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갈라디아서

갈라11-그럼, 율법은 왜 주셨나 (갈라디아서3:15-29)

새벽지기1 2018. 3. 6. 00:27


교회는 이천 년 전 예루살렘에서 태동할 때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잠잠할 날이 없는 격동의 세월을 지나왔습니다. 신앙이 뜨겁게 살아있을 때에는 세상으로부터 온갖 고난과 핍박을 받았고, 신앙이 부패했을 때에는 세상으로부터 비난과 돌팔매를 맞았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어둠을 밝히고 세상의 죄악과 상처를 치유하는 최전선의 빛이었는가 하면 무지와 몽매의 몽둥이와 거짓 진리의 칼로 민중의 삶을 오도하고 수탈하는 음습한 어둠이기도 했습니다. 한국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한국교회가 우리 사회의 빛이요 희망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까마득한 옛일이 됐습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깊은 어둠에 빠져 있습니다. 교회 역사상 유래가 없는 초고속 성장의 복을 받았지만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기도 전에 과거 어느 시대의 교회보다 더 부패하고, 더 천박하고, 더 비루하고, 더 교활하고, 더 그악스럽고, 더 편협한 교회로 추락했습니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모든 면에서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황폐해졌습니다. 특히 신학이 부재합니다.

 

1세기 교회는 어땠을까요?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1세기 교회도 뜨거운 문제로 출렁였습니다. 1세기 교회를 뒤흔든 가장 뜨거운 이슈는 ‘누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냐’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이 문제에 아무 관심이 없지만 1세기 교회는 이 문제로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잠간 그 배경을 추적해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을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하나님의 선민(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선민 됨의 표징으로 할례와 율법을 내세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할례는 단지 할례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 이래로 줄곧 선민 됨의 표징이었습니다. 율법도 단지 법이 아니었습니다. 모세 이래로 줄곧 이스라엘 백성을 다른 민족과 구별하는 표징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명령한 할례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자랑했고, 그것을 통해 자기들이 하나님의 선민임을 확인했습니다. 할례와 율법은 정말 유대인들의 자부심과 정체성의 토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로 말미암아,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면 바울로 말미암아 이 토대가 무너지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은 갈릴리와 유대를 돌아다니며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 이삭의 하나님 ‧ 야곱의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선포했습니다. 이적과 능력을 행하고 제자들을 불러 동고동락했습니다. 그러다가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삼일 만에 부활했습니다. 예수님이 예고한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했습니다. 그 후로 제자들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메시아, 오랜 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성취한 메시아로 믿고 따르며 증언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이 온전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를 메시아로 믿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예수를 믿고 따르면서도 유대인의 전통을 중시했습니다. 할례와 율법을 중시하고 유대인의 관습을 충실히 따랐습니다. 할례와 율법을 선민 됨의 표징이라고 생각하고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도 할례와 율법을 강요했습니다. 할례를 받고 율법을 행하지 않는 자는 온전한 아브라함의 권속이 될 수 없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바울은 달랐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는 유대인 중에서도 좀 특이했습니다. 다른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주장하지 않는 새로운 주장을 했습니다. [예수가 오기 전까지는 할례와 율법이 선민 됨의 표징이었으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선민 됨의 표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몸에 할례를 받고 율법을 가진 자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이 진짜 할례 받은 자요, 진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진짜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의 이 주장은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주장이었습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야 그리 충격적인 주장이 아니지만 1세기 유대인들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주장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깨부수는 실로 충격적인 주장이었습니다.

당연히 대다수 유대인들은 바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주장이 워낙 급진적인데다가 유대 역사와 전통을 부정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뿌리째 뒤흔드는 주장이었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고 비판했습니다. [바울은 사도가 아니다. 바울의 복음은 잘못된 복음이요 부족한 복음]이라며 비판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냐’하는 문제가 1세기 교회의 뜨거운 이슈로 달아올랐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이 갑론을박을 한 것도 이 문제 때문이었고,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가 만난 것도 이 문제 때문이었고, 예루살렘 교회가 공의회로 모인 것도 이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이 문제의 중심에는 바울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신앙 양심상 이 문제에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이 문제는 1세기 교회의 최고 이슈였을 뿐만 아니라 1세기 교회가 직면한 가장 중차대한 문제였고 본질적인 문제였기 때문에 가만히 눈감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를 썼습니다. 그러니까 갈라디아서는 은혜냐 행위냐, 믿음이냐 율법이냐, 하는 신학적인 문제를 논하는 편지가 아니라 ‘누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냐’하는 뜨거운 이슈를 놓고 쓴 편지였습니다. 지금까지 대다수 신학자나 목사들은 믿음이냐 율법이냐를 논한 편지라고 생각해왔는데 사실은 그것이 갈라디아서의 핵심 논제가 아니었습니다. ‘누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씨냐’하는 것이 핵심 논제였습니다. ‘누가 아브라함의 씨냐’, ‘어떤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선민이냐’하는 것이 1세기 교회의 뜨거운 이슈였기 때문에 이 문제를 명확히 하기 위해 갈라디아서를 쓴 거였습니다. 세계적인 신약학자 톰 라이트도 갈라디아서의 중심 논제를 ‘기존의 선민론을 예수를 중심으로 새롭게 재정의’하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고 말했습니다(바울과 하나님의 신실하심. 하권. 384).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앞부분에서 이 사실을 분명하게 못 박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였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을 것이라고 하신 약속은 육체의 씨를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라 언약의 씨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약속한 언약의 씨는 이삭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의 언약을 성취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권속이다.] 무슨 말입니까? 할례와 율법에 속한 자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 언약에 속한 자들, 하나님의 말씀의 씨로 잉태된 자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이 진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의 이 말을 듣게 되면 자연스레 의문이 튀어나옵니다. 그러면 할례는 뭐며, 율법은 뭐냐, 바울이 주장하는 대로 할례와 율법이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할례를 명하시고 율법을 주신 것이냐, 하는 의문이 튀어나옵니다. 바울은 이 의문에 대해 설명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논리적으로 설명합니다.

