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갈라디아서

갈라12-율법과 구원의 오묘한 얽힘 (갈라디아서3:19-22)

새벽지기1 2018. 3. 21. 07:06


그동안 율법에 대한 이야기를 몇 번 했습니다. 오늘은 그간의 이야기를 총정리하면서 마무리하려 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에 대해 말한 것은 율법이 1세기 교회의 뜨거운 이슈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1세기 교회를 뒤흔든 최고의 이슈는 ‘누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하는 문제였고, 이 문제와 관련해서 가장 민감하게 거론된 것이 할례와 율법이었는데 특히 율법이 중요했기 때문에 율법에 대해 심도 있게 말한 것입니다.

잘 아는 대로 율법(토라)은 유대인에게 영혼과 같은 것이었고 심장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을 다른 이방 민족과 구별하는 준거도 토라였고, 유대인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선민이라는 정체성의 준거도 토라였습니다. 유대인은 한 마디로 말해서 토라의 백성이었습니다. 유대인과 토라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께서는 많은 민족 중에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율법을 줬거든요. 할례를 하는 민족은 이스라엘 외에도 더러 있었지만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민족은 이스라엘 밖에 없었습니다. 오직 이스라엘만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살도록 특별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자랑하고 과시했습니다. 율법으로 율법 없는 자들을 차별했습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들과 자기들은 다르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사실은 그러라고 준 게 아닌데,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고 그 뜻을 향해 살라고 준 것이고, 그 뜻대로 살지 못하는 자기의 죄를 보라고 준 것인데, 이것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깊은 뜻인데 그렇게는 하지 않고 오히려 율법을 자랑했습니다. 율법을 가졌다는 사실이 선민 됨을 보장해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율법으로 율법 없는 자들을 차별하고, 너희와 우리는 다르다고 선 긋기에 바빴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율법으로 율법의 정신을 짓밟은 겁니다. 율법으로 율법의 정신에 어긋나는 짓을 한 겁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의로운 삶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려고 율법을 줬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으로서 마땅히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의로운 삶을 살려면 먼저 의로운 삶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의로운 삶의 지침으로 율법을 준 것입니다.

둘째, 죄를 알게 하려고 율법을 줬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지만 의로운 삶을 살 능력은 없는 자들입니다. 물론 저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몸에 할례의 표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의로운 삶을 살지 못한다는 면에서는 이방인과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할례가 존재를 변화시키지는 못하니까 할례를 받았어도 이방인과 똑같은 죄인입니다. 의로운 삶을 살 능력이 저들 안에 없어요. 그렇다면 최소한 자기들이 의로운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기들이 죄인인 것을 알아야 믿음의 도리가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은총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율법이 없으면 죄를 죄로 알지 못하니까, 죄를 죄로 알게 하려고, 자기들이 도무지 의를 행하지 못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려고 율법을 준 것입니다.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율법을 행함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된다는 것을 확증하려고 율법을 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를 알게 하려고 율법을 줬다는 사실을 좀 더 추적해봐야 합니다. 특히 세계 모든 열방에게 율법을 준 게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에게만 율법을 줬다는 사실과 함께 추적해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과 율법, 율법과 죄 사이에는 오묘하고도 역설적인 상관관계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구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에 달려 있지 율법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세요. 아브라함은 율법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율법 없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됐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이와 똑같습니다. 우리는 율법 없이, 율법을 알지 못한 채로 구원받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죄인임을 알지 못한 채로 구원받습니다.

하지만 구원을 받고 나면 율법이 주어집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은 후에 할례를 행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기서 할례를 행하라는 말씀은 아브라함에게는 율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이집트에서 해방된 후에 율법을 받았습니다. 다른 민족에게는 율법을 주지 않고 오직 이집트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에게만 율법을 주었습니다. 우리도 이와 똑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으면 율법이 주어집니다. 구원 받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율법과 아무 관계없이 살아요. 사회의 도덕과 양심을 따라 그냥 삽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야 한다는 내적 규율 앞에 서게 됩니다.

