인지하는 것이다. 식물학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밖에 나가면 나무와 관목들 밖에 보지 못한다. 반면에 떡갈나무와 너도밤나무, 서양협죽도와 철쭉, 재스민과 스노우볼, 베고니아와 헬리오트 로프의 차이를 배운 사람은 자기가 보고 있는 꽃이 무엇인지 알며, 이같이 풍부한 지식을 즐기는 법을 배운 사람이다. 여러분이 낯선 도시에 사람들이 백백한 거리를 지나가는 경우, 여러분은 온통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고, 아무 말도 걸지 않는 지나가는 사람들밖에 보지 못한다. 반면에 여러분이 고향 거리를 걸어갈 때는 거의 모든 사람을 익숙하게 알고 있고, 때로는 아주 작은 꼬마아이까지도 이름을 알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한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차이 이상을 넘어 가지 않는다. 여러분이 그 사람들 곁을 지나갈 때 그들을 몰라보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그들의 외모를 익숙히 알고 있다. 그들을 보는 순간 즉시 그들을 알아본다. 반면에, 여러분이 한 사람의 성격, 그의 내적 생활, 노력, 목표가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을 만큼 가깝고 친밀한 지식을 의미한다면, 전혀 다른 구별을 뜻하는 것이다. 이것은 얼굴의 특징과 외모의 차이가 아니라 그의 말과 느낌에 대한 지식을 말한다. 이때 지식은 조사, 곧 어떤 사람의 내적 존재까지 깊게 파고드는 것이 된다. 
 

사무엘 3:7에서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다 는 글을 읽을 때, 그것은 첫 번째의 외적 지식만을 의미한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에서만 오는 거룩한 존재에 대한 깊고 참된 지식을 결코 가리키지 않는다. 밤에 깨어 있을때 사무엘은 누군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었다. 그는 엘리 제사장이 자기를 부르는 것으로 여길 만큼 아주 분명하게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사무엘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부름과 사람이 부르는 소리의 차이를 아직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세 번에 걸쳐서 사무엘은 엘리에게 가서 "당신이 나를 부르셨나이다" 하고 말했다. 엘리가 사무엘에게 자기가 부르지 않았다고 거듭 말하였고, 마지막에는 이것이 혹시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것일 수도 있다고 알려 주었을 때에야 비로소 사무엘에게 새로운 깨달음이 생겼고, 그 목소리가 하나님의 음성인 것을 알게 되었다. 

 

목소리는 놀라운 신비이다. 사람마다 자기 목소리를 지니고 있다. 여러분이 깜깜한 데서 아버지나 남편, 형제의 목소리를 즉각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우리가 이 목소리와 저 목소리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듯이, 사람마다 그리고 아이마다 자신만의 목소리를 지니 고 있다는 것도 아주 놀라운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목소리를 가지고 계신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목소리와 사람의 목소리를 구별할 수가 있다. 이 차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 차이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 앞서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 외적인 지식이다. 그리고 이 외적인 지식은 점차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부요하고 충만한 지식에 이르게 되는데, 이 지식이 곧 영생이다.

 

이 하나님의 지식에는 두 가지 시여 방식이 있다. 구약과 신약에 나타나는 첫 번째 방식은 족장들과 선지자들, 사도들 
의 몫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 계시를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꿈, 이상, 출현을 통해서 그리고 마음으로 들리는 말이나 귀에 들리는 말을 통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물론 이 방식이 이런 식으로 계속 진행되었더라면, 우리 각 사람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기를 기뻐하시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먼저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개인적으로 들을 수 있는 목소리나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자기 계시를 주셨고, 끝으로 성육신하신 말씀으로 주셨다. 그러나 후에 이 방법이 바뀌었다. 그때 주신 계시가 수집되어 성경이 되었고, 이렇게 온전히 다 합쳐진 계시는 그 이후로 모든 신자에게 공익이 되고, 그리스도의 전교회에 영구한 보배가 되었다. 

