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낮은 곳에서 부르는 생명의 노래'

진실과 진리(요18:33-38)

새벽지기1 2020. 2. 22. 07:04


진실과 진리(요18:33-38)


나는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이 진실 된 사람인가를 가장 먼저 살핀다.

깔이 있어서 성질 값 한다 해도 간사함이 없고 정직한 사람이면 인간됨의 도리를 진실함에서 찾는다.

그러기에 모든 것을 갖추었어도 인품이 거짓되고 간사함이 있다면 인간성의 한계가 그것으로 가늠된다.


성경이나 경전은 진실의 책이 아니라 진리의 책이다.

진리는 믿음의 문제이고 사상의 문제이며 가치의 문제이다.

진리는 말로 전달되지 않는다.

언어라는 수단 대신 삶으로 말한다.

진리는 한마디로 정의되거나 단정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이미 자신의 삶을 통해 진리가 무엇인지를 다 말해 주었다.

그분의 삶 자체가 진리다. 예수는 자신의 삶으로 목소리를 대신했던 것이다.


진리는 진실 그 너머에 있다.

진리의 나라는 시간과 공간에 제약받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요18:36).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옳고 그름을 넘어선다.

진리를 안다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

꾸만 기독교를 변호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복음 자체이신 예수님을 증언하고 변증하는 일을 멈추라는 말이 아니다.

기독교만이 진리라고 항변할 필요가 없다.

진리는 스스로를 항변하거나 변호하지 않는다.

다만 삶으로 말할 뿐이다.


빌라도가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이었다.

윤리적인 진실 차원에 섰던 빌라도는 옳고 그름의 눈으로 법정 판사 노릇을 했지만,

그를 통해 우리는 진실이 얼마나 무능하고 허약한 기반을 갖는가를 보게 된다.

유대인 무리들이 아무 죄 없는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치며 소동했을 때,

빌라도는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웠다.

그는 예수에게 아무 죄목도 발견하지 못했지만 자신이 손해를 볼까 두려웠다.

혹시나 이 사건으로 민란이 일어나면 그것을 수습하지 못해
유다 총독의 자리에서 려날까 두려웠던 것이다.

진실에는 옳고 그름이 있는 만큼 높고 낮음,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이 있기 마련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높은 자리에서 낮은 데로 떨어질까 두려워 손해 보지 않으려고

진실을 저버리고 타협해 버린다. 이것이 바로 진실의 최후의 모습이다.


진실의 허와 실


빌라도는 법정에서 끊임없이 진실을 밝히려 애썼다.

예수의 행위 중에 무엇이 옳았는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구분해 내려고 했다.

이것이 진실의 차원이다. 빌라도의 ‘진실’은 윤리적인 차원이다.

진실에는 옳은 것이 있고, 그릇된 것이 있다. 진실이란 거짓 없는 사실을 말한다.

진실은 사실로 존재하는 일들이며 사실이 있는 그대로 밝혀진 것이다.

진실이란 잘하면 상이요, 잘못하면 벌이다.

진실은 윤리적 차원으로서 기본적으로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진실은 진리를 표현하는 일부분이다. 진실은 우리의 새 심령의 일부분이다.

진리의 사람 예수


그러나 진리는 도리이다. 진리는 종교적 개념이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이고 사상의 문제이며 가치의 문제이다.

성경이나 경전은 진실의 책이 아니라 진리의 책이다.

진리는 절적이며 영원적이며 근본적인 참된 이치이다.

리는 예수의 말씀이다. 진리는 생명이다.

진리는 윤리를 뛰어넘는 하늘의 영원한 가치다.

진리는 물리세계와 관계없이 무형적으로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진리는 자유의 다른 이름이다.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생명의 다른 이름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을 어떻게 받고 있는가?

한마디로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을 진리로 읽으면 명확하다.


옳고 그름이 사람을 살리지는 못한다.

진리이신 예수님만이 나도 살리고 너도 살리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을 넘어선 예수는 어떻게 목숨을 부지해 보고자 살려 달라 애원하지 않았다.

그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 그름의 잣대가 있는 진실의 세계 그 너머 진리의 세계에는 죽음이 없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묵묵하게 걸어갔다.

그 길이 모든 사람을 살리고, 결국에는 자신도 살리는 길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진리를 삶에 적용할까?


  진실에게 한계가 있고 죽음이 있지만, 진리는 영원하다.
  진실은 어느 특정한 사회나 장소에만 통하지만, 진리는 시간과 장소를 초월한다.
  진실은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진리는 사실 너머의 정신을 추구한다.
  진실은 자기중심적이지만, 진리는 모두의 중심이다.
  진실은 자기만 생각하지만, 진리는 모두를 생각한다.
  진실은 자기만 살려고 하지만, 진리는 모두를 살린다.
  진실은 비굴하게 타협하지만, 진리에는 타협이 없다.
  진리로 사는 것은 나만 옳다는 것을 넘어선다.
  진리는 너는 너로 좋고, 나는 나로 좋다.
  진리는 나도 이익 되고 너도 이익 되게 한다.
  진리는 나도 살고 모두도 살게 한다.


진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삶의 목표이거나 추구하는 상이 될 수가 없다.

진심은 그 자체로서 삶의 태도일 뿐이지 진심은 삶의 궁극적 방향이거나 목적이 될 수 없다.