 

첫째, 율법은 인간을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신명기 27장 26절을 인용하면서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이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v.10)고 했습니다. 물론 모세 오경이 이것만 말하지는 않습니다. 레위기에는 정반대되는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18:5)

모세 오경은 이처럼 율법에 대해 두 가지로 말합니다. 율법은 인간을 저주 아래 있게도 하고, 의와 생명을 얻게도 한다고 말합니다. 바울도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 사실을 다 말했습니다.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다고도 말했고(v.10),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산다고도 말했습니다(v.12). 그러나 율법은 사실상 저주의 체제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율법을 행하는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와 생명을 얻는 것이 사실이지만 현실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온전히 행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모세도 온전히 행하지 못했고, 여호수아도 온전히 행하지 못했고, 사무엘도 온전히 행하지 못했고, 다윗도 온전히 행하지 못했고, 여러 선지자들도 온전히 행하지 못했고, 다니엘도 온전히 행하지 못했고, 베드로와 바울도 온전히 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율법은 사실상 저주의 체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꿰뚫어봤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고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둘째, 바울은 율법과 언약의 관계에 대해서도 설명합니다. 바울은 율법과 언약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하신 것은 모세를 통해 율법을 준 것보다 430년 앞서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킵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을 환기시킨 다음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율법과 언약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430년 후에 생긴 율법이 430년 앞서 생긴 언약을 폐기할 수 없다. 430년 후에 생긴 율법이 430년 앞서 생긴 언약을 헛되게 할 수 없다(v.17). 사람이 한 약속이라도 한 번 정한 후에는 폐기하거나 더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하신 언약을 어떻게 폐기하거나 헛되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v.15)]

바울의 설명을 수학적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언약 안에 율법이 있다] 그렇습니다. 언약이 율법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율법이 언약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언약과 율법의 본래 관계입니다.

 

바울의 설명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율법은 의와 생명을 사는 길을 가리키는 표지이기도 하지만 부패한 인간의 현실, 율법을 온전히 행하지 못하는 인간의 현실에서는 저주의 체제로 주어진 것입니다. 둘째, 율법은 언약보다 430년이나 늦게 주어졌는데 이것은 율법이 언약 안에 있다는 뜻이고, 율법으로는 언약에 참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줄이면 ‘율법은 저주의 체제이고, 언약에 속한 언약의 일부분’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런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셨을까요?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왜 언약에 참여할 힘이 없는 율법을 주셨을까요? 죄 짓는 걸 막기 위해서였을까요? 다른 나라보다 건강하고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였을까요?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의 범죄 때문에 더하여진 것이라고 말합니다(v.19). 율법을 범하는 것 때문에 율법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참 이상야릇한 말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율법이 더하여진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v.20) 참 어처구니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율법은 죄 짓지 않게 하려고 주어진 게 아니라 죄 짓게 하려고, 죄를 죄 되게 하려고 주어졌습니다. 죄를 비추는 거울로 주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키고 상기시키는 표지판으로 주어졌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법이 죄를 짓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처럼, 법이 깨끗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도 교회 정관(법)을 잘 만들어놓으면 교회가 반듯하게 설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법이 정말 죄를 막을 수 있나요? 법으로 깨끗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나요? 전혀 불가능합니다. 법(율법)이라고 하는 것에는 애당초 죄를 막을 힘이 없습니다. 죄를 치유할 힘은 더더욱 없습니다. 율법은 결코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오로지 부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죄를 짓게 하고, 죄를 알게 하고, 죄를 고소하고 정죄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은 주신 것도 바로 그 역할이 필요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이 할례를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죄인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을 범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걸 깨우쳐 알게 하려고, 즉 저들이 죄인이라는 것,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을 깨우쳐 알게 하려고 율법을 준 것입니다. 자기들이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할 자가 예수라는 것을 알고 믿을 테니까(v.13), 예수를 믿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아브라함에게 한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서 준 것이 아닙니다. 언약의 씨가 올 때까지 잠정적으로 필요해서 준 것이고(v.19), 궁극적으로는 예수를 믿게 하려고 준 것입니다(v.22). 예수 믿는 자들에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주기 위해서 준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을 준 궁극적 이유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왔습니다. 예수가 와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자들을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율법의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v.13).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자들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을 당신의 자녀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약속을 따라 정해진 상속자들로 받아들였습니다(v.29).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상관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자녀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셨습니다. 즉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성취하신 겁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네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을 것이라고 했던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신 겁니다.

