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카이퍼

제 68장 저들이 그로 샘이되게 하시니

새벽지기1 2021. 10. 14. 05:02

우리나라처럼 물이 아주 풍부한 나라에서는 목마르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가 어렵다. 이 때문에, 성경에서 "의에 목마르다' 흑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한다"는 말이 보통 우리 가운데서 너무 약한 의미로 해석된다. 물론 뜨거운 날 오래 걸은 후에나 감정이 격해졌을 때 여러분이 시원한 냉수 한 컵을 열심히 찾는 일은 지금도 종종 일어난다. 그러나 이보다 더 강렬하게 물을 찾는 갈증은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산악 지역의 사람들이 겪는 목마름, 곧 혀가 갈라지고 은유적으로가 아니라 말 그대로 혀가 입천 장에 달라붙는 때, 입안의 마지막 습기마저 마르고 그래서 공기마져 삼키기 어려울 때 겪는 목마름을 우리는 모른다. 그와 같은 목마름으로 간절하고 점점 더 절박하게 물을 찾는 것이 실질적인 열정이 된다. 갈증으로 기진맥진 하여 땅에 쓰러져 시내를 찾아 울부짖는 마음의 헐떡거림 속에(시 42:1) 실제로 어떤 것이 있는지 전혀 모를지라도, 목마름을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만이 예배하는 회중이 부르는 노래에서 종종 표현되는 하나님의 가까이 하심을 갈망하는 마음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다. 기진맥진한 가운데서 시내를 찾아 울부짖게 만드는 것이 있다는 것을 모를수도 있다. 

 

구약과 신약의 성도들이 알았던 것과 같은, "의에 대한 목 마름’’을 오늘날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있는가? 가장자리까지 가득 찬 의의 잔이 우리 앞에 놓여있을 지라도, 사람들은 마지못한 손을 뻗어 그 잔을 들고 조금이라도 입술을 축일지를 많이 생각한다. 의를 갈망하고 의를 찾아 부르짖고, 의가 없이는 더 이상 갈 수 없어서 하나님께 눈물로 간절히 의를 구하는 것, 우리가 어디서 이런 모습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는가? 목마른 사람들은 여전히 있지만, 그 수가 줄어들지 않았는가? 이같이 참으로 하나님을 갈망하고 참으로 의에 목말라 하는 강한 열망이 드물다는 것이 우리 시대에 만연해 있는 위험이 아닌가?

 

죄는 이렇게 작용한다. 죄는, 하나님께서 자비를 보이시지 않는 한, 이 갈증의 자극이 좀처럼 작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이런 자극이 다시 활발하게 일어나려면 어떤 기간에는 특별한 은혜가 필요하다. 그런 은혜가 사도 시대 그리고 그 이후로 교회에 일어났던 모든부흥의 시기에 작용하였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 갈망이 얼마나 약하게 작용하고 있는지! 그런 갈망이 작용하는 집단이 얼마나 적은지! 게다가 그 적은 집단에서조차 그 갈망이 작용하는 힘이 얼마나 약한 지 모른다. 

 

여러분이 마음속으로 이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갈망 이 때로 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면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갈망을 조금도 느끼지 못한 채 살다가 죽는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나타난 이 은혜가 얼마나 큰지 모른다! 선지자와 시인들, 예수님과 사도들은 산악 지역에서 살았다. 그런 이유 때문에 물과 물에 대한 갈증이 성경에 그처럼 많이 나타난다.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시 36:9).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 하리로다"(87:7).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사 55:1).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요 4:l4). 
 

시편 84편에 나오는 통나무 골짜기(개역개정은 "눈물 골짜기" - 역자주)에 관한 인상적인 말이 그와 같다. 뽕나무 열매인 오디는 햇빛이 잘 드는 뜨거운 지역에서 아주 달게 익는다. 그와 같이 통나무 골짜기는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것이 쇠약해지고, 불안을 일으키며 슬픔으로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인 삶의 조건들을 표시하는 이미지이다. 낮의 뜨거움과 전투의 열기 때문에 시원한 공기와 휴식을 찾아 헐떡이는 때,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지 않으시면 길에서 낙오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우리를 덮칠 때를 말한다. 

 

물론 산간 지방에도 만년설에서 나와 졸졸 호르는 시내를 이를 만큼 물이 풍성하다. 그러나 산에서는 이 물이 똑같이 분배되지 않는다. 산의 한 곳에서는 물이 여러분을 휩쓸고 가버릴 만큼 아주 무섭게 흐른다. 다른 곳에서는 여러분이 몇 시간을 여행해도 물 한 방을을 볼 수 없는 마른 땅만 나은다. 그때는 산중턱 어딘가에 작은 샘에서 물이 똑똑 떨어지는 곳 을 만나 그 물로 여행자가 기운을 차리고, 타는 갈증을 가라 앉힐 수 있으리라는 한 가지 소망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통나무 골짜기와 관련해서 시인은 두 가지 형태의 구원을 말한다. 첫째는 타는 열기 속에서 전혀 생각지 못하게 그처럼 작은 시내를 발견하는 것이다. 둘째는, 비구름이 머리 위에 몰려들어, 그 그늘 아래에서 여행자가 태양의 열기를 피하는 것이다. 산 한 가운데 골짜기에 있는 것이 이와 같듯이, 은유적으로 말할 때 고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와 같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스스로 어떤 일도 할 수 없을 때, 숨을 헐떡 이며 심한 압박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샘이 되신다. 그때 비구름을 그들 위에 넓게 펼쳐 그늘로 보호하시는 분은 하나님 이시다.