 

구원과 율법의 관계는 항상 이 패턴대로 이루어집니다. 항상 율법 없이 구원이 이루어지고, 구원이 이루어지고 난 후에 율법이 주어집니다. 구원보다 율법이 앞서는 법은 없어요. 항상 구원이 앞섭니다. 구원이 앞서고 율법이 뒤따릅니다. 왜 그럴까요? 왜 항상 이 패턴으로 구원과 율법이 작동할까요? 이유는 분명합니다. 율법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구원받은 자는 죄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구원받기에 합당한 자가 아니라는 사실, 나의 힘과 의지로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아야만 진정한 믿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고, 구원의 은총을 향유할 수 있고, 구원의 현실 속으로 한 걸음씩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보다 쉽게 이해됩니다. 한 사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를 믿는데 죄를 모릅니다. 구원을 받았는데 죄를 모릅니다. 사실 이런 상황은 발생할 수 없습니다. 구원을 받았는데 죄를 모르는 상황은 절대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발생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구원이 의미가 있겠습니까?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죄의 종노릇하는 데서 해방되어 의에 속하는 것인데, 죄를 모른다면 구원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무 의미 없습니다. 죄를 모르면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물건이 되고 말기 때문에 구원을 기뻐하거나 감사할 수도 없고, 죄를 회개할 수도 없고, 예수님을 닮아갈 수도 없고, 날마다 구원으로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죄를 알지 못하는 자는 오로지 부패한 자아 안에 갇힐 수밖에 없고, 죄의 종노릇을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마디로 잘라 말하지요. 죄를 알지 못하는 자에게 구원이란 없습니다. 만에 하나 구원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 구원은 실재가 없는 구원, 아무 것도 아닌 구원일 뿐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알지 못하는 자에게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죄를 알지 못하는 자에게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은 죽은 후에 영원히 살겠다는 욕망일 뿐이에요. 오늘 한국교회에서 작동하고 있는 믿음이 그렇습니다. 다들 ‘믿음’이라고 말들은 하는데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자기 신념의 표현인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또 욕망의 표출인 경우도 상당히 많습니다. 이명박 장로를 보십시오. 이명박 장로가 믿음으로 뭐했습니까? 믿음으로 구원을 살기에 힘썼습니까? 믿음으로 예수님을 닮아갔습니까? 믿음으로 돈과 명예와 권력을 추구했습니다. 믿음으로 자기 욕망을 채웠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놀음을 한 것에 불과하고, 욕망의 불꽃놀이를 한 것에 불과합니다. 한 마디로 믿음이 타락한 것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의 믿음이 타락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을 보면 결국 믿음이 타락했습니다. 사실입니다. 믿음도 타락합니다. 우리는 믿음, 그러면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믿음을 강화하려고만 하는데 사실 믿음도 타락합니다.

 

그렇다면 물읍시다.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이 왜 타락할까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근본적인 이유 하나를 말한다면 죄에 대한 무감각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를 깊이 인식하지 않으면 죄에 무감각하게 되고, 죄에 무감각하게 되면 욕망이 날뛰기 시작하고, 욕망이 날뛰기 시작하면 믿음이 타락합니다. 믿음이 욕망의 도구로 추락합니다.

믿음이란 본래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이니까 잠잠해야 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잠잠하지를 않고 마구 날뜁니다. 믿음이 엔진을 달고 이리저리 정신없이 쑤시고 다닙니다. 사업도 믿음으로, 선교도 믿음으로, 교회당 짓는 것도 믿음으로, 운전도 믿음으로, 연애도 믿음으로, 공부도 믿음으로, 온갖 일을 믿음으로 합니다. 앞뒤 따지지 않고 믿음으로 밀어붙입니다. 성공하겠다는 욕망, 기적과 능력을 받겠다는 욕망, 영생을 얻겠다는 욕망, 마음의 평안을 얻겠다는 욕망으로 믿음을 부여잡습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이런 믿음을 훌륭한 믿음이요 대단한 믿음이라고 칭찬했는데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이런 믿음이야말로 타락한 믿음입니다. 욕망의 도구로 작동하는 믿음은 무엇이 됐든 다 타락한 믿음이라고 보면 됩니다.

