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국교회 회복 프로젝트

한국교회가 살아나는 길 (12) - 막힘에서 흘러감으로

새벽지기1 2020. 2. 13. 06:45


한국교회가 살아나는 길 (12) - 막힘에서 흘러감으로 

 

아무리 많은 물이 있어도 흐르지 않는다면 심장이 멈춘 것입니다. 물은 흐를 때 제 몫을 감당합니다. 그리고 가장 아름답습니다. 흐르는 물에는 생명이 충만합니다. 고여 있는 물 에서는 온갖 냄새만이 진동합니다. 차마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외모가 아무리 멋있어도 썩은 냄새가 진동하기 때문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흐르는 강은 말려도 첨벙 첨벙 들어갑니다. 서로가 오래 된 친구처럼 만나고 기뻐하고 온통 난리를 피웁니다. 흐르는 것만이 누릴 수 있는 호강입니다. 그것은 작은 개울이든 큰 강물이든 동일합니다. 흐르고 있으면 사람이 모입니다.

 

“고인 물은 썩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썩은 물은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목이 갈한 사람에게는 한 방울의 물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썩은 물은 그러한 즐거움을 줄 수 없습니다. 썩은 물은 그림의 떡입니다. 아무리 화려해도 가치가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을 죽이는 독이 됩니다. 그러므로 물은 흘러야 합니다. 고인 물에서 어떠한 생명도 기대 할 수 없습니다. 많이 모여 있어도 폐만 끼칠 뿐입니다.

 

지금 4대강 건설로 인하여 강들이 몸살을 앓고 있다는 보도가 연일 나오고 있습니다. 강 유역을 개발하고자 하는 의지는 가상하였으나 흘러야할 강을 막아 둔 것이 패착이었습니다. 결국 강도 죽이고 개발도 물거품이 되는 이중 고통을 안겨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강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도 비슷합니다. 순리를 거역하고 역리의 삶을 살아가면 엄청난 낭패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우리시대의 가장 아픔은 세월호의 참사도 이러한 순리를 거역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 부분 이러한 역리의 삶에는 탐욕이 근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탐심이 사악한 결과를 낳은 것을 봅니다. 탐욕을 끊을 때 우리는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에 이른다고 말합니다. 결국 탐심은 사망에 이르는 길입니다. 문제는 혼자 죽는 것이 아니라 무고한 이들을 죽음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너무나 끔찍한 결과를 낳습니다. 욕심을 버릴 때 모두가 함께 사는 행복을 맛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를 향하여 세상이 염려를 합니다. 너무나 희한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주객이 전도되어 있는 이 비참함을 지금 우리는 목도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슬픈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처방을 내리지 않습니다. 진단은 하여도 처방을 내리지 않으니 눈앞에서 코가 베어져도 멍하니 바라 볼 뿐입니다.

 

한국 교회는 흐르지 않는 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온갖 곳에서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있습니다. 더 슬픈 것은 썩은 냄새에 마취되어서 더 이상 썩은 냄새를 맡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흐르지 않는 물에는 생명이 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모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멋있어도 슬그머니 빠져 나갑니다. 그것이 지금 한국 교회의 실상입니다.

 

썩은 냄새를 없애는 것은 흘려보내는 일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냄새는 사라집니다. 그러나 고집스럽게 잡고 있으면 서서히 냄새가 코를 찌르게 되고 마침내 냄새에 코가 마비되어서 돌이킬 수 없는 시궁창을 만들어 냅니다. 지하에서 교회를 해 본 이들은 곰팡이의 습격을 너무나 잘 알 것입니다. 여름만 되면 쳐 들어오는 곰팡이는 예배를 방행하는 일등 공신입니다. 그래서 곰팡이를 잡기 위하여 많은 방법을 씁니다. 그러나 대부분 실패합니다.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공기를 흘려보내는 일입니다. 신성한 공기가 들어가면 곰팡이 무력해 집니다. 그것이 가장 좋고 확실한 방법입니다.

