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낮은 곳에서 부르는 생명의 노래'

우리들의 영원한 본향

새벽지기1 2020. 2. 29. 06:38


우리들의 영원한 본향


우리에게 영원한 본향이 있음을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본향이 주는 힘은 고향에 비길 바가 아니다.

거기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기에 고난과 시련을 이기게 하고 우리를 위로해 주실 것이다.

본향이라는 헬라어 ‘파트리스’는 아버지라는 ‘파테르’에서 왔다.

이러한 본향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큰 은혜와 능력을 베풀어 주실 것이다.


인류의 지성들은 본향이 어디 있는가의 문제를 가지고 견해를 달리했다.
그러나 그 다름의 문제가 자유와 진리에 속한 하나님 나라의 생명의 문제와 관련이 없다면

나름의 추구하는 견해가 저들을 종국적으로 사망으로 치닫게 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요 순례자로서의 여정을 걷고 있는 것이다.

야곱은 바로 왕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나그네 길의 세월’이라고 했다.

여행지에 장롱을 지고 가는 나그네는 없다.

그 곳은 지나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짐

이 무거우면 여행 자체가 힘겨워지기 때문이다.


‘순례자’란 떠돌아다니는 방랑자, 나그네로 ‘길 위의 존재’(Being on the way)임을 나타낸다.

그 방랑과 방황이 유일한 참 길(The way)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인해

순례로 바뀌어 진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이름이다.

순례와 방랑의 차이는 이곳저곳을 기웃기웃 떠돌아다니되 궁극적 목표가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다.

방랑은 항구를 떠난 표류선과 같지만,

순례는 반드시 찾아가고 돌아가야 할 ‘소원의 항구’(시107:30)가 있다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가 영원한 하늘의 본향을 그리워했고 믿음으로 그 나라를 추구하며 살았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노벨상 수상(1964)자까지 선정되었던 사르트르,

(그의 대표작 구토는 그에게 노벨상 수상을 안겨준 소설이다).

그는 무신론의 명사로 불리울만큼 신의 존재를 부인했다.

그가 느낀 구토증은 인간존재의 부조리였는데 결국 존재란 그 자체가 부조리이며

존재 모두가 의미와 필연성을 상실한 것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작은 키에 사팔뜨기다. 그러나 탁월한 유머감각으로 사람을 웃겼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의도를 잘 파악해 누구나에게 호감을 주었던 사람이었다.


1980년 3월 봄, 프랑스 파리 어느 병원에서 한 세기를 떠들썩하게 하던

존경받는 한 지성인이 급성 폐기종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그는 한 달 동안 이 병원에서 문자 그대로 발악을 했다.

소리를 지르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고함을 치고 절규했다.

그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신의 병명이 무엇인가 곁에 서있는 아내에게 묻지 못했다고 한다.

소리를 지르고 발악하고 괴로워하는 그 사람은 바로 자유라는 이름하에 수많은 글을 남기고,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던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다.

그는 입원한지 한 달 만에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 프랑스의 신문들이 떠들기 시작했다.

“사르트르가 왜 이렇게 죽어야하는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도 외쳤던 그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르트르에게는 돌아갈 본향이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대서특필했던 것이다.

한 편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본회퍼는

사르트르보다 앞서 2차 세계전 중 나치에 항거하다 독일 수용소에서 죽어갔다.

어느 날 그는 간수가 감방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직감적으로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음을 알았다.

그는 감방 동료들에게 “형제 여러분, 이제 마지막 시간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예배하신 집으로 돌아갑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라며 감방을 나섰다.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나님 없이 산 사람과 하나님과 함께 산 사람의 차이이다.

그리고 돌아갈 본향이 있는 사람과 돌아갈 본향이 없는 사람의 차이다.

사르트르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았기에, 죽음이 두려웠고, 불안과 공포 속에서 죽어갔다.


우리들의 본래 고향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다.

신앙인에게 있어 죽음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우리에겐 돌아갈 본향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하다.
”그들이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6)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본향은 단순한 이상향이거나 특정 장소가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로 체험한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생명세계, 그것이 참 본향이다.

“다 이루었다”(요19:30)고 말씀하신 예수가 본향이 되신다.

그 안에 탕자를 맞이하는 잔치와 참된 쉼과 안식이 있다.

믿음의 조상들은 나그네로 살았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 본 것이다(히11:10).

우리들의 결말이 참으로 아름답고, 행복하고, 광스럽고 소망스럽다. 그

곳에 우리 함께 영원한 한 가족으로 거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