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진희사모

예수님의 피값으로 지어주신 새옷을 입으라

새벽지기1 2018. 6. 18. 08:24


예수님의 피값으로 지어주신 새옷을 입으라


창새기3장 말씀을 통해 인간의 어둠이 무엇인지 함께 찾아 읽었다.
3 장7~8절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무화과나뭇잎으로 아담과 하와는 자신의 수치를 가리고 숨었다.

인간의 죄성은 무화과나뭇잎과 같은 '자기 의'로 자신의 죄를 가리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으려한다.

감추고 숨기는 것이 인간의 죄성이다. 그런데 어둠인 세상 가운데 예수님은 빛으로 오셨다.

부활로 예수님이 누구신지가 드러나고 복음의 광채가 비칠 때 그 앞에서 우리의 어둠은 드러나는 것이다. 죄가 드러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위해 가죽옷을 지어 주셨다(창3:21).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로 화목제물 삼으사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주셨듯 우리를 새피조물 삼아 주셨다(롬3:25). 햇빛이  내리쬐면 금방 말라버리는 무화과나뭇잎을 벗어버리고, 의로워지려는 행위의 율법을 벗어 버리고 예수님의 피값으로 산 새 옷을 입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다.

그러나 구원은 우리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받는 것이기에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다(엡2:8~9).


그런데 마귀는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하신 주의 말씀을 가지고 바꾸어서 하와에게 정녕 죽지 않는다고,

하나님께서 너희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될까봐 못 먹게 하는 것이라고 거짓을 말한다. 

우리도 주의 말씀을 들을 때 마귀가 넣어주는   생각, 느낌, 감정을 섞어 들을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주의 말씀을 가지고 말하는 것 같으나 다른 것이 섞이게 되면 전혀 다른 말씀이 되는 것이다.

주의 말씀은 있는 그대로 받아야 하는 것이다.

옳고 그름은 오직 여호와께 있기에 주님의 말씀에 아멘하고 따르는 것이다.


3 장8~10절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


무화과옷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의 피값으로 산 새 옷을 입으라 말씀하신다.

무화과나뭇잎으로 옷을 입은 아담과 하와는 이미 수치를 알아버렸다.

그것을 벗기가 너무나 수치스럽고 힘이 들었다. 그랬기에 하나님을 피하여 숨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벗고 새 옷을 입을 때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된다.

무화과나무옷을 벗어야 가죽옷을 입을 수 있는 것이지 그 위에 입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을 복음에 빗대에 생각해 볼 때, 복음이 되는 것에 무슨 비법이 있겠는가마는 복음이 빨리 되는 방법은 내가 믿는다고 가지고 있던 것을 싹 다 내려놓는 것이다.

또한 내가 믿는다는 것을 싹 다 내려놓게하는 방법은 '오직주만이'간증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이 모든 것에 성령의 역사가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탕자가 아버지를 떠난 상태에서 회복은 없다. 아버지께 돌아왔을 때 회복이 있는 것이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욥이 어떠했는가?
그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자식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죄사함을 위해서도 제사를 드렸다.

알지 못하고 지은 죄까지 주님께 용서를 구하는, 하나님께로부터도 의롭다 여김을 받을만큼 선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재물이 없어지고 자녀들이 죽고 자신의 몸에 욕창까지 나고 아내의 저주를 받고 친구들로부터 비난의 말을 들으며 그의 죄성이 드러났다. 하지만 결국 고난을 통과한 후 욥의 진정한 고백은 '주신이도 여호와, 거두시는 이도 여호와시니라, 내가 단련된 후에는 정금같이 나아온다.'라는 고백을 한다. 진정한 욥의 주되심이 된 것이다.


목사님께서 조화영자매의 고백을 반복해서 말씀해 주셨다.
"요한복음 2장 22절을 통과한 후에는 모든 말씀은 선포요 은혜의 말씀이다."

이렇게 고백한 조화영자매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요, 우리 공동체의 고백인 것이다.

복음은 결국 동행까지이다. 예수님과의 동행이 끝까지 가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오늘 말씀에서 몇 가지 옷에 관련된 말씀을 찾아보고 듣게 되었다.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이며 시들어 버릴 것(사64:6),

하나님께서 입히시는 구원의 옷. 공의의 겉옷(사61:10)이 있다.

바디메오는 추위와 더위를 막아주는 보물1호인 겉옷을 집어 던지고 예수님을 만나러 뛰쳐 나갔다.

돌아온 탕자에게 아버지는 새 옷을 갈아 입히셨다....


우리의 '의'는 무화과나뭇잎인 것처럼 금방 시드는 것이므로

내모습을 바라보면 행위에 눌리거나 행위를 자랑할 수 밖에 없다.

내 행위를 누구에게 말하고 안하고가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 일어난다.

그러하기에 주인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부활로 다 이루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나를 자랑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마음이 눌릴 것도 없는 것이다.

주께서 다 이루셨으니 더 이상 내가 이룰 것도 없고 주님만 바라보며 믿고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너무 쉽죠~이 너무 쉬운 것이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안되기때문에,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죽는 이스라엘백성이 하나님의 방법대로 장대에 달린 놋뱀을 바라볼 때 살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만 바라보는 것이다.

예수님의 피값으로 지어주신 새 옷, 주님의 옷을 입고 오늘도 주와 복음 위해 기쁘게 나아간다.

주님 큰 영광받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