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카이퍼

제 66장 하나님을 굳게 붙잡음

새벽지기1 2021. 10. 12. 07:19

 

죄가 종교에서 만큼 빠르게 번식되는 곳은 없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예배로서 종교는 우리 인간의 마음을 부요하게 하는 가장 고귀한 최상의 것이다. 그런데 최상의 것은 언제나 가장 먼저 타락하기 쉽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지으셨고 지지하시는 세상에서 유럽과 미국의 밖을 보면, 수백만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죽고 대체 되는데, 이들은 이렇게 세상에 오고 가면서 구원의 비밀을 모르고 여전히 거기에서 철저히 소외되어 있다. 그동안 선교가 꽤 진척되었다고 하지만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수백만의 사람들에 비하고 이슬람과 이교도의 연합 세력들에 비할 때 어떤가? 

 

특별히 아시아의 수많은 사람들은 사실 대부분의 유럽 민족들에 비해 본래 종교적 인상들을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길을 택해 나갔고, 그래서 하나님의 길에 대한 모든 참된 지식에 대해서는 깜깜하다. 하나님께서 자기 보좌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이 수많은 사람들을 내려 다보시는 아침저녁마다, 천군들의 경배와 찬양의 합창에 대한 메아리가 이들 가운데서는 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은갖 것들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도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는 무릎을 꿇지 않는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있는 이 깜깜한 어둠에 비할 때 유럽과 미국에는 빛이 있다는 말이 참으로 맞다. 세상의 이 지역들에서 세례와 성찬이 시행되는 마을을 한 군데도 찾아볼 수 없고, 크든지 작든지 간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전혀 없으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사는 경건한 영혼들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구가 빽빽한 도시들과 더 큰 마을들에서 사람들의 대다수가 하나님께 대한 예배에서 완전히 멀어져 있거나 영적 열정이 없는 채 외형적으로만 예배를 드리는 일은 숨겨질 수 있는가? 이 같은 신앙의 퇴보와 타락이 지극히 심각할 정도로 일어 났을 때,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정화하고 개혁하고 변화시키기 위한 엄청난 노력이 기울어졌고, 처음에는 이 노력이 놀라운 효과를 나타내었다. 그러나 오늘날 종교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상태를 보라. 우리가 새로운 낙심거리에 직면해 있지 않다고, 또 소위 기독교 국가라고 하는 나라들의 인구 절반이 내적이고 영적인 신앙에서 다시 멀어져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불신앙의 팽배로 인해, 그리고 기상 신호에 의해 기독교의 부흥이 일어났고, 다행히도 이 부흥이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주 불쾌한 사실은, 부흥한 바로 그 집단들 속에서 여러분이 냉담함과 형식주의, 신성한 열정의 결핍을 다시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여러분이 여전히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지속하는 가족들이라는 지극히 좁은 집단을 보고, 그 예배에서 영적 생활이 어느 정도의 따뜻함을 확보하고 유지하는지 세심하게 살펴 볼 때, 변함없이 실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이것이 이 사람들이 자기의 하나님과 아버지에 대해 느끼고 자기 하나님을 위해 따로 남겨들 수 있는 전부인가라는 것을 거듭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마지막으로 여러분 자신의 가정을 보고 자신의 마음을 면밀히 살피보며, 하나님과 함께 살고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영적 생활이 가정과 마음에 있는지,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신실함을 생각할 때 어떠해야 했는지를 자문할 때, 내적으로 애정 깊은 경건이 부단히 증진되는 일이 과연 우리에게 불가능했는지를 자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절망적인 부르짖음을 절망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 질문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은 부분적으로 밖에 할 수 없다. 

 

죄는 기력을 빼앗고 약화시키는 힘이 워낙 강력해서 매우 경건한 집단에서 조차 참된 내적이 신앙이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고, 예외적으로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을 때에만 그 수준이 조금 올라갈 뿐이다. 이 모든 것의 슬픈 결과는 하나님께서 참으로 매일 아침저녁으로 이 세상을 내려다보시며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신실하게 보살피고 부양하시지만, 순전한 사랑으로 경배하는 시는 여기저기에서 오직 경건한 심정으로부터만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대대에 걸쳐 영원하신 사랑을 가지고 계속해서 그의 말씀으로 우리를 내적으로 참되고 모든 것이 충족한 이 충만한 종교로 부르시고 가까이 이끄신다. 이 종교는 "네 하나님 여호와틀 굳게 붙잡으라"(신 30 :20, 개역개정은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 역자주)는 최고의 계명으로 생생하게 표현된다. 

이것은 어머니 품에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이다. 말 그대로 어머니를 붙잡고 어머니께 매달리며 어머니 생명의 온기를 소중히 여기고 어머니의 젖을 먹고 만족하며 어머니에게서 떨어져 있다고 느끼는 순간 우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상이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굳게 붙들어야 한다는 이 최고의 계명은 순전히 외적인 신앙과, 신앙을 순전히 형식적으로 변형시키려고 하는 모든 노력에 대항하도록 만든다.

