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국교회 회복 프로젝트

한국교회가 살아나는 길 (13)- 원스톱 교회에서 자발적 불편으로

새벽지기1 2020. 2. 20. 05:04


한국교회가 살아나는 길 (13)- 원스톱 교회에서 자발적 불편으로

 

“스마트한 시대에는 스마트한 교회가 필요하다.”

 

대한민국은 초고속 인터넷 시장의 선두입니다. 인터넷이 일상이 되어버린 시대입니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세계 최강의 회사로 발 돋음 한 회사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변해 버렸습니다. 인터넷의 속성과 우리 민족의 모습이 아주 닮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빠름”입니다. 빠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습성이 인터넷 시장과 잘 맞아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누가 더 빠르냐는 속도 경쟁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기기들도 기능의 설명보다는 “빠름”에 대하여 경쟁하고 홍보합니다. 빠르지 않고 살아 날 수 없는 삶이 바로 스마트한 시대의 모습입니다.

 

스마트 폰의 등장은 우리의 모든 생활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이전에 도저히 상상 할 수 없는 일들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세상입니다. 앞으로 어떠한 발전이 있을지 상상 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 시대는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갈수록 새로운 세대들과의 격차는 점점 벌어질 것이고 인터넷 양극화는 엄청날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침내 소통의 단절을 가져오는 불행을 맞이할지 모릅니다. 그만큼 사는 방식과 생각하는 모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청소년들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속도가 무섭도록 커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이해하기 전에 또 다른 방식의 삶이 터져 나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현실입니다.

 

이렇게 정신 차리지 못할 정도로 변하는 세상에서 교회는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하겠습니까?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책 가운데 “변하는 세상, 변하지 않는 복음”이 있습니다. 현 시대를 잘 보여주는 제목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제목으로 우리 시대의 교회의 모습을 다 설명하기란 약간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변하는 세상 가운데 변하지 않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들어가면 변하는 세상에 변해가는 교회의 모습과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모습이 “실리”를 따르는 신앙입니다. 자신에게 실제적 이익이 없으면 교회를 떠납니다. 그리고 이익을 가져다주는 교회를 찾아 유랑합니다. 단순히 생각하면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이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익이 변하지 않는 복음이 아니라 변하는 세상에 걸 맞는 모습이라는 사실입니다.

 

청년들은 환경과 훈련 그리고 결혼이라는 중차대한 일을 위하여 교회를 찾습니다. 결혼 초년생들은 자신의 삶과 아이들의 교육을 위하여 교회를 선택합니다. 장년들은 편하게 신앙생활하기 좋은 곳을 선택합니다. 교회는 이러한 성향을 잘 알기에 입맛에 맞는 교회를 만들어 갑니다. 어떤 교회는 특수 계층에 대한 전도를 집중적으로 하는 것을 봅니다. 간호사를 위한 집회, 교사를 위한 집회, 법률가를 위한 집회 등 보이는 현상을 정확하게 끄집어내어서 사람을 초청합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불편한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요즘은 커피가 대세를 이루는 세대입니다. 그것도 핸드 드립 커피가 상종가입니다. 믹스 커피를 먹는 이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믹스가 커피 한 통을 사면 한 달이면 새로 사양 합니다. 그런데 지금 6개월도 먹을 수 있습니다. 이유는 핸드 드립 커피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들 마다 커피 하우스를 만들고 교육도 합니다. 교회가 조금만 커도 커피 쇼 없는 교회가 없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자신의 건강과 편리함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급속도로 적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핸드 드립 커피를 먹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시대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현상임을 발하고자 함입니다.

 

또한 교회에 와이파이가 안 되는 교회가 없습니다. 와이파이가 안되면 불편해 합니다. 그래서 왠 만한 교회를 가면 대 부분 와이파이가 씽씽하게 돌아갑니다. 교회에 오는 성도들의 손에 있는 스마트 폰이 쉴 날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욱 분주하게 손이 움직이는 것을 봅니다. 현대인들은 불편한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거기에 현대인들에게 있는 비염은 더더욱 청결한 예배 처소를 원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잘 알고 대처를 잘 하는 교회 들이 대세 교회로 등장합니다. 이른 바 “원스톱 교회”입니다. 교회만 오면 모든 것이 다 해결 됩니다. 얼마 전 에 안산에 있는 모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는 온갖 편리 시설이 구비 되어 있었습니다. 커피숍은 물론이고 농구장, 수영장, 그리고 사우나 시설까지 되어 있었습니다. 저도 그 날 농구하고, 사우나를 체험하였습니다. 교회 안에 모든 것이 다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원스톱 교회”입니다. 한 번에 모든 것을 해결 할 수 있는 교회입니다. 성도들이 얼마나 자부심이 있겠습니까? 자신들이 가진 편리함과 화려함을 자랑하기에 침이 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도 침을 흘릴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편리해지고 있습니다. 편리함이 사라진 교회는 교회 자체도 함께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기에 충분합니다. 그래서 최근 교회를 개척하는 일부는 시작부터 교회를 화려하게 시작합니다. 오는 사라들이 편안 하게 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맞춥니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 시대의 보편적 모습 같습니다. 미국 새들백 교회 릭 워렌 목사는 교회는 성장은 헌신이 아니라 기술이라고 하였습니다. 스마트한 시대에 잘 맞는 이야기입니다.

 

원스톱 교회를 추구하고 소망하는 이들이 많은 우리 시대 교회들은 참으로 힘든 여정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편리를 추구하는 교회는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을 포기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비참함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지를 알려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긍정의 힘만 강조하고, 할 수 있다는 구호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렇게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이 별로 필요하지 않는 모임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비참함에 대하여 통곡하지 않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제 강단에서 사람들의 귀를 간지럽게 하는 설교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딤후 4:3-4] 죄와 죄 죽이기에 대한 간절함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힘든 세상에서 살다 온 성도들에게 평안을 주는 설교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죄를 지어도 지적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러한 모습은 교회를 멍들게 하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다시 회생하려면 원스톱 교회가 아니라 자발적 불편을 기뻐해야 합니다. 불편하더라도 복음이 있기에 헌신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외형은 기술로 성장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코 사람을 회심시킬 수 없습니다.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여 모인 성도들이 천국에 만날 수 없다면 얼마나 비참한 일이겠습니까? 자발적 불편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아굴의 기도처럼 부하게도 마옵시고,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일용한 양식으로 만족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잠 30:7-9] 일용한 양식으로 만족하고 나머지는 흘려보내는 삶을 산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참으로 아름답게 가꾸어져 갈 것입니다.

 

목사가 자발적 불편을 살아낼 때 교회는 아름다워 집니다. 성도들이 자발적 불편을 살아낼 때 전도의 문이 열립니다. 그리고 그토록 소망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내게 됩니다. 교회가 편한 것을 추구하다가 변하지 말아야 할 복음이 세속화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교회를 허무는 일입니다. 교회는 가난한 자와 불편한 자들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허세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말에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듣기에 선한 말이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자족함은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빌 4:11-13] 자족함이 무너지면 경쟁과 허영이 주인 노릇합니다. 그리고 교만과 정욕을 드러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족과 분별이 있는 삶입니다. 교회가 이러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편리함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족함을 드러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를 살리는 길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복음으로 살면 됩니다. 그 실천은 이 시대의 가르침과는 다른 자발적 불편입니다. 자발적 불편은 모든 영역에서 자족하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게으름을 말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자발적 불편을 살고 자랑할 때 세상은 우리의 선한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는 자가 더하여 지는 영광을 우리가 볼 것 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회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