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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 축적된 우리의 신앙 유산

새벽지기1 2020. 2. 26. 06:59


역사 속에 축적된 우리의 신앙 유산


우리가 늘 기독교 신앙을 이야기할 때,

개개인의 열심이나 충성이나 능력을 발휘하는 신앙의 열정을 귀하게 여긴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을 유지하고 힘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공유하고 내재적으로든 공식적으로든 합의된

동일한 신앙고백을 함께 고백하는 신조나, 신경 혹은 신학과 교리는

바르고 건강한 신앙에 무엇보다 필수적이며 우선한다고 할 수 있다.

바른 신학 없이 바른 신앙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는 이제까지 신앙은 체험이고 신학은 학문이라는 관념으로

신학이 신앙에 방해된다는 비약으로까지 발전해왔다.

그러나 신학 없는 신앙은 무속 화되기 쉽다.

성경은 수천 년 전에 하나님을 너와 나로 체험한 자들이

나님을 3인칭으로 우리에게 기록하여 전해주고 있다.

이러한 시간과 역사를 제외한 체험만의 진리 추구는

주관주의로 흐르기 쉽고 신비주의, 체험주의, 사변주의, 심미주의로 빠지기 쉽다.
우리가 늘 개혁주의 혹은 칼빈을 말하려는 것은 그 개인의 인격이나 능력에 관한 것이 아니고

영적 진리가 감추어졌던 암매한 역사 속에서 칼빈이라는 한 인물과 그와 뜻을 함께 했던

수많은 종교개혁 자들과 진리의 정직성과 풍성함을 유감없이 드러내신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주목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취지와 맥락에서 저의 부족한 글쓰기와 사상들이 펼쳐지고 있다고 생각해 주기 바라며 이 글을 쓴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즉각적인 응답과 세속적 성공과 실용성을 추구하게 되었다.

교리에 대한 무관심과 신학에 대한 경시 풍조 속에서 교회는 진리를 좇는 대신 실용주의를 추구하게 되었다.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신앙의 표시나 고백이 사라지고 심지어 신학조차 필요 없게 되었고
기독교 신앙이 그만큼 단순화되었다.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신앙의 단순화는 지성이 가지는 교만에 대한 반작용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종교개혁 이후 수많은 신학적 논쟁은 교리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부작용을 낳았다.

이것은 지성이 부패한 결과이기도 했지만 그로 인한 인간의 이성을 신앙 위에 군림하게 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성경적인 교리와 신학에 대해 회피하면서 신앙은 윤리 도덕적 실천 행위에 멈춰버렸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가 빈약해지는 심각한 병폐 중에 하나는

교회의 전통적 교리나 축적된 경험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실용적이고 측정 가능한 것으로만 대체되고

온갖 프로그램과 여러 형태의 문화적인 신앙이 차지하게 되었고 교리와 신학을 이야기하면 그

것은 특정한 목회자나 성경 전문가들이나 필요한 것으로 치부한다.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고백되어온 신앙고백과 같은 신조와 신경들은 시대를 가로질러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에 참여하고 이어주는 건전한 신앙전통이며 역사 속에 축적되어온 보석과도 같은 신앙 유산이다.

교회 역사 속에서 형성된 성경에 가장 충실한 공교회적 신학 전통을 우리는 개혁주의, 혹은 칼빈주의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종교개혁을 따라 역사적 교회 속에서 검증되고 축적된 신앙유산을

우리는 개혁주의 정통 신학(신앙)이라 규정한다.
역사적 개혁신학은 성경해석을 어떤 개인의 성경해석에 의존하지 않는다.
여러 세대, 여러 사람이 내재적으로 동의한 성경 해석이며 묵상이다.

오랜 동안 역사적 교회의 채널 속에서 검증되고 확인된 바른 신학과 신앙고백으로 다져온 교리라고 할 수 있다.


개혁교회의 신조는 어느 한 사람의 주관적인 사상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

여러 시대에 걸쳐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한 이들의 합의된 내용이 들어있는 건강한 신앙전통을 말한다.

그러므로 역사적 신앙 유산 안에 확보된 역사적 교회 안으로 들어올 때

우리는 수많은 응원군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고 그 세계가 얼마나 바다와도 같이 넓고 깊은가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경을 가장 바르고 풍부하게 해석한 노선이 “역사적 개혁주의”라는 말을 불편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결코 독선적이거나 교만한 이기주의적인 발언이 아니다.

이 말은 비록 서로 다른 시대에 살았어도 종교개혁을 따라 역사적 교회 속에 축적된

건전한 교리와 보편적인 참 교회를 이룩해 온 신앙고백의 한 형태로서의 역사적 채널을 말하는 것이다.


교회 역사 속에서 개혁교회는 비성경적인 교리와 신학을 주장하는

이단적인 주장들을 방어하고 가름하는 확실한 무기가 있었다.

그것은 개혁교회가 일치하여 작성한 신앙고백 문서들과 교리 문답서들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중심으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 벨직 신앙고백서,

그리고 돌트 신경과 같은 문서들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개혁교회를 통해 검증된 신학적 신앙유산인 종교개혁은

성경진리에 대한 교리와 신학의 바른 해석으로의 회복이었다.


예배의 기초는 성경의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모든 우상숭배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바로 이해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부터 시작된다.

이 바른 이해가 우리들의 참된 신앙고백이 되고 참과 거짓, 진리와 독선을 가리는 시금석이다.

이러한 사상은 모든 개혁주의자들의 공통된 사상이었다.

그래서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성경과 함께 신조를 가장 중요시하게 여긴다.


베드로의 바른 신앙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의 고백은

사단의 일과 하나님의 일(마16:22-23)을 가르는 시금석이며

우상이냐 참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이 무엇인지를 가른다.

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보혜사 성령은 어떠한 역할을 하시는 분이신가에 대한

이해와 설명 자체가 신학이요, 교리요, 신앙고백인 것이다.

이와 같은 말씀들이 역사 속에서 축적되어 모든 세대를 넘어

그리스도인들의 동일한 고백으로서의 권위를 갖는 것이 신조와 신경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른 신앙고백위에서 전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부득불 배타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역사적 신앙의 유산 안에 거하므로 정통 교리와 건전한 신앙 고백적 신조를 계속 지켜나가는 일이 무엇
보다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