 

이 계명이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과 이기적으로 교제하는 것 자체가 신앙은 아니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 계명은 여러분이 세상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고백하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또한 이 계명은 여러분이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고백하는 것이 신앙의 전부라고 생각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이 계명은 거룩한 생활과 선한 일에 열심할 것을 요구하지만, 참된 경건이 언제나 이런 것으로 만족될 수 있다는 망상을 버리게 한다. 여러분은 종교의 외적 형태들을 도의상 견지해야 한다고 열심히 생각하지만, 이 계명은 여러분이 항상 이 외적 형태들을 종교의 핵심으로 혼동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하나님을 위한 열정적인 활동을 떠나서 신앙을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계명을 생각할 때, 여러분이 인생의 전부를 하나님께 바친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여러분은 여전히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인상을 계속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여러분이 영혼으로 하나님과 은밀히 행하고 교제하는데 이르지 않는 한, 이 계명은 여러분이 참된 신앙을 가졌다고 자랑하는 것을 득인하거나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때때로 진지하고 열정적인 기도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제를 갖는 것이 여러분 영혼에 하늘 양식이 되는 은혜를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을지라도, 그처럼 이따금 하나님을 찾는 것은 참된 신앙도, 충만한 신앙도 아니라는 것을 이 계명은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참된 신앙은 여러 분이 중단 없이 하나님을 굳게 붙잡으라고, 말하자면 항상 하나님께 매달리라고요구하기 때문이다. 

 

그처럼 하나님께 매달린다는 것은 순간마다 여러분이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느끼고, 그래서 여러분이 항상 하나님을 기대하고, 영혼의 모든 힘을 써서 하나님을 굳게 붙잡아야 하겠다고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실, 여기 이 땅에서 지극히 성도다운 삶을 사는 사람들도 영혼의 그런 상태가 무덤 이편에서는 불가능하다고 고백할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그런 상태에 맞게 조율되어 있  않고 우리 주변의 삶은 그런 정신으로 영위되지 않는다. 전혀 그렇지 않다. 이런 고백을 하면서 스스로를 자책하고 부끄럽게 생각한다면, 이 점을 공공연히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은 정직한 태도이다. 

 

이 최고의 선에 도달하려고 애쓴 사람들이 사실 있었다. 그처럼 오직 하나님께만 매달리기 위해 모든 시대에 여러 사람들이 세상을 버리고 작은 수도원이나 암자에 슴어 살았다. 그러나 그들이 그와 같은 은둔으로 세상과 단절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그곳에 자신들의 마음을 가져갔는데, 그들이 하나님과 더욱더 친밀한 교제를 갖는 것을 끊임없이 방해한 것은 바로그 마음이 었다. 이것은 낙원에서 가능한 일이 었다. 온전케 된 하늘에 있는 성도들의 회중에서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세상메서는 이를 수 없는 것이다. 세상 생활에서 물러나는 것이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 물러나는 것에 있지 않다. 우리는 오히려 우리가 사는 곳에서 이 부르심을 성취하고 하나님을 봉사할 수가 있다. 또한 우리 마음에서 물러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 마음은 우리가 가는 곳에 항상 따라간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으로 지어진 줄을 아신다. 우리가 티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신다. 이 최고의 선에 도달할 수 없는 우리의 죄된 결핍, 죄 때문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 결핍을 하나님께서 죄사함의 은혜로 덮으신다. 여러분은 여기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것으로 마음을 놓아서도 안 된다. 여러분은 신앙의 결점을 명백히 보아야 한다. 여러분은 자신을 비난해야 한다. 이렇게 자신을 책망하는 것이 실 생활에서 이같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이를 수 있기를 날마다 더욱 간절히 기도하게 만들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피상적인 신앙과 참된 신앙의 차이가 나타난다. 

 

피상적으로 예배하는 자는 자신이 그처럼 끊임없이 하나님을 굳게 붙드는 자리에 결코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와 같이 그는 평탄한 길을 조용하고 태평하게 추구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은밀히 동행하는 것은 결코 알지 못한다. 반면에 더 깊고 더 진실된 경건의 입장에서 볼 때, 신실한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와 갖는 이 친교가 그처럼 자주 중단된 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경건한 영혼은 자신이 다시 하나님을 놓쳤다는 것을 알 때마다 두려워 떤다. 그는 자신을 책망하고, 중단된 이 교제를 다시 시작하기 위해 자신을 추스른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과 함께 지내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시간은 늘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중단되는 일은 더 적어 진다. 

 

마음을 다하여, 영혼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굳게 붙드는 것이 처음에는 어쩌면 겨우 한 달에 한 번 맛볼 수 있는 하늘의 기쁨이 된다. 그러다가 점차로 한 주도 거르지 않고 끊임없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된다. 점차 하나님과의 교제로 영혼이 거의 매일 같이 고양된다. 이렇게 되면 하루에도 몇 번씩 하나님 안에 있는 기쁨을 누리고, 밤중에 깨어날 때에도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심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하더라도 그 최고의 선에는 여전히 우리가 도달할 수 없지만, 이처럼 하나님을 굳게 붙드는 것이 우리 생활에서 더욱더 넓은 범위를 차지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홀로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는 것뿐만 아니라 한창 바쁜 생활 가운데서도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이 영혼의 전리품이 된다. 그러면 이제 더 이상 아삽을 흥내내어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 73:28)고 노래하지 않고, 자신이 마음으로 복된 경험을 하였으므로 아삽처럼 그같이 노래하게 된 다.

 

출처 자기부인/ 바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