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낮은 곳에서 부르는 생명의 노래'

기다림의 신앙(약5:11)

새벽지기1 2020. 3. 2. 07:55


기다림의 신앙(약5:11)


오늘날 우리의 시대는 ‘속도’에 집착하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속도, 즉 “speed”라는 말처럼 인간 문명의 병든 곳을 정확히 짚어주는 말도 없다.
영어권에서는 마약을 “speed”라고도 한다.

체코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는 그의 소설 “느림”에서

속도와 기억, 그리고 속도와 망각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만일 여러분이 길을 가다가 무언가를 생각하려고 하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하자.

이럴 때 어떻게 하는가?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을 늦춘다.

왜 그런가? 생각해내기 위해서다. 느림과 생각은 하나라는 말이다.

반면에, 길을 가다가 자신이 겪은 어떤 끔찍한 일이 떠오른다고 하자.

이럴 때는 어떻게 하는가?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을 재촉한다. 빨리 그 생각에서 달아나기 위해서다.

빠름과 망각은 하나라는 말이다.


그렇다. 빠르면 잊게 된다. 빠르면 생각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스피드는 곧 망각이다. 스피드는 곧 ‘생각 없음’이다.

홀로코스트의 전범 독일의 아이히만의 죄가 바로 생각 없음의 죄, 사유하지 않음의 죄었다.


우리의 인생이 기다림의 연속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림에 익숙지 않다.

스피드시대, 인스턴트 시대, 광속의 시대다.

생각의 속도로 살기 때문에 느린 것은 가라고 말한다.

무엇인가를 입력하면 곧 바로 출력이 되어야 한다.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해 하는 것이 이 시대의 자화상이다.

그러나 잘 기다리고 급하지 않고 느린 사람들이 오래 사는 확률이 높다.

느린 동물이 장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거북이는 느리지만 오래 산다. 호랑이는 포악하고 빠르지만 빨리 죽는다.

어머니 뱃속에서 열 달을 다 채워야 온전한 사람이 된다. 빨리 나오면 미숙아가 된다.

기다림은 곧 성숙이다. 기다림은 우리의 삶을 숙성시키는 누룩과 같다.


농부는 씨 뿌림으로 추수를 기다리고, 산모는 잉태함으로 출산을 기다리고,

낚시꾼들은 미끼를 던짐으로 고기를 기다린다.

찬란한 새벽도 길고 긴 밤중을 기다려야 찾아오고,

새파란 봄도 매서운 겨울을 지나야 우리 곁에 찾아온다.

풍성한 가을의 수확도 지리한 장마와 태풍을 지나야 살포시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부모님의 삶도 부부간의 삶도 대부분 견디는 삶이다.

사지가 절단된 나무도 봄이 되면 연두색 이파리를 올리는 까닭은 모진 겨울을 견딘 덕이다.

이러고 보면 세상살이가 기다림의 연속이다.

하루하루가 기다림의 연속이다.

약속시간을 기다리고, 전화오기를 기다리고, 보낸 편지 답장오기를 기다리고

누군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좋은 소식을 기다린다.


이와 같이 인생은 기다림이다.

기다림으로 인생의 꽃이 피고, 인생의 열매를 맺고,

인생의 길이 열리고, 기다림으로 새로운 세계에 나아간다.

인생에 기다림이 없다면 살아있으나 죽은 것이다.


신앙생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경은 나를 억울하게 하는 원수에 대해서도 ‘잠잠히 참아 기다리라’ 하신다.
그러기에 기다림은 영적인 문제이다.

기다림을 방해하는 사단의 충동이 있기 때문이다.

기다림은 재미나는 놀이가 아니다. 기다림은 처절한 전투이다.
사람의 변화도, 문제의 해결도, 믿음의 성장도, 조바심을 몰아내고 기다릴 수만 있다면

더 깊은 믿음의 지평으로 나아갈 수 있다.

기독교는 기다림의 신앙이다.

교회는 주님 다시 오시겠다는 그 약속을 믿고, 그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공동체다.


성경은 기다림에 한 이야기로 충만하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면, 잘 난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

다만 말씀에 의지하여 잘 기다렸던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기다림의 대가(大家)들이었다.

