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카이퍼

제 70장 이 남녀 영웅들의 용기와 정복하는 능력의 비결은 어디에 있는가?

새벽지기1 2021. 10. 18. 05:26

이 남녀 영웅들의 용기와 정복하는 능력의 비결은 어디에 있는가? 물론 그들이 출증하였다, 즉 그들이 자신의 힘을 훨씬 벗어나는 데까지 의지의 힘을 적용할 줄 알았다는 점에 그 비결이 있다. 이 위대한 힘은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온다. 굳건한 마음으로부터, 스스로를 굳게 붙잡는 영혼으로부터, 그들 속에 있는 영으로부터 나온다. 비교하자면, 미친 듯이 날뛰는 사람이나 술주정꾼, 미친 사람, 열정에 휩싸인 사람에게서 이와 같이 높은 긴장을 어느 정도 볼 것이다.

 

미쳐서 날뛰는 사람은 누구나 피하기 마련이다. 그에게 맞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총으로 와서 넘어뜨린다. 때로는 경찰관 세 명이서도 정신착란에 걸린 사람을 제압할 수 없었다. 미친 사람은 때로 그런 사람들에게 입히는 구속복(strait jacket)을 입혀야만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게 된다. 이 점은 그들이 얼마나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흥분한 사람이 열정에 휩싸이자 남자 세 사람을 막아내고 던져버린 적도 있다. 이것들은 모두 인간의 비참함을 보여 주는 예들이다. 그러나 이 예들에서, 내적인 어떤 것이 영과 근육에 모든 수단을 초월하는 이런 긴장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아주 엄청난 힘이 나타날수 있음을 보게 된다.

 

근육의 그런 긴장이 영의 악한 흥분과 과잉 발휘로 인해 생길 수 있듯이, 우리 영혼도 성령의 내적 긴장으로 인해 그 힘을 배나 발휘할 수 있고, 정말이지 세 배까지도 발휘할 수가 있다. 이 예에서는 그 힘의 발휘가 인간의 비참함 때문이 아니라 인간 비애에 저항하는 일에 열중하는 영의 거룩하고 드높은 정신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 다음에 여기에도 역시 담이 있다. 우리에게 가해지는 불의의 담이 있다. 우리를 압도하는 고난의 담이 있다. 견딜 수 없는 악의 담이 있다. 우리를 파멸하려고 위협하는 반대의 담이 있다. 우리를 지옥으로 내려가게 하려는 죄의 담이 있다. 부수고 뚫고 나가야 하는,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지게 되는 담이 있다.

 

이때 영응적인 용기가 나와야 한다. 거칠고 제어할 수 없는 흥분에서 나오는 과감한 용기가 아니라 결코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힘으로 이기는 영웅의 순결하고 조용하며 견디는 용기가 나타나야한다. 그때 시인이 "내가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시 18:29) 하고 노래한 것이 내게 사실로 이루어진다.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이 말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흑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을 통해서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내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고, 즉 성령의 내적 사역만이 내 영혼에 일으킬 수 있는, 지극히 고귀한 영적 감화틀 받아서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고자 하시므로 그 일이 반드시 이루어질것을 내가 안다는 뜻이다.

 

여러분이 이렇게 말하기를 원한다면, 여러분 자신의 힘을 훨씬 벗어나서까지 여러븐이 행하고 견디는 것을 두고서, 기적이라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담이 부서지고 무너지며 여러분은 담을 뛰어넘는다. 그러면 여러분은 담 저편에서 무릎을 끓고 여러분이 그처럼 초인적인 일을 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이름에 찬양과 명예를 돌리고 그 이름을 높일 것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 전통적인 이론적 신 존재 증명이다. 그러나 이같은 증명 역시 칸트에 의해 이미 논박되었다. 남은 것은 이제 양심뿐이다. 즉 종교는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의 마음(양심) 속에서만 생겨날 수 있다. 포어베르크는 선이 궁극적으로 악에 승리할 것이라는 기대를 우리가 할 수 있게 해주는 도덕적 세계질서에 대한 실천적 믿음이 종교라고 말한다. ‘‘종교는 세계의 선이 세계의 악을 이길 수 있다는 선한 마음의 바람으로부터만 생겨난다"(『종교 개념의 발전」 39면). 즉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이 세계에서 선을 실현하기를 바라고 그것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성공이 확실하지는 않더라도 그의 시도가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종교는 이 믿음과 다르지 않다. 인간은 자신의 도움으로 선이 악을 이길 수 있는 것처럼 행위한다는 것이다. 물론 포어베르크는 유덕한 무신론자도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 선이 악을 이길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궁극적인 믿음에 일치하게 행위하는 것이 의무이긴 하지만, 그렇게 행위하는 것이 신과 도덕적 세계질서의 현실적 존재를 믿지 않는 것과 상충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은 선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는 양심에 의해 이러한 목적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고 느 낀다. 물론 그는 이러한 목적이 실현 가능한지를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그는 그점을 증명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그 불가능성 또한 입증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선의 궁극적 지배라는 목표가 가능하다고 믿으며, "진리와 올바름의 왕국"(같은 책 43면)인 신의 왕국이 지상에 세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가 이것을 원하고 의지하기 때문이다. 포어베르크는 이런 의미에서 종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의무라고 간주한다. 즉 도덕적 세계 통치 혹은 신을 믿는 것은 의무이며, 이는 이론적인 의무가 아니라 실천적인 의무이고, 실제 행위의 준칙이 된다. 달리 말해 ‘"도덕적 세계 통치 혹은 도덕적 세계의 주권자로서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의무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믿는 것처럼 행위하는 것이 오직 의무일 뿐이다"(같은 책 44면). 이처럼 실천적 측면을 강조하는 것은 피히테가 이론이성에 대한 실천이성의 우위를 일관되게 밀고 나간 점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이같은 점들을 통해 볼때포 어베르크는 신에 대한 전통적인 이론적 증명의 가능성을 부정했으며, 정통 기독교 교리를 공격하는 것으로 간주되기에 충분했다.

