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카이퍼

제64장 세상에 하나님이 없다면

새벽지기1 2021. 10. 10. 06:19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같은 부정이 나타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형태는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순전히 무관심 때문에 생긴 무신론자들이다. 그들은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다. 그런가 하면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악된 쾌락을 추구하기 때문에 괴로운 양심을 참고 견디고 싶지 않아서 하나님을 부인한다. 또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이 너무 높아져서 하나님 앞에 절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무신론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세 그룹에 속한 사람들은 적의를 가지고 신앙을 공격하는 주장을 펼치기보다는 하나님에 관해 침묵을 지킬 뿐이다. 이들은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살지만, 세상에서 하나님을 내쫓으려고 할 정도까지 광신적인 무신론자들은 아니다.

 

사정이 이쯤 되면, 영적인 심취는 최고조에 이르게 되고, 회복될 전망은 사라진다. 이같이 하나님을 부인하는 광신적인 행위가 때로 대중적인 반응을 얻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비방하고 우습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부끄러운 제목을 붙인 소책자를 고의로 유포시키는 일을 하는데, 이것은 국가 생활에 아주 심각한 위협이 된다.

 

이것은, 모르는 사이에 해를 끼치고 국가의 탄력성을 깨트리는 독이 국가 생활에 있다는 것을 은연 중 드러낸다. 이교도들 가운데서는, 그같이 신들을 비방하는 일은 먼저 처벌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강대하였다가 후에 쇠락한 거의 모든 나라에서, 그 역사를 보면 이 슬픈 과정이 나타난다. 그 나라가 처음에는 부유하게 되고, 그 부로부터 도덕적 부패가 일어났고, 도덕적 부패는 결국 종교적 무관심에 이르게 되고, 그 다음에는 좀 더 교양있는 집단에서 사람들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살았다. 그리고 결국 모든 종교를 부정하는 광신적인 행위가 일어나고 그로 말미암아 결국 사람들은 아주 타락하게 되었고 수치스러운 파멸에 이르고 말았다.

 

사도 바울의 시대에, 에베소에 만연해 있던 불경건의 상태에서 그리스도께로 돌아은 사람들에게 바을 사도는 그들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도 전에는 세상에서 소망 없고 하나님도 없이 살았다고 말했다(엡2:12) 그리고 이것이 우리 주변에서 두루 보게 되는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우리는 정도의 차이를 보게 된다.

 

해마다 하나님에 대해 조금도 생각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신앙 서적은 단 한 권도 집에 가지고 들어오지 않는다. 이들은 가정 예배를 드리지 않고 자녀들이 아무 종교도 없이 자라게 한다. 그들은 세례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고, 교회 밖에서 결혼을 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개를 묻듯이 아무 생각 없이 고인의 장례를 치른다. 그들은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삶을 마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 그 정도까지 가지는 않았다. 특별히 결혼에서, 사람들이 아직까지는 엄숙한 교회 예배 없이 혼인식을 치를 수는 없다. 병 들었을 때나 죽음의 위험에 닥쳐서나 위기를 만났을 때, 그들은 여전히 때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그들 가운데는 자라나는 자녀들을 위해 종교를 없어도 좋을 것으로 생각지 않고 하인들에게 예배당에 갈 시간을 주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 소수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쳐 놓고, 그들은 전혀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산다.

 

그런데 무엇보다 나쁜 것은 그들이 해가 바뀌어도 계속해서 이런 방식으로 살 수 있고, 그것을 불행하게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욱 고귀한 삶의 교제에 대한 필요성이 그들 마음에서 거의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이 그들에게는 제 2의 천성이 되어 버렸다. 그 삶이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난다. 그들 속에는 더욱 고귀한 것들을 갈망하는 향수가 없다. 그들은 이 쾌락에서 저 쾌락으로 옮겨 다닐 뿐이다. 여러분이 그들에게 아무리 적게라도 신앙을 전해 주려 해도 그것이 그들에게 전혀 만족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짐이 될 것이다.

 

로마 제국이라는 쇠퇴하는 이교 세계에서 거의 2천년 동안 두루 퍼진 바로 그 마음과 정신의 경향이 오늘날 철저히 세상에 속한 이 사람들을 정복해 버렸다. 이렇다고 해서 이들이 고귀한 노력을 일체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예슬을 사랑한다. 철학 활동에도 참여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발전에 대해서, 그들은 알고 있는 만큼 거기에 대해 열광적이다. 때로 그들 속에서 시적 재능을 일깨우는 고매한 이상들을 맹목적으로 사랑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처럼 더욱 고상하고 더욱 이상적인 삶이, 그들을 예배하는 데로 나아가게 하기보다는 모든 종교를 여가 활동으로 해석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뿐이다.

 

종교가 비천한 생활을 하는 적게 가진 사람들에게 유익할 수가 있다. 상위 계층의 사람들은 너무 잘 살아서 종교가 필요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그들의 눈에는 세상에서 더 높은 위치에 이르는 수단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사랑만이 구원을 가져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베소에서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살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왔는데, 질책이나 무서운 심판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도가 그들을 책망할 때 품었던 그 사랑을 통해서 돌아왔다.

 

세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의 현실이 그 사도의 사랑에서 나타났다. 그들의 마음을 녹이고 사로잡은 것은 세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보여준 그 현실이다. 물론 이 "현실’’이 사도신경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만큼 복음의 진리와 사실을 위대하게 증거한 사람은 없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이 삶의 현실이 아무 형태가 없는 것이 아니다. 설교, 세례, 성찬이 그동안 늘 전면에 나타났다. 그러나 사도신경과 여러 목회 형태 뒤에는 성령의 사역 곧 성령께서 마음에 내주하심과,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제하는 생활이 있었다(이것이 그 능력을 설명해 주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가 이렇게 불경건을 널리 퍼트리는 이 방식에 다시 울타리를 치려고 하면, 교회는 신조들을 굳게 지켜야 하고, 교회의 신성한 사역을 계속해서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서 교회는 이런 형태들의 배후에 있는 핵심을 놓치지 않도록 해야 하고, 젊은이들과 나이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의 고귀한 영적 현실을 장려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죽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불러내실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는 거의 모든 것이 여러분을 하나님에게서 멀리 떼어 놓는다. 부와 시험만이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일상 활동, 노력을 요하는 힘든 노동, 다양한 관심사, 많은 염려와 슬픔도 여러분을 하나님에게서 끌어낸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하루에 몇 시간씩, 때로는 온종일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심지어 기도하는 순간에도 마음이 이리저리 방황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끊임없는 성령의 교제 가운데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무엇인지 거의 모른다. 이러한 부족이 신실하게 신앙을 고백한다고 해서 고쳐질 수 없고, 끊임없이 전도를 한다고 해서 고쳐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많은 활동과 선행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 현실을 대신할 수 없다. 기름을 계속해서 채우지 않고서는 등불을 켤 수가 없다. 세상에서 불신앙을 막을 수 있는 힘과 능력은 우리에게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하나님의 힘이 여러분의 마음을 분발하게 하실 때,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실 때,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께 가까이 하고 하나님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여러분의 제2의 천성이 되고, 거듭난 성품이 되었을 때에만, 이 싸움에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