아브라함, 요셉, 모세, 다윗 모두가 기다림의 영성을 지녔던 사람이었다.

기독교는 기다림의 신앙이다.

요한복음은 특별히 하나님의 시간에 한 “때”(크로노스)와 관련하여

7번씩이나 구속사적 맥락에서 다루고 있다.


야고보서 주제는 보통 ‘믿음’이라는 한 단어로 집약되는 로마서를

균형 잡아 주는 ‘실천’과 ‘행함’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야고보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그보다 더 큰 주제는 ‘인내’다.

야고보는 서신의 초두에서 ‘인내’를 말했고, 마지막에서도 ‘인내’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1:2-3; 5:7-11).

성도들이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오직 주의 말씀으로 사는 인내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
야고보서의 주요 주제인 것이다.

그는 심지어 인내하는 자를 ‘복되다’고 선언했다(5:11).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난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셨고, 피할 길을 주셨다.

리 예수님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히12:2).


그가 말한 1장 5절에서의 ‘지혜’는 ‘인내할 수 있는 믿음’이다.

야고보는 성도들이 시련을 믿음으로 인내하며 이겨낼 수 있도록 주님의 강림을 바라보는 것이다.

야고보서가 기록된 당시엔 지금과 같은 신앙의 자유가 없었다.
고난과 핍박,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던 때다.

심지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선 목숨을 내놔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신앙의 변절자, 세상과 타협하는 자들도 생겨났다.

야고보는 고난당하는 성도를 격려하면서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인내하라고 권면한다(5:8).


이 외에도 야고보서의 문제?는 성도들이 ‘흩어진 열두 지파’로서,

자기 들이 처해 있는 사회와 문화 속에서 살면서,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잃고

하나님 아닌 것에 타협하며 세속화된 상태에 빠진 일과 상관이 있다.

이로 인하여 ‘원망’(5:9)과 불평이 팽배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는 원망과 불평의 삶은 미숙한 신앙에 머무르고 만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으시되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으시고 그저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기다림과 인내의 영성이 있는 사람은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다만 고난 중에도 길이 참고 기다린다.

믿음의 선조들이 그러했듯이 우리의 신앙생활도 기도하며 기다리는 인내가 중요하다.

다윗 역시 기다림의 영성을 지녔던 사람이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시40:1)


우리들의 삶이라는 것, 고난이라는 것의 공통점은 견디고 인내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기다림과 인내는 신앙에 있어서 높은 수준에 있는 믿음의 질을 결정한다.

고난을 너무 치열하게 싸워서 이기고 극복하는 것으로만 여기지 말아야 한다.

고난은 그냥 견디는 것이고, 견디는 것은 소망과 관련되어 있고,

믿음과 관련되어 있고, 궁극적으로 구원과 관련된 일이다.

성경은 분명히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을 여러 번 언급하고 있다.


믿음은 소망과 인내와 기다림을 거느리고 구원을 누리게 한다.

기다림과 인내는 구원을 현실화하고 열매 맺는 신앙생활에 있어 깊은 영성에 해당한다.
‘벼락공부’는 있어도 ‘벼락 믿음’은 없다.

신앙생활 자체가 기다림과 인내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기다림과 인내의 영성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주님 오실 때까지 지치지 않고 지켜내야 하는 믿음은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삶은 이겨내는 것보다 견뎌내야 하는 일들이 훨씬 더 많다.

삶 자체가 고해요, 고난의 삶일진 견뎌내야 한다.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자들에겐 더 더욱 기다림과 인내가 요구된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갑자기 삶에 기적이 일어나거나 축복의 결과물이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예수님을 믿어도 여전히 내 삶에 고난이 있고 힘든 일이 몰려올 수 있다.

그래서 주님의 때를 기다리고 인내해야 한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눅18:8)는 말씀을

섣불리 믿음에 강조점이 있다고만 생각지 말아야 한다.

‘인자가 올 때’라는 부분에 강조점을 두면 주님 오실 때까지 낙망하지 않고

기하지 않는 기다림이 더욱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