 

「신적 세계 통치에 대한 우리 믿음의 근거에 관하여』 (uber den Grund unseres Glaubens an eine gQttliche eltregierung, 1798)에서 피히테는 기본적인 입장에 대해서는 포어베르크에 동의한다. 하지만 자신의 목표에 도달하기 에는 여전히 포어베르크의 입장에 미흡한 부분들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피히테 자신이 글을 쓰는 목표는 그러한 부분들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었다. 포어베르크와 피히테의 차이는 우리 행위의 기반이 되는 믿음이 갖는 성격이 가설적인 것이냐 아니면 필연적인 것이냐의 구분이다. 포어베르크보다 더 철저하게 피히테는 도덕적 세계 통치에 대한 믿음이 철학적 증명의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한 믿음이란 오히려 이미 우리 인간의 의식에서 발견되는 사실이다.

 

그것은 여러분이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막기 위해 잠깐 동안 음악을 연주하는 악기가 아니라 저절로 연주를 하며 그래서 여러분이 귀를 열고 천상의 조화로운 소리를 듣기를 기다리는 오르간이다. 이제 끊임없이 기도한다는 말을 하지 말라. 일의 성격으로 볼 때 여러분의 생활과 환경, 직업이나 사업상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언제나 복된 것을 느끼고, 언제나 하나님을 여러븐 앞에 모시며, 언제나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만을 보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불가능하다. 이런 의미로 이해할 때, 다윗과 사도 바울은 우리 생활이 끝없는 헌신이 아니고 세상이 수도원 독방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도도 시인도 그 말을 이런 식으로 의미하지 않았다.

 

격리된 장소에서 홀로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끓고 기도만 하는 때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는 일에 몰두하기 위해 일부러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을 찾아서 조용히 흑은 당혹스런 심정으로 앉아 있는 때가 있다. 우리가 은밀한 교제에만 전념하기 위해 이 세상메 속하는 모든 일에서 벗어나는 때가 있다.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일이란 주로 기도, 하나님과의 교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분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때에도 그런 사람의 생활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한 가지 생활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넓게 뻗어나가는 삶이고, 또 한 가지는 그와 나란히 이 세상 밖에서 하나님과 함께 지내는 매우 좁은 삶이다.

 

그가 그때 하나님 나라를 어느 정도 붙잡은 것은 틀림 없다. 그러나 이 세상 생활이 여전히 그의 실생활이고, 그가 하나님께 전념하는 순간은 이 세속 생활의 사막에 있는 오아시스처럼 이따금씩 올 뿐이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는 한, 쉬지 않고 기도하고 항상 기뻐하며 계속해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에 대해서는 물론 아직 할 얘기가 없다. 이때는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일이 없고, 세상에 거하면서 잠깐 동안 하나님을 찾기 위해 이따금 세상에서 나가는 일이 있다. 그는 그런 때에 잠깐 기도한다.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 하나님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즉시 그 시간은 끝난다. 그리고 나서 감았던 눈을 뜨고 다시 세상을 바라보며, 그날 나머지 시간을 이 세상 생활에서 보낸다.

 

하루 밤낮 24시간 가운데서 자는 데 8시간을 쓰고, 세상에 서 15시간 이상을 보내며 하나님과 함께 지내는데 쓰는 시간은 합해서 30분이 안 되는 사람의 생활이 그런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이따금 30분 이상을 혼자 있으면서 거룩한 명상에 몰두하려고 하는 일을 자주 시도해 왔다. 그러나 생활이 워낙 분주하기 때문에, 혼자 있는 이 시간에도 생활이 계속해서 끊임없이 생각 속에 들어오는데 그 힘이 너무 강해서 그들이 의지의 힘으로 그것을 물리치고 다시 거룩한 명상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이렇게 되면 낙망을 해서, 그들은 다음에는 훨씬 더 쉽게 그 일을 포기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중단없이 끊임없이 계속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이 생활은 우리의 생각에 달려있지 않고 우리의 의지로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내적 움직임으로부터 저절로 나와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