 

"그들이 뽕나무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 그들이 하나님을 샘으로 삼으니, 참으로 비구름이 그들을 복으로 덮을 것이라"( 시 84:6,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 역자주). 살아계신 하나님 안에 그리고 그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샘을 예배하는 것이 이와 같이 우리를 위로하는 상이 되었다. 

 

여러분이 산간 촌락들에서 마을 우물이 어떤 것인지 직접 본적이 있다면, 이 상이 지닌 풍부한 의미를 파악하였을 것이다. 그처럼 작은 산간 촌락에는 대체로 마을 광장한 가운데 샘이 하나 자리 잡고있다. 이 한 샘에서, 마을의 유일한 이 우물에서 온 마을 사람들이 물을 마신다. 사람마다 집에서 나와 이 우물에 가서 물동이에 물을 채우고, 아침저녁으로 이 귀한 물을 집으로 나른다. 말과 가축들도 이 샘으로 데려가서 물을 먹인다. 마찬가지로 흙 묻은 옷가지들도 샘으로 가져가서 하얗게 빤 다음 집으로 가져간다. 

 

이와 같이 하나뿐인 이 마을 우물은 온 마을 생활의 중심지이다. 모든 것이 우물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우물에서 사람들은 서로 만난다. 샘에서 대화가 이루어진다. 샘에서 마을 공동의 생활이 이루어진다. 그와 같이 마을의 전 공동체가 이 우물이 진실로 온 마을의 생명샘이라고 느낀다. 이제 여러분이 그런 곳에서 하나님이 생명샘이라는 이 시를 노래한다면 사람들은 여러분을 이해할 것이다. 생명샘에 대한 이 즐거운 상이 모든 사람에게 호소력을 지닐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없으면 우리가 비참함 가운데서 갈증으로 망할 것이고, 하나님이, 오직 하나님만이 그의 이름을 두려워하는 모든 자들의 중심이며,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이고, 하나님 안에서 생명을 영위한다는 의미심장한 그 사상이 모든 영혼에게 공감을 얻을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 샘이 여러븐에게 더 가까워졌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샘이 우리 인간 생활과 우리 인간 본성에 들어왔다. 생명샘이 하나님 안에 하나, 그리스도 안에 하나, 그래서 두 개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나오는 이 한 샘이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솟아나 그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가까이 왔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흘러들어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확실히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예배하고 그 앞에 무름을 끓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기독교 신앙은 죽은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회증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이 한 분 그리스도야말로 온 마을의 생명샘이시다. 
 

자기 집안에 자기를 위한 생명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침저녁으로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샘에 가서, 긴 밤낮을 지낼 수 있도록 영혼의 작은 물동이를 가득 채우는 일을 해야 한다. 이 샘은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이 샘에서는 언제나 물이 호른다. 이 샘에서는 생명수가 언제나 신선하게 흘러넘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무에게도 부족한 법이 없다. 이 샘은 모든 이에게 풍성하다. 우리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하지만, 온 세상에 걸쳐서 진실한 모든 신자는 이 한샘에서 물을 얻는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한 생명샘이 우리 모든 사람의 생명의 중심이 되고, 모든 사람의 교제의 중심이 된다. 사회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온갖 차이와 분리가 여러분들을 서로 떼어놓는다. 그러나 영적이고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 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날마다 이 한 생명샘에 모이고, 하나님의 풍성함으로부터 받아 모든 사람에게 물을 주시는 분은 이 한 분 그리스도이시다. 
 

지상의 신자들은 차이와 논쟁에도 불구하고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고 이를 수 있는 연합의 새로운 힘을, 바로 이같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이 한샘에서 나오는 물로 힘을 되찾고 유지하는 이 참된 생명으로부터 매일 새롭게 끌어낸다. 

 

신자는 믿음을 실천해야한다. 믿음은 ‘‘그들이 하나님을 샘으로 삼는다"고 말한다. 믿음은 저절로 행동하지 않는다. 슬프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샘이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이 샘을 사모한 적도 없이 흑은 이 샘에서 물 한 모금 마시지도 않은 채 왔다 간다. 믿음의 행동으로만 사람은 이 샘과 영혼으로 교제를 나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신다. 여러분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샘으로 삼아야 한다. 
샘이 산간 마을에서 작용하듯이 이 샘도 여러분에게 그 같이 작용한다. 때로 산간 마을에 자기가 쓰려고 자기 마당에 샘을 판 부자가 있다. 그래서 이제 그는 더 이상 매일 아침저녁으로 마을의 샘에 나갈 필요가 없다. 그러나 나머지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 소유의 그런 우물을 가질 수가 없다. 그리고 이 말씀은 이 경우에도 적용이 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이는 그들이 이 생명샘에 가기 때문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부인/ 바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