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슈

하나님이 교회를 버리시는 것이 희망이 되는 시절인가? / 황창진 목사 | 산돌교회, 협성포럼 대표

새벽지기1 2020. 7. 24. 15:43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마태16:24
지난 시간동안 위의 성서구절로 전해지는 설교는 수를 헤아릴 수 없고 이에 반응하는 “아멘”도 열광적으로 울려나왔으나 오늘의 그리스도교는 사회를 향한 제언을 할 수 조차 없는 무기력한 집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왜 그럴까?

요한복음6장에 그 답이 있음직한 장면이 그려지고 있다.
요한복음 6장 초반에는 예수께서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먹고 남은 부스러기 열두 광주리기 거두어지는 장면을 연출하고 계신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께서 영원한 생명의 말씀에 대하여 이야기를 이어 가시자 그 이야기를 듣던 여러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고 만다.

“이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요한6:60
이 이야기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이렇게 반응하신다.
“너희 가운데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요한6:64

이렇게 주고받는 이야기는 결국 아래의 결론에 이르고 만다.
“이 때문에 제자 가운데 많은 사람이 떠나갔고 더 이상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다. 예수께서 열두제자에게 물으셨다. ‘너희까지도 나를 떠나가려 하느냐?” 요한6:66-67

 

종교의 기원에 관하여 이런 내용을 읽은 기억이 있다. 사람들이 종교에 발을 들여놓는 이유는 불안을 극복하기 위함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이 주는 공포에서, 질병등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신의 능력을 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를 역행한 것이 예수이셨다. 그는 자신의 몸의 요구를 겟세마네동산에서의 처절한 기도를 통하여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라는 새로운 삶의 구조에 자기를 올려놓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후 많은 이들이 이러한 예수의 삶의 양식에 동의하여 예수를 따르겠다고 길을 나섰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의 이름에서 자기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빵은 구하면서도 자기를 소비하여 타자의 밥이 되고 평화를 만들라는 주님의 가르침은 철저하게 외면하는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무너져 가고 있는 유대공동체를 향하여 회복의 가능성이 없음을 선포하고 있다. 예레미야는 이미 타락한 유대공동체로서의 절대적으로 강한 힘을 유지하고 있는 과거의 관성은 유대공동체가 하나님의 질서 아래로 재편 될 수 없는 속도에 이르렀음을 깨달은 듯하다. 그는 유대공동체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갈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역사의 단절이 회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선언하는 것으로 읽혀지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멈춤이 없는, 기존의 질주하는 속도 위에서는 새로운 여정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맹렬히 진노하시니 평화롭던 초장들이 황무지가 되었다. 사자가 굴을 버리고 떠나가듯이 주님께서 떠나가셨다. 압박하는 자의 칼과 주님의 분노 때문에 그 땅이 폐허가 되었다.” 렘25:37-38

 

그러나 냉정하게 역사의 흐름을 판단하고 있는 예레미야는 이기적 민족주의에 사로잡힌 유대지도자들에 의하여 제압당한다. 그들은 자칭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한다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예레미야의 선언에 이렇게 반응한다.

“제사장과 예언자들과 온 백성은 예레미야가 주님의 성전에서 선포한 이 말씀을 다 들었다. . . 제사장들과 예언자들과 모든 백성이 그를 붙잡고 소리를 질렀다. ‘너는 반드시 죽고 말 것이다. 어찌하여 네가 주님의 이름을 빌려 이 성전이 실로처럼 되고 이 도성이 멸망하여 여기에 아무도 살 수 없게 된다고 예언하느냐?’ 그러면서 온 백성이 주님의 성전 안에 있는 예레미야를 치려고 그 주위로 몰려들었다.” 렘26:7-9

 

이렇게 반응하는 이들은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으니 누가 뭐라고 해도 돌이킬 일이 만무하다. 이들은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사고에서 이미 멀어진 길을 걸어가고 있으니 바룩을 통하여 읽혀지고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인 두루마리 이야기에도 두려워하거나 슬퍼하기보다는 두루마리를 태워버리는 것으로 반응하고 만다.(렘36:1 이하)

 

오늘의 우리의 감리교회는 어떠한 상황인가?
교단의 뿌리 깊게 누적된 문제들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 합리적이고 타당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수없이 많은 교회의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데 교단의 근본적인 해결책으로서의 구조개선을 기대할 수 없는 지경이다. 문제 있는 교회의 지도자들은 값싼 은총으로 무장된 폭력을 교단의 중심에까지 몰고 들어오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으나 이 문제는 또 어떻게 응대할 것인가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교단의 상황에 관심하지 않는 구성원들과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침묵하는 다수의 속내가 궁금하다. 단절이 희망이라는 생각에서 나오는 침묵이라면 위로를 받을 수 있을 듯 하나 아직은 그렇게 느껴지지가 않는다.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 하다.
“너희도 나를 떠나려 하느냐?”
예레미야의 음성도 생생하다.
“주님의 분노 때문에 그 땅이 폐허가 되었다.”

 

나는 성실하게 망하는 길을 걸어가려 한다.

그것이 희망할 수 있는 길이기를 기대하면서 나는 성실하게 망하는 길을 걸어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