 

이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 어떻게 성취됐냐? 율법으로 성취되지 않고 약속의 씨인 예수를 통해 성취됐다.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냐?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이것이 바울의 복음이에요. 아니, 예수의 복음이고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유대주의자들은 이 진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언약과 율법의 관계, 언약의 씨와 예수의 관계, 율법을 준 궁극적인 목적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하는데 알지 못해서 할례와 율법의 체제에 갇혀 있었던 겁니다. 알지 못해서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된다,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편입될 수 있다고 엉뚱한 주장을 한 겁니다. 알지 못해서 430년 후에 생긴 율법으로 430년 앞선 언약을 짓밟는 오류를 범한 겁니다. 알지 못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헛되이 만드는 오류, 예수의 복음을 왜곡시키고 이방인 성도들을 혼돈에 빠뜨리는 오류를 범한 겁니다.

 

사실 이 일만 그러는 건 아닙니다. 일상의 모든 오류는 ‘알지 못함’에서 비롯됩니다. 한국교회가 과거 어느 시대의 교회보다 더 부패하고, 더 천박하고, 더 어둡고, 더 비루하고, 더 교활하고, 더 그악스럽고, 더 편협한 교회로 추락한 것도 알지 못해서이고, 한국교회 목사와 성도들의 신앙이 종교생활로 추락한 것도 알지 못해서입니다. 예수에게 무지하고, 성경에 무지하고, 신학에 무지하고, 자기에게 무지하고, 세상에 무지하기에 참된 구원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종교에 갇혀 있는 것이고, 천민자본주의와 이기적 개인주의에 함몰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알지 못하면 해방되지 못합니다. 1세기 유대주의들이 예수를 믿었어도 언약과 율법의 관계, 언약의 씨와 예수의 관계, 율법의 주신 궁극적인 목적을 알지 못해서 할례와 율법에서 해방되지 못한 것처럼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알지 못하면 예수를 믿어도 종교와 인간의 욕망에서 해방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종교와 인간의 욕망에서 해방되지 못하면 한 발짝도 구원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열심히 기도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구제와 선교도 하는데 구원으로 나아가지는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최고의 선물은 구원인데 그 구원을 살지는 못합니다. 구원은 죽은 후에 받는 것으로 미뤄놓고 교회 활동과 종교 활동에 열심이고 욕망을 채우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한국교회 대부분이 그래요.

 

우리는 이 오류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믿음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먹고 사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묻고 읽고 토론하고 성찰하고 수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해방됩니다. 믿음으로 공부해야, 믿음으로 묻고 읽고 토론하고 성찰하고 수행해야 비로소 자기 욕망으로부터, 이 시대의 우상으로부터, 종교로부터, 자본주의 문화로부터 해방됩니다. 그리고 해방되는 이것이 곧 구원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구원받은 자는 공부해야 합니다. 아니, 공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해방을 위해 공부하고, 해방을 향해 공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알아야 해방되니까, 또 하나님의 영은 진리의 영이시니까 구원받은 자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공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공부하지 않는 목사는 의심해봐야 합니다. 공부하지 않는 목사, 이런저런 일로 바쁜 목사는 구원을 기뻐하고 구원의 영광에 참여하는 목사라기보다는 종교업자일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깊이 의심해봐야 합니다. 교회 일에는 열심인데 공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도 의심해봐야 합니다. 저 사람이 정말 구원받은 자인지, 정말 예수를 믿는 자인지 의심해봐야 합니다.


이것은 거의 천기누설이라고 할 만한 내용인데 여러분, 진짜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 아십니까? 믿음으로 받은 구원을 살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하는 믿음이 진짜 믿음입니다. 기적을 행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믿음이 진짜 믿음이 아니고 정직하게 공부하는 삶을 살아가는 믿음이 진짜 믿음입니다. 공부를 통해 날마다 하나님의 구원으로 나아가는 믿음이 진짜 믿음입니다. 또 공부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으로 나아가는 구원이 진짜 구원입니다. 정말입니다. 공부하지 않는 믿음, 공부하지 않는 구원은 다 가짜입니다. 공부하는 믿음만이 진짜 믿음이고, 공부하는 구원만이 진짜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 구하십시오. 믿음으로 공부하게 해달라고, 성령에 이끌려 공부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믿음으로 공부하는 것이 예수 안에 있다는 첫 번째 증거이자 마지막 증거입니다. 무릇 진짜 공부는 예수를 믿음으로 시작되고, 구원 받음으로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