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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몰락의 징후들 [출처: 뉴스앤조이]

새벽지기1 2020. 10. 3. 21:33

미국에서 코로나19가 창궐하기 시작하자 미국 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가 된 것은 방역과 개인의 자유 간 충돌이었다. 마스크 쓰지 않을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 방역을 위한 봉쇄정책을 반대하는 시위대의 모습이 뉴스를 덮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시장경제 활성화를 위해 방역 조치를 완화했다. 그것이 시발점이 되었는지 미국은 확진자 연쇄 폭발로 마비되다시피 하고 있다. 마스크 의무화가 지나친 방역 조치라는 의견도 있지만, 코로나19의 무서운 전염성은 교육·계도보다는 정부 중심의 신속한 방역 정책 아래서 더 효과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이에 따른 부수적 작용은 신자유주의 논리의 급속한 쇠락이다. 시장경제 자율성과 작은 정부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는 코로나19가 만들어 내는 변수에 무기력하게 무너지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활성화를 위해 개인의 선택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적 정부는 국민에게 마스크를 씌우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했다. 이에 반해, 방역을 강조하는 국가들에는 국민을 위험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였다. 미국처럼 의료보험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는 게 아니라 질병의 불안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해 전 국민 의료보험을 의무화했듯이, 방역 의무화는 전염의 위험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공공 의료 시스템이 살아 있는 국가에서 코로나19 방역·치료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한국에서 신자유주의 체제와 방역 우선 국가 모델 간 충돌은 개신교와 정부의 정면충돌로 이어졌다. 길고 긴 식민 지배와 독재 시대를 거치며 한국 개신교는 교회 조직의 생존을 위해 교회가 지켜야 할 가치 대부분을 희생했다. 일제 식민 체제하에서 종교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신사참배를 받아들였고, 독재 정권하에서는 정권에 대한 복종과 지지를 담보로 양적 부흥을 얻어 내기도 했다. 예언자적 목소리를 포기하는 대신, 식민 정부와 독재 정권으로부터 많은 특혜를 받았다.

독재의 시대가 끝나자 한국 사회·정치는 교회에게도 민주 사회에 속한 조직으로서의 의무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사학법과 세금 징수에 교회는 결사항전으로 맞섰다. 자연히 보수정당과 손을 잡게 되었고 정권 창출을 통해 과거의 영광 회복을 꿈꾸기도 했다. 교회는 공공성, 정치·사회참여 등 참여적 교회 모델로 탈바꿈하기를 거부하고 보수·근본주의적 신앙과 권위적 조직을 고집했다. 가장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교회 모델이 변화해 가는 사회·정치의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비리와 특혜는 정권에 의해 가려졌고 성도 개인은 약하지만 교회 조직은 강한 정치적 역량을 보여 줬다. 한국 사회에서 당연시됐던 교회 기득권은 '교회'라는 간판을 내건 모든 단체·조직에게 달콤한 유혹이었다. 다양한 목소리의 조화보다는 생존·번영의 가치를 중심으로 한 거대 조직이 된 한국교회는, 어디서 봐도 크게 다를 바 없는 여러 지역 교회로 세포분열을 거듭했다.

사랑제일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일 때문에 한국교회 전체가 비난받는 것을 억울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 한국교회는 비슷한 틀로 찍어 낸 붕어빵이다. '교회가 미안합니다.' 부산기독교총연합회가 부산시 행정명령을 어기고 대면 예배를 강행하겠다고 밝히자, 같은 지역 한 교회가 정문에 내건 현수막 내용이다. 페이스북과 각종 언론 등에서 교회의 반성·사과 내용을 담은 자성의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 모든 일의 원인과 결과에 서 있는 이들은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한다.

몇 해 전, 미국 버지니아공대에서 33명이 목숨을 잃은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 재미 한국인 조승희 씨 건으로 미국 내 몇몇 한국인 단체가 사과한 적이 있었다. '같은 한국인'이란 이유에서였다. 많은 미국 사회 구성원이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아마 그들은 개인 조승희의 범행을 다른 사람이 사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교회조차 전광훈의 교회를 자신과 같은 '교회' 중 하나라고 생각해야 하는 이 상황을 얼마나 많은 교회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교회'라는 이름은 원하면 누구나 쓸 수 있다. 그러나 교회 간판만 걸었다고 다 교회일까. 그 이름을 쓰는 단체나 사람은 '교회'라는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있었는지 잊어서는 안 된다. '교회'와 '생명 존중'은 강하게 연결된 상식 중 하나다. 그런데 이를 정면으로 무시하는 교회가 나타났다. 그 순간 교회에 대한 모든 생각은 중지된다. '교회란 과연 무엇인가' 혹은 '저것도 교회인가'로 나타나야 할 반응이 생각 중지로 인해 오히려 '교회가 미안합니다'로 바뀌어 버린다.

교회의 진정한 몰락은 '교회'라는 이름을 쓰는 단체와 건물이 증발하는 게 아니다. 수십 년간 한국교회는 유럽을 지칭해 기독교가 몰락한 곳이라 비난했다. 교회 건물이 이제 맥주 파는 곳이 되었다며, 교회가 몰락했으니 이제 곧 사회도덕과 문명도 무너질 것이라 호언장담했다. 과연 그것이 교회의 몰락일까? 이제 곧 아무도 '한국교회가 무엇인지' 묻지 않는 시대가 올지 모른다. 문제는 교회 간판을 찾기 어려운 시대가 아니다. 교회라는 단어에 어떤 의미를 붙여도 이상하지 않는 시대다. 교회 수식어로 비즈니스·투기·권력투쟁·기회주의·이기주의·광신·맹신·미신·극우 등이 자연스러운 시대, 그때야말로 교회가 진정 몰락한 시대이다.

한수현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신학위원회 사건과신학팀, 감리교신학대학교

[출처: 뉴스앤조이] 교회 몰락의 징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