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카이퍼

제 63장 밤이 깊었다

새벽지기1 2021. 10. 8. 06:14

이같이 분명한 생각은 역사 공부를 통해서 갖추어지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모든 것은 여러분이 살아계신 하나님과 의도적으로 인격적인 교제를 갖고 친교를 나누는데 달려 있고, 모든 종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더욱 더 끊임없이 하나님과 접촉하려는 영혼의 절박한 노력에 달려 있다. 여기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각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고, 그 앞에서는 모든 과학도 속수무책인 대립 (antithesis), 즉 하나님의 무한성과 모든 피조물의 유한성 사이의 지배적인 대립을 항상 만난다.

 

그동안 이 대립 사이의 간격을 메우기 위한 시도가 두 가지 길에서 진행되어 왔었다. 한 가지는 사람이 그 간격을 메우려고 헛되이 시도하였고,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이 실행하셨다. 그 간격을 메우는 일을 이교도들이 헛되이 시도하였는데, 그들은 전능하신 분의 무한성을 형상이라는 유한한 형태에 국한시켰고, 그 결과 사람의 영이 무감각하게 되었고 결국 우상숭배를 고착화 시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간격을 메우는 일을 하셨다. 자신에 대한 예배를 처음부터 한 장소에 집중시키고, 시온에 있는 성전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일체의 형상을 금하시며, 예배의 영적 성격을 유지하심으로써 다신교와 우상 숭배를 뒤엎으셨다. 결국 그림자의 시대가 그 소명을 완수한 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육신하신 말씀 안에서 성전을 주시고, 오순절날에 이 성전을 자신의 모든 회중으로, 새 언약의 이스라엘로 확대시키신 데서 이 일을 이루셨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방식을 따라 그 목적이 성취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의 무한성이나 편재성이 조금도 약화되지 않은 채,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성도들의 교제 안에서 하나님과의 사명을 누릴 수 있고, 성령을 통하여 자신들의 마음이 성령 안에서 더욱 더 하나님의 처소가 되어 간다는 것을 잘 안다. 이 사실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이르게 되는 분명한 생각은, 하나님의 자녀가 어떤 어둠 속에 있든지 어떤 고난을 당하든지 간에, 자기 하나님이 자기에게서 멀리 계셔서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가까이 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괴로워할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가 어디에서 무릎을 끓든지 하나님이 거기 계시며, 가까이 계셔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알며, 하나님께서 자기를 살피시고 자신의 행위를 속속들이 아시며, 따라서 마음의 줄이 하나님도 모르는 사이에 슬픔이나 기쁨을 당하여 어떤 소리를 내게 되는 일은 없다는 것을 안다.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늘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 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3).

 

그러나 또 한편 하나님의 자녀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위엄과 높으심을 의식하며 지낸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셨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심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지극히 가까이 계시는 그 하나님께서 하늘의 보좌에 오르셨고, 거기에서 홀로 자신의 위엄을 드러내시며, 단 한순간도 우리 인간 생명의 왜소함과 하찮음과 유한함에 묻히는 일이 없음을 우리가 깨닫도록 하셨다.

 

하늘의 생명과 여기 이 땅에서의 생명이 우리 의식에는 분명하게 분리되어 있다. 그래서 여기 이 땅에서가 아니라 오직 죽음의 문을 통과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에서 충만한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볼 것이다. 
이 두 생명 사이에 변화가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변화, 성도 회중 가운데서의 변화, 우리 마음에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한 변화가 있다. 이것이 지금 살렘에 있는 장막이며, 이것이 시은에 있는하나님의 처소이고, 자기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임재이다. 

 

이 사실이 앞뒤로 작용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몸은 하늘에 올라갔고, 성령은 우리 마음에 내려오셨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와 같이 성령 안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신다. 여기에 신비가 있다. 그리스도는 인자요 우리 중의 하나이시며 우리의 형제로서 우리 가까이 계시고 우리의 본성을 가지고 하늘에 들어가셨고, 하나님 밖에 계시지 않고 그 자신이 하나님이시며,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람의 자녀들 사이에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친밀한 교제를 이루셨다. 

 

또 한편으로,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시듯이, 성령께서는 내려오셔서 하나님의 모든 자녀의 마음 속에 거처를 정하시고 그렇게 해서 우리 영혼의 은밀한 곳에 살렘을 세우신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거하시며, 그곳에서 하나님 의 거록한 생명이 우리를 감화하시고 더욱 고귀하고 거룩한 정서와 기분과 충동을 일으키신다. 
 

이 둘은 끊임 없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서로를 보완한다. 그래서 성령이 없이는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없고, 반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토대가 없이는 성령의 내주하심도 없다. 우리의 본성은 하늘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고, 성령은 땅에서 우리 마음에 계신다. 이와 같이 거룩한 생활의 다리를 하나님께서 친히 놓으셨는데, 다리의 한쪽 끝은 하늘에 닻을 내렸고, 다른 쪽은 우리 마음의 중심에 놓여 있다. 

 

그러나 다리를 받치는 두 지점은 또 결합되는 지점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지점은 성도들의 회중 안에 있다. 사람은 누구나 지상의 성도들과 접촉할 때 하나님과의 교제가 자연히 더욱 현실적이 되는 것을 느끼며, 여러분은 오직 이 세상 사람들과만 만날 때 어떻게 이 교제의 명료함과 평온함이 줄어드는지를  스스로 느낀다. 
 

성찬의 깊은 즐거움은 이 교제의 중심으로부터 신자에게 온다. 이 성례는 신자에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증거하되, 신자들의 회중 밖에서가 아니라 회중 안에서 증거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잠히시던 밤에 떡을 떼고 포도주를 따르며 거룩한 만찬을 제정하셨을 때만큼 이 제도가 거룩하고 고귀하게 사람에게 전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 교제가 이루어지는 중심이 여기에 있고, 그 교제에 이르는 모든 길들이 합류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의견 차이로 인해 그리고 자신의 특정 견해의 옳음을 열렬히 주장함으로 인해 교회 안팎에서 하나님의 성도들과의 교제를 약화시키고 희미하게 하는 사람들의 죄악된 행위만큼 가증스러운 것은 없다. 

 

우리 구주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이 새로운 사랑은 땅에 서 생각할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부드러운 사랑이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고 우리를 자신에게까지 높이시려는 것이 바로 이 새로운 사랑 가운데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새로운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특정 견해를 선전하는데 교회와 이 거룩한 사랑의 교제를 이용하는 사람은 살렘을 파괴하는 일밖에 하지 못한다. 그는 하나님의 장막을 헛되게 만들고, 할 수 있는 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