진심으로 좋은 일을 할 수 있지만 진심으로 남을 해할 수도 있다.

결과가 예상이나 기대보다는 훨씬 더 악할 수 있다.

진심이나 진지함, 열심이 없이는 진리도 어떤 것도 추구할 수 없겠지만 그것은 삶의 태도일 뿐이다.

열심과 진지성은 옳을 수도 있고 그릇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열정과 진지함에 인생의 통제권을 넘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 인간이 만족시켜야 하는 수준은 하나님의 거룩한 높이이다(히12:14).

예수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참된 지식이 없이는 나 자신의 열심과 진지함은 헛되고 무익하다.


우리가 성경에서 표적으로 잘못 오해하고 있는 말씀 중에 하나가

요한복음 4장에서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린다는 말씀에 대한 해석이다.

령과 진리이신 예수 안에서의 예배를 드리는 ‘때’가 도래하다는 말씀을

리의 태도와 자세로 오해하게 하는 그릇된 해석이다.

많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행한다.’는 말과 ‘진리로 행한다.’는 말을 같은 의미로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

무엇이든 진심으로 행하기만 하면 그것은 곧 옳고 정당한 것이라고 착각을 한다.

그래서 어떤 일의 결과를 놓고 그것이 얼마나 진리로 이루어진 것인지를 따지는 사람은 드물다.

단지 그 일을 추진하는 사람이 얼마나 진지하게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를 따져 보고

그런 요소들이 있었다면 주어진 결과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진심이나 진지함이 진리와 동일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진심, 열심, 최선이라는 말은 의외로 자기 주관적인 아집과 교만으로

진리가 들어설 공간마저 수용치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진심과 성실과 최선에 한 실례는 얼마든지 들 수 있다.


처녀가 아이를 낳으려면 당연히 남자를 만나 결혼을 통해 사랑을 나눌 때 가능해진다.

그러나 아무리 성실해도 남자 없이 아이를 낳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돌은 아무리 갈고 닦아도 돌이지 보석이 될 수는 없다.

인간의 최선을 다하고 자력의 끝에도 사물의 질 자체를 변하게 할 수는 없다.

성실한 간첩은 목적이 다를 때 최선을 다하여 조국을 위해 파괴활동을 일삼을 수 있고,
의학 지식이 결여된 성실한 돌팔이는 언제라도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의술에 결함을 초래할 수 있으며,

성실할 뿐만 아니라 충성되고 특심한 이단에 빠진 자들도 그것이 진리라고 우기며 평생을 헌신할 수 있다.

진심과 열심을 다했기 때문에 그것을 진리와 동일시하는 것이야말로

진리에 대한 모독이요, 진리를 파괴하는 폭력이요, 자기 자신을 소진케 하는 무지이다.

인간의 사고와 삶의 옳고 그름은 진지함이나 열심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젊은 시절 진리를 좇아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자다.

그보다 더한 열심은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박멸하기 위해 그의 열심과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가졌던 태도를 이렇게 묘사했다.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갈1:14).”

바울은 결코 열심 자체가 나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오히려 여러 곳에서 신앙의 열심을 강조하고 있다.

로마서 12장 11절에는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했다.

바울은 무엇이든 자신의 양심에 따라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행동했다.
그는 그리스도인을 쓸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옳다고 생각한 정도가 아니라

점을 아주 확신하고, 특심하여 그것이 자신을 바쳐야할 바른 삶임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던 사람이다.

어떻게 인간이 이처럼 진지하게, 진심으로. 그리고 열심을 다해 인간을 핍박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바울은 철저한 율법주의자로서 자신의 진심과 진지함에만 충실했을 뿐,

진리라는 절대적 푯대와 방향과 대상은 없었다.


베드로 역시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버려도 자신만은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겠다며 호언장담했건만,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순간 그는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며 도망치는 배신자가 되고 말았다.
베드로가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짓을 행한 것은,

그에게 진심이나 진지성 혹은 열심히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만약 그에게 진지함이나 진심이 없었다면, 어찌 자신의 직업과 처자를 등지고 주님을 따라 나설 수 있었겠는가?

그에게 열심이 없었던들, 어찌 하루 이틀도 아닌 만 3년씩이나 주님을 좇을 수가 있었겠는가?

그에게는 누구 못지않은 진지함과 열심이 있었지만 진리 안에서의 바른 성찰에 이르지 못했다.

모세의 열심과 열정을 아는가? 그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이것은 오늘날과는 무관한 과거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진지성과 진심으로, 그리고 열심과 최선을 다해 사람과 진리를 짓밟는 일들은 오늘도 비일비재하다.

얼마나 많은 자들이 오직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얼마나 진지하게 불법을 저지르며,

얼마나 진심으로 불의와 타협하고, 얼마나 열심히 탈법을 자행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진심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진리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진리로 살아갈 때에만 우리는 옳고 바른 길, 영원한 길 위로 나아갈 수 있다(시127편 참고).

방향과 대상도 없이 나의 주관적인 열심과 진심만을 가지고 달려간다면

열심히 달려간 만큼 진리의 방향으로부터 멀어질 뿐이다.

영원한 진리에 기대지 않는 인생이란 모두 소모품에 불과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소모되어버린 인생은 그 대가로 얻은 세상의 것으로는 결코 회복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