결국 믿음이 타락하는 것은 죄에 대한 감각이 무뎌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또 물읍시다. 그리스도인은 왜 죄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는 것일까요?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율법 없이 신앙생활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알게 하고 깊이 인식하게 하는 것은 율법인데 율법 없이 신앙생활하기 때문에 죄에 대해 무감각해진 것이고,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다보니 욕망이 날뛰게 된 것이고, 욕망이 날뛰다보니 믿음이 욕망의 도구로 떨어진 것입니다.

 

솔직히 교회 안에는 율법 폐기론자들이 아주 많습니다. 믿음과 행위를 대립시키고, 은혜와 율법을 대립시키면서 지금은 믿음의 시대요 은혜의 시대이지 율법의 시대가 아니라고 하면서 율법은 폐기됐다고 말하는 자들이 꽤 많습니다. 물론 원칙적으로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절반의 진실에 불과한 말입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가 올 때까지 잠정적으로 필요해서 주어진 것이다. 진정한 언약의 아들인 예수가 왔으니까 율법의 역할은 끝났다.’ 예, 옳습니다. 율법의 역할은 예수가 오심으로써 공식적으로 끝났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마지막 목표 지점에 이름)입니다(롬10:4).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한 것도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율법과 우리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고소하거나 정죄하지 못합니다. 율법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구원을 짓밟지도 못하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지도 못합니다. 예수님 아래 있는 자들은 더 이상 율법의 저주 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진실의 전부가 아닙니다. 바울은 다른 말도 했습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했습니다(갈3:21). 이게 무슨 말입니까? 율법은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지 않고 언약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언약 밖에 있는 이방 족속에게 율법을 준 적이 없습니다. 율법은 항상 언약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온 후에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지금도 언약 안에 있습니다. 폐기되지 않은 채로 언약 안에 존재합니다.

물론 우리는 율법과 상관없이 성령님을 통해 구원받았습니다.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됐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율법 앞에 서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후에 할례를 행하라는 율법을 받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해방된 후에 율법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도 구원을 받은 후에 율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야 한다는 새로운 내적 규율 앞에 서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율법(마5:48), 예수님을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율법(엡5:21),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율법(요13:34), 자기 십자가를 나를 따르라는 율법(마16:24) 앞에 서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자의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구원은 모름지기 의로운 삶을 향한 구원이기 때문에 구원받은 자는 의로운 삶의 지침인 율법 앞에 서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은 결코 폐기되지 않았어요. 율법은 그리스도인 앞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할 의로운 삶의 지침으로서 엄연히 존재합니다.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지는 못하지만 성령께서는 율법을 통해 죄를 깨우쳐 알게 하고, 죄와 싸우게 하고, 죄로부터 돌아서게 합니다. 율법이 없으면 성령께서도 이 일을 못해요. 율법이 없으면 죄를 알게도 못하고, 죄와 싸우게도 못하고, 죄로부터 돌아서게도 못합니다. 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무슨 수로 죄와 싸우게 하고, 죄로부터 돌아서게 하겠습니까. 못합니다. 율법이 있어야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깊은 이야기를 하자면 예수님이 오신 후에는 하나님이 율법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후에는 문자로 기록된 율법이 율법이 아니고 하나님이 율법이고 예수님이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곧 율법이고, 하나님 자신이 진짜 율법이고 완전한 율법입니다.