 

흐르지 않는 물이 되어서 썩은 냄새를 내고 있는 한국 교회를 살리는 길은 썩은 물을 흘려보내면 됩니다. 너무나 단순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단순함이 전혀 실천되지 않음이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흘려보내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선 개인적인 모습으로 모든 성도는 “교회로 모이고, 교회로 흩어지고, 교회가 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성도는 교회로 모이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한 날에 모여서 함께 예배하고 교제하고 훈련을 받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로 흩어지기 위하여 준비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것은 세상으로 흩어지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하여 세상에 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일이 성도의 본문입니다. 그리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가져야 합니다. 성도 한 사람은 교회의 영광을 위한 가장 존귀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때 우리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성도는 교회로 모이고, 교회로 흩어지고, 교회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개 교회 중심적 사역에서 지역 중심적 사역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심은 믿음의 식구들을 살리고,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믿음의 식구들을 살리지도 못하고 교회 자체의 배만 불리는데 최선을 다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도 교회 자체를 치장하는 일에 너무나 많은 시간과 재정을 투입하였습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건물을 갖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흘러 보내는 사역을 멈추게 되는 교회라면 제고해야 합니다.) 그러니 이웃을 향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것이 매우 빈약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략도 지혜도 없었습니다. 결국 교회 덩치는 커가는 데 영향력은 반비례하는 아픈 모습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것은 1,2년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교회에 오래된 만성병입니다. 1980년대 이후의 한국 교회는 이러한 질병을 감당 할 수 없을 만큼 키워 왔습니다. 이제 와서 한계에 부딪힘을 체감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살아나는 일은 지역을 향하여 하나님의 보이는 사랑을 흘려보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세 번째로 교회의 본질을 위하여 대형교회를 짖는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6000명이 한꺼번에 들어가는 예배처소를 짖는 것이 축복이라 생각하면 큰 낭패입니다. 전도사 시절 사역하던 교회의 담임목사께서 자신의 비전은 2만 명의 성도가 모이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이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2만 명 교회를 꿈꾸는 젊은 목회자를 만났습니다. 참 가련하였습니다. 2만 명을 위하여 신학을 포기하고, 온갖 잡동사니들을 모아서 집회를 하는 것을 볼 때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삼위 하나님을 찬미하고 온 백성에서 칭송을 받으니 구원받는 자가 더 하여 진다[행 2:47]고 하였습니다. 구원 받는 자들이 더하여 지는 것은 오직 바른 신앙고백 위에서 살아갈 때입니다.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가 있을 때 주어집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인위적으로 하려고 하니 계속하여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더구나 교회 성장을 위하여 자신의 신학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모습을 보면 정말 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 교회는 그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강을 비유하자면 샛강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장 큰 강은 더 없이 잘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가겠습니까? 샛강이 죽으면 큰 강이 죽는 것도 시간문제입니다. 대형교회의 일반적인 성장에는 작은 교회 상도들이 한 몫하고 있음을 다양한 통계를 통하여 낭 수 있습니다. 더구나 청년들이 많은 교회들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작은 교회 청년들을 불랙 홀처럼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대형교회 스스로 이 문제를 냉철하게 보아야 합니다. 한 교회만 성장하는 것은 결코 선한 일이 아닙니다. 샛강을 살리는 일이 중요 합니다.

 

이제 교회의 본질을 더 깊이 생각할 때입니다. 교회 건축에 대한 인식이 변해야 합니다. 대형교회가 하는 사회적 일들은 많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성도와 목사가 서로 모르는 교회에 대하여 고민해야합니다. 개인적으로는 500명 정도가 한꺼번에 드리는 교회 규모가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1-7부까지 드리는 이러한 예배 형태를 폐지하여야 합니다. 2부 예배 이상은 드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규모에 넘치게 성도들이 온다면 교회를 분립하거나 세워서 흘려보내야 합니다. 물론 교회를 찾아오는 성도들이 갈급한 심령으로 와서 여기서 받아 주지 않으면 어디로 가야 하나고 물을지 모릅니다. 그러한 말을 들으면 남감하고 마음이 아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교회 분립이 필요합니다.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것이 너무나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이상적인 이야기 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교회답고, 성도가 성도다운 모습을 보고자 한다면 더 늦기 전에 이러한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흘려보내지 않으면 교회가 썩은 냄새를 내는 것은 시간문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꽉 막혀있습니다. 세상과 소통하는 것 이전에 교회 안에서, 교회들 간에 소통하는 일도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거룩한 일에 썩은 냄새를 풍기는 일을 해야 되겠습니까? 막힌 곳을 뚫고 흘려보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정직하게 흘려보낼 때 그리스도인의 몸인 교회가 건강하게 세움을 입을 것이며 하나님을 칭송하고, 온 백성에게 칭송받고 구원받는 자가 더하여 지는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