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국교회 회복 프로젝트

한국교회가 살아나는 길 (11) - 맹신에서 정직한 질문으로

새벽지기1 2020. 2. 7. 07:03


한국교회가 살아나는 길 (11) - 맹신에서 정직한 질문으로

 

“징역 1년 집행 유예 2년, 법정 구속, 상습적 성추행 목사” 

이들이 속해있는 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1번, 교회가 큰 시험에 빠졌다.

2번, 성도들이 떠났다.

3번, 목사가 징계되었다.

4번, 교단은 이들의 목사직을 면직하였다.

5번, 아무 일이 없다.

 

아마 눈치 챘는지 모르겠지만 정답은 5번입니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교회법이 무용지물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놀랍게도 대형교회 목사들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한국에서 대형교회는 목사는 무소불의의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법이 어떠한 징벌을 내려도 꿈적이지 않습니다. 교회가 크다는 것으로 모든 것을 묵인합니다. 죄가 죄로 인정되지 못하는 곳이 바로 대형교회 목사의 위치입니다. 아마 작은 교회 목사가 저러한 행동을 하였다면 벌써 목사 면직을 시행하였을 것입니다. 괘씸죄로 목사를 면직하는 만행들이 날치는 세상에서 실형을 받고 성추행이 드러났다면 여지없이 징계의 칼의 휘날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형교회 목사들은 이러한 범죄에도 회개 없이 강단에 서서 설교를 합니다. 이러한 현실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도대체 이러한 몰상식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성도들이 명명백백한 죄악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똑똑한 사람들이 많은데 이러한 불의에 대하여 침묵하거나 방관하거나 도피하는 것일까요? 어떠한 일들이 있었기에 어이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많은 이유들이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맹목적인 신앙” 때문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관심은 없고 오직 개인의 번영과 축복에만 집중하는 신앙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정직한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결국 “정직한 답변”을 가지지 않은 채 신앙 생활하는 것입니다. 목사의 설교에 대하여 분별력을 갖지 못하면 맹신자가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묵상하지 않으면 진리와 거짓을 알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맹점을 이용하여 많은 목사들이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시대의 어려움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면서 성장의 길로 나간 것입니다.


성추행을 한 목사 주변에 젊은 변호사들이 포진하여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신의 동료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보지 않고 비행 목사를 옹호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목사의 편에서는 참으로 귀한 제자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제자는 그 선생에게 참된 의미에서 쓰레기와 같습니다. 선생을 살리는 자가 아니라 선생도 죽이고, 공동체 식구도 죽이고 자신도 죽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단 한번 만이라도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섰더라면 이러한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일에 있어서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진리의 말씀 앞에 정직한 질문과 정직한 답변을 하는 일입니다. 맹목적인 신앙은 교회를 어리석은 집단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말씀 앞에 진지하게 상고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맹신을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과 지식과 신뢰와 순종에 있습니다. 바른 지식이 없는 믿음은 거짓입니다. 회칠한 무덤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하여 알려주신 가르침을 바르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믿는 도리에 대하여 풍성하지 않으면 반드시 번영과 신비주의 신앙으로 변질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에 더하여 말씀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가져야 합니다. 신뢰가 없는 신앙은 구름 잡는 것과 같습니다. 지식은 반드시 신뢰의 자리로 나갑니다. 말씀에 대한 신뢰가 있을 때 삶은 변화됩니다. 믿음은 바로 이러한 말씀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신뢰에서 머물지 않습니다. 신뢰는 고백과 순종의 삶으로 나타납니다. 순종이 없는 믿음은 살아있는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프란시스 쉐퍼가 세운 라브리 공동체는 예수를 알지 못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와서 예수를 믿는 일들이 일어나기로 유명하였습니다. 도대체 라브리 공동체가 어떠한 일을 하였기에 무신론자가 변하여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정직한 질문에 대하여 정직한 답”을 얻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문제에 대하여서도 억압하거나 회피하거나 또한 어떤 질문에도 창피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 질문이 정직하다면 답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진리가 하나님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영적인 성숙에 지대한 영향을 줍니다. 그리고 건강한 교회를 세우게 합니다. 교회가 건강하지 못한 것은 정직한 답을 얻는 일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답이 없는 세대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맹목적 신앙으로 살아갑니다. 참과 거짓에 대한 분별에 관심이 없습니다. 정의와 불의에 대한 구별에도 시큰둥합니다. 오직 자신의 삶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평안과 부의 축적에만 온통 신경이 있으니 불의한 일에 대하여 무슨 말과 행동을 하겠습니까?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참된 신앙은 행동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행동이 없는 신앙은 살아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입니다.

 

7080시대에는 교회에서 성경 공부하는 것조차 싫어했습니다. 오직 성령만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말씀보다는 방언에 집중하였습니다. 그래서 각종 부흥회가 판을 쳤습니다. 지식적 신앙은 지탄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진지하게 탐구하고자 하면 왕따를 당하는 시대였습니다. 오직 기도하고 목사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큰 미덕이며 영적인 사람의 표본이었습니다. 이렇게 교회는 성도를 어리석게 만드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었습니다. 결국 교회는 집중하였고 성장하였으면 덩치는 커졌습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사람들의 발길질에 이리저리 터지고 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성령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근거한 신앙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번영신앙은 잠간은 행복을 주지만 오랫동안 고통에 시달려야 합니다. 그 열매가 지금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살아나는 길은 정직한 질문을 던지는 훈련을 하여야 하며, 정직한 답을 얻는 성도들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의하여 무엇보다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또한 목사들은 최선을 다하여 연구하고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온 동네 방네 교회가 강해 설교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질문에도 면박을 주지 않고 정직한 답을 주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께 자라날 때 교회는 회생합니다.

 

복음의 진리는 정직한 자에게 열려있습니다. 성령의 은혜는 말씀 앞에 진지하게 고백하는 자에게 충만하게 나타납니다. 더 이상 맹한 신앙과 신비주의 신앙에 허덕이지 말고 오직 성경의 신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이 모든 질문의 시작이며, 성경이 모든 질문의 답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살아나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