예수님이 오기 전에는 구원받은 후에 문자로 기록된 율법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오고 난 후에는 하나님이라는 율법, 예수님이라는 율법을 받습니다. 결국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구원받은 후에 율법은 받는 패턴은 똑같습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율법의 내용이 더 깊어지고 온전해졌다는 게 다를 뿐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우리 밖에 율법이 있었으나 신약시대인 지금은 우리 안에 율법이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율법이 우리 밖에 있는 율법보다 훨씬 완전한 율법이라는 게 다를 뿐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율법이 성취됐다, 율법이 완성됐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율법이 완성됐다는 말은 율법이 필요 없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율법이 폐기됐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완전한 율법이 우리 안에 새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입니다.

그런데 적잖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는 율법의 마침’이라는 말을 예수님이 율법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는 뜻으로 잘못 이해합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됐다’는 말을 율법을 완전히 폐기처분했다는 뜻으로 잘못 이해합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됐으니 이제는 율법에 메일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정말 복음처럼 들립니다. 율법의 무거운 짐에서 자유하게 되었다는 해방감이 밀려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율법은 결코 폐기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와 함께 진짜 율법, 최고의 율법이 도래했습니다. 구약시대 문자에 갇힌 율법보다 더 완전한 율법이 도래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완전한 율법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우리 밖에 있는 율법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율법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은 구약시대의 유대인보다 완전한 율법과 함께 살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도 훨씬 민감해져야 합니다. 죄에 대한 인식이 훨씬 깊어지고 섬세해져야 합니다. 뒤집어 말하면 의에 대한 기준이 훨씬 높아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또 바리새인과 세리를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누가 하나님이 백성인지에 대해 허를 찌르는 말씀을 했습니다. 바리새인은 구약의 율법에 비추어 자기 의를 자랑했습니다. 자기는 율법을 가졌고 율법을 따라 행했다고 자부했습니다. 자기는 죄인들과 다르다고 우쭐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알고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했습니다. 오직 가슴을 치며 불쌍히 여겨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 이야기를 하신 후 두 사람 중에 의롭다함을 받은 자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라고 강조했습니다(눅18:9-14). 이 말씀은 죄를 깊이 아는 자, 자기의 죄성을 깊이 인식하는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완전한 율법 앞에서 자기를 보는 자가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옳습니다. 문자로 기록된 율법을 가진 자, 몸에 할례를 행한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율법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최고의 율법이요 완전한 율법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리고 율법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더 깊이, 더 온전히 알면 알수록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되고, 구원의 영광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알게 됩니다. 최고의 율법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더 깊이, 더 온전히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구원을 더 기뻐하게 되고, 더 감사하게 되고, 더 믿음이 신실하게 되고, 더 죄에서 자유케 되고, 날마다 예수님을 닮아가게 되고, 더 온전한 구원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참 오묘하세요. 하나님은 나라는 존재가 이 우주만물 가운데서 가장 추악하고 더러운 요물인 줄을 알게 함으로써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는 자요 얼마나 대단한 자인지를 깨우쳐 알게 하십니다. 나라는 존재가 철저하게 죄의 종이라는 사실을 알게 함으로써 죄의 저주에서 해방하시고, 하나님 외에는 그 무엇에도 고개 숙일 필요가 없는 위대한 주체인지를 깨우쳐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묘하게도 율법을 통해 이 작업을 하세요.

물론 하나님은 율법 없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통해 구원을 이루어가십니다. 율법의 저주와 율법의 지배에서 우리를 해방시킨 다음 하나님은 오묘하게도 율법을 통해 구원을 이루어가세요. 그런 면에서 율법은 결코 폐기되지 않았습니다. 율법은 의로운 삶의 지표로서 영원히 하나님의 언약과 동행합니다. 교회는 율법 없는 해방구가 아닙니다. 교회는 가장 완전한 율법과 함께 살아가는 최고의 율법 공동체입니다.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고, 자유로써 율법에 순명하는 역설적인 율법 공동체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율법 없이 사는 자는 구원받은 자가 아닙니다. 율법 없이 사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율법을 온전히 행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율법 앞에서 율법을 향해 사는 자, 율법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가 구원 받은 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