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낮은 곳에서 부르는 생명의 노래'

내 안에 사는 이 (갈2:20)

새벽지기1 2020. 2. 25. 07:00


내 안에 사는 이(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갈2:20)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너무도 좋아하고 암송하는 익숙한 말씀이기도 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잘못 적용하고 오해하는 말씀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그 첫 번째 오해는 이것이다.
이 말씀은 나의 신념과 결심으로부터 시작되는 충성과 헌신의 맹세도 아니요 서약서도 아니다.

신학용어로 말하면 이 말씀은 성화(sanctification)를 촉구하는 말씀이 아니라

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얻게 된 성도들의 신분,

즉 믿음으로서 의롭게 되었다는 칭의(justification)를 선포하는 말씀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정적 사면을 통한 율법주의를 공격하는 것이다.

맨 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자’만 외쳐서는 안 된다.

이미 구원을 얻은 자로서 나라는 존재는 더 이상 나로서 존재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은 새사람이라는 것에 한 칭의적 선포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윤리론을 펼치려는 의도가 아니라 구원에 관하여 신분 문제를 천명하는 말씀이다.

바울의 서신서는 대부분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확보된 성도들의 신분과 정체성을 전제하고 권면하고

그 다음에 명령하는 식의 편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두 번째 오해는 이것이다.

헬라어 원문에서 이 말씀에서 믿음은 단 한번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말 성경에서는 ‘믿는 믿음’이라는 단어가 두 번 사용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과 ‘그 아들의 믿음’의 차이에 대한 것이다.
지금 내가 사는 것은, 즉 내게 있는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사

구원을 이루시고 성취하신 그 객관적 진리 위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보혈의 공로로 인한 십자가의 은혜로 인하여 살게 된 것이다.

믿음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다.

이에 대한 가장 적합한 말씀이 히브리서 11:1-2절의 말씀이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이 얼마나 엄연하고도 확연한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른 문제인가?


우리의 믿음의 시작이며 또 믿음을 완전케 하시는 주님


결국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모든 ‘믿음’이라는 단어 속에는

‘언약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가 그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의 요소에서 그리스도가 빠지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온전한 믿음이 될 수 없다.

수많은 증인들 중에서도 사람으로 태어난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사랑하고 배우고 본받아 따르며 믿어야 할

사람이 있으니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히12:2)가 곧 그분이다.


믿음이 “우리 자신의 믿음”이 아닌 “믿음의 삶”의 창시자이며 동시에 완성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야말로 모본적인 신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시험을 받은 모든 과정은 믿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며 믿음의 승리다.

십자가에 달렸을 때, “그는 하나님이 그를 구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지도자요 인도자”가 되셨다.

리스도 자신이 가장 빛나는 신앙의 모범이기 때문이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위의 중요한 구절을 너무나 교리적으로 해석하여 부활 승천하신 후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는 신앙의 대상자 예수만 바라보자는 의미로 해석하여 왔다.

그러나 히브리서를 쓴 기자의 본래 의도는, 믿음의 본을 보이시면서 몸소 앞장서서

‘생명과 구원’의 목적지에로 우리를 인도해 가셨던 ‘역사적 예수’의 참 모습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믿음은 내 이성의 소산물이 아니다.

합리적이거나 경험적인 소산물도 아니다.

예수님이 믿음을 만들어 내시고 믿음을 완전케 하시는 분이시다.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고 그분께 우리의 온 마음을 집중시켜야 한다는 말씀이다.


죽음을 이렇게 자유롭고 평안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피에 대해서 이렇게 아름답고 달콤하게 노래할 수 있는 이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다.

한분의 죽음 속에서 그 한분의 피 속에서 우리는 영원한 소망과 영생을 얻었고 생명을 찾았기 때문이다.

한 분의 거룩하신 복된 이름이, 한분의 거룩하신 보혈의 피가,

한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그 한분의 죽음에서의 부활하심이,

그분의 숨결과 호흡 한 올 한 올이, 분의 위로와 소망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생명을 낳고 구원을 이루시는 이 위대한 역사의 임재 앞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광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고난당하시고, 체포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셨다.

이 모든 단어 뒤에는 당하시고 당하셨다고 표현되고 있지만

이는 주님이 무능하시고 어쩔 수 없어서 당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계획 속에 진행되고 성취되어진 구원사건으로서의 우주적 드라마요 Love Story인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신비한 삶의 존재방식으로 사는 자들이다.

그것은 주님과의 참으로 신비한 연합의 유기적 관계이다.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사는 것이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을 때 영적 자양분이 고스란히 가지로 흘러들어 풍성한 열매를 맺는 방식이다.

어떻게 서로 안에 거할 수 있는가?

물리적으로는 전혀 불가능하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가능하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산다는 삶의 방식이고 비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