 

이렇다고 해서, 이제는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가 더 이상 없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길을 인도하고 지시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무엇인가 계시에 추가되는 일은 더 이상 없다. 계시된 진리가 증가되는 일은 없다. 계시를 더 받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병적인 신비주의는 이 19세기 동안에 성경에 단 한줄도 보태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사무엘에게 그랬던 것과는 다르다. 우리에게는 성경이 하나님의 음성이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께서 우리 이름을 부르시는 것을 듣지 못한다. 더 이상 우리는 들리는 음성을 통해 위로부터 비추는 빛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동일한 이 차이는 계속 간다.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을지라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똑같은 성경을 읽으면서 은혜로 하나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성경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음의 사실은 이해하기 어렵다. 하나님 말씀의 신비를 알도록 허락받았고 그래서 날마다 여러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작용하는 복된 경험을 함으로써 흔들리지 않은 굳건한 신앙에 이른 여러분이 그토록 많은 가정에서 성경을 옆으로 치워버렸다는 사실과,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성경을 읽지만 성경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는 사실, 여러분이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할 때 격렬한 반대를 받는다는 사실에 깜작 놀란다. 그리고 이보다 더 단순한 사실은 없다. 성경과 관계를 끊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구별하지도 깨닫지도 못한다. 그들은 성경에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인식하지도 느끼지도 못한다.

 

이 때문에 분리가 생긴다. 이 사실이 깊은 골짜기를 판다. 이 사실 때문에 같은 땅에서 인구의 이 부분과 저 부분 사이에 구분이 일어난다. 이 점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따라서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도 음성도 듣지 못하는 이 사람들이 그리스도 교회의 세례 받은 교인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 괴로움을 일으킨다. 이들은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도록 요구할 분만 아니라 자기들이 기독교를 순전히 도덕적인 힘으로 존중하고, 기독교를 이같이 이해함으로써 편협하게 무익한 신조를 고수하는 사람들 보다 더 높고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도 한다. 이 생각을 따라 가다 보면 결국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 두렷한 차이점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기뻐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서 힘을 얻고 하나님 말씀에서 믿음의 확고한 기초를 발견하는 사람들의 자리에 설 수 없다. 반면에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증거할 수 있고, 그 믿음을 공공연히 고백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변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믿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없다. 그들은 이웃 사람들의 마음의 귀를 열고 하나님의 거룩한 비밀을 알려 줄 수 없다. 전자의 사람들에 대해 예수께서는 이같이 말씀하셨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회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 7:6). 그들이 여러분에게 어떤 해를 끼칠지라도 참고, 여러분의 믿음의 힘을 보여주는 것 외에는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러나 후자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예수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다. "나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나를 위하는 자니라"(마 12:30, 개역 개정은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역자주). 사랑을 추구하는 봉사가 이들에게 미쳐야 한다. 이들은 영적으로 병들어서 영적 치유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치료에는 두가지 방식이 있다. 첫째로, 여러분은 사람마다 그의 영적 질병의 성격에 따라 치료해야 한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에게 오는 각 사람에게 맞게 메시지를 전했다. 이에 대한 훨씬 더 뚜렷한 예는 각각의 영적 병자에게 특별한 약을 처방한 예수님의 모범에서 볼 수 있다. 모든 불신자들을 똑같은 방식으로 다루는, 그래서 영적 분별력이 없음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들어야 할 교훈이 여기에 있다. 둘째로, 이 치료에는 믿는 여러분이 불신자들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요구도 포함된다.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믿는 사람들의 세속적인 태도만큼 불쾌하고 기분 나쁜 것은 없다. 즉 도덕적, 영적 열매가 없는 형식적인 신앙고백, 헌신과 거룩함이 없는 열심, 진지한 생활이 따르지 않는 대담한 주장이 그런 태도들이다.

 

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서 신성한 능력이 나온다는 것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여러분의 거룩한 비밀을 받아들이고 싶은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그런 능력이 없는 것을 보며, 여러분에게 기대하는 선한 행실이 나오지 않고, 이같이 고귀하고 진지한 생활이 보이지 않으며, 반대로 그들이 끊임없이 좋은 모습을 갖추고 나타나는 그들의 위선들을 보고, 그들의 성품이나 내적 생활이 믿음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열등한 것을 볼 때, 그들은 그 사실 때문에 불쾌해 지고, 그로 인해 그리스도로부터 물러나게 된다. 
 

사무엘 시대가 그러했다. 그때 흡니와 비느하스가 거룩한 것들을 오용하였고, 엘리는 그들에게 의로운 항의를 일으키는 도덕적 용기가 없음을 드러냈다.  그 싸움은 그처럼 맹렬하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들의 신성한 소명을 알고, 남자다운 용기를 가지고 믿음을 고백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사업과 사회 활동에서 가정의 모범을 통해, 인생의 진지한 목적을 통해서, 간단히 말해 자신의 모든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전하는 믿음을 고백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