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낮은 곳에서 부르는 생명의 노래'

십자군 영성, 십자가 영성

새벽지기1 2020. 2. 23. 08:06


십자군 영성, 십자가 영성


개신교도들은 특히 한국 교회신도들은 ‘십자군’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용기를 내고 그 단어를 사랑한다.

찬송가 중에서도 “믿는 사람들은 주의 군사니”(합351장), “십자가군병들아”(352장),

“십자가 군병 되어서”(353장) 등의 찬송을 즐겨 부른다.
신자들로서 불퇴전의 신앙용기와 전도열정, 희생봉사를 격려하는 좋은 찬송가들이다.

그런데, 모든 언어에는 시대를 따라 전혀 다른 뉘앙스를 지니게 된다.

그 중에 표적 단어 한 가지가 ‘십자군전쟁’에서 유래된 ‘십자군’(Crusade)이라는 단어다.


교회사적으로 보면 ‘십자군 전쟁’(1095-1270)이란 근대 200년 동안 8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군사병력을 중세기 서방기독교 황제들이 소집하여,

예루살렘 성지와 예수님의 묘가 이슬람교도들에게 점령되어 있는 것을

회복한다는 종교적 명분으로 일으킨 인간  살육 전쟁이었다.

종교적 명분자체 외에도 정치적 야망, 황금획득, 교역로와 군사적 목적이 실질적 이유이기도 했다.

아브라함의 종교들(유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간에 피비린 냄새 진동하는 인간 살육과 파괴 전쟁은

사랑, 자비, 용서, 화평, 비움, 용서, 우애를 강조하는 아브라함의 3형제 종교가 가르치는 근본정신과는

완전히 반되는 행동이 ‘십자군 전쟁’이었다.


14세기-19세기까지 스페인과 유럽 기독교 국가들이 실질적으로는

세속적 가치들(황금, 영토, 군사, 무역, 정치이념 등)을 강요하거나 펼쳐가면서

“군사적 경제적 이념적 힘을 가지고 상대를 점령, 지배 통치하려는 집단적 행동”을

현대사회는 ‘십자군적 행태’라고 비판적 의미로서 쓴다.

여기에서 ‘십자군 영성’은 선교를 목적으로 하더라도, 힘의 숭배, 지배통치, 점령, 우월감을 앞세우는

‘종교적 심성(영성)’을 비판적으로 반성하기 위해서 20세기 선교신학에서는

지난 20세기 초반까지 세계교회의 경향성을 반성하면서 “십자군의 영성”이라는 말을 쓴다.

이에 대조하여 ‘십자가 영성’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마음과 정신을 닮고

봉사, 헌신, 사랑, 비움, 화평, 자기희생을 감수하면서

“생명을 살리고 더 풍성하게 하려는 성과 선교정신”을 말한다.


십자군 영성은 강하고 큰 힘을 추구하고 과시하고, 우월감과 상대를 지배하려는 동기가 다분하다.

폭력과 전쟁도 불사하려는 군사주의와 타문화와 타종교에 한 배타적 태도, 자기 과시적이며 외형주의를 선호하고,

교리적, 교조적 신념을 주입 세뇌하려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십자가 영성은 비움과 낮춤과 섬김 그리고 상대를 존중하고 함께 공생공하려는 동기와

비폭력과 평화 화해를 끝까지 추구한다.

또한 타문화 타종교에 대한 이해와 협력을 추구하고 내실을 추구하고 겉 치례와 형식주의를 경계하며,

자유로움과 진리추구에서 열린 자세를 취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골고다 십자가 처형장에서 형 집행 책임을 맡은 이방인 군백부장이

그렇게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며, 용서하시며, 다 이루었다고 기도하며 죽으시는 예수를 보고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15:39)라고 고백했다는 것이다.

누가복음에는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눅23:47)라고 고백했다.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초자연적 기적을 행하신 것도 아니요, 초능력을 과시하거나,

못을 박고 창을 겨누며 자기를 저주하는 로마병사와 강도들을 향하여 분노, 사후징벌협박, 저주로 심판하지 않으셨다.

당신 스스로는 도리어 약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로서 고난과 죽음을 받았다.

그러나 정의, 진실, 사랑, 하나님 신뢰, 원수에 대한 용서의 마음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던 로마군백부장은 감동하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의인”이라고 고백했다.

이것이 ‘십자가의 영성’의 힘이다.


십자군의 영성과 십자가의 영성이 어떻게 다른가?


예루살렘 찾은 동방박사들은 십자군 영성이요,
베들레헴 아기께 경배함은 십자가 영성이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 시기함은 십자군 영성이요,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리라.” 함은 십자가 영성이다.


베드로가 주님 가는 길 가로막음은 십자군 영성이요,
자기를 부인하라 하심은 십자가 영성이다.


변화 산에 장막치자 함은 십자군 영성이요,
산 아래로 내려감은 십자가 영성이다.


사마리아에 불 내리려 함은 십자군 영성이요,
꾸짖고 다른 마을로 감은 십자가 영성이다.


“누가 더 크냐?”는 다툼은 십자군 영성이요,
“어린이가 되라.” 하심은 십자가 영성이다.


자기를 높이려 함은 십자군 영성이요,
자기를 낮추는 것은 십자가 영성이다.


작은 자를 무시함은 십자군 영성이요,
작은 자를 돌봄은 십자가 영성이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십자군 영성이요,
주님의 끌려가심은 십자가 영성이다.


칼을 빼어 귀를 벤 것은 십자군 영성이요,
12군단 하늘 군대도 포기하심은 십자가 영성이다.


정죄하고 처형함은 십자군 영성이요,
묵묵히 달리심은 십자가 영성이다.


무덤의 봉인도 지키지 못한 십자군 영성,
죽음을 이기고, 무덤 문을 열고, 부활로 승리한 십자가 영성.


우리는 늘 십자가의 길이냐 십자군의 길이냐 선택하며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