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갈라디아서

갈라10-왜 오직 믿음인가 (갈라디아서3:6-9,16)

새벽지기1 2018. 2. 26. 07:18


채사장(필명이라고 생각됨)이라고 하는 이 시대의 탁월한 지식 소매상이 있습니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라는 책으로 유명해진 채사장은 지식뿐 아니라 지혜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공부했습니다. 한 우물을 깊게 파기보다는 다양한 지식의 세계를 폭넓게 유랑했습니다. 그는 대학시절 성경을 읽었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에 빠졌다고 말합니다. ‘정말 믿음으로 충분한가? 믿음만 있으면 모든 죄가 용서받는가? 우리는 그렇게 구원되는가? 내 삶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것인가? 인간은 타자에 의해 구원받아야 할 만큼 초라한 존재요 수동적인 존재인가? 인간 스스로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인가?’하는 의문들과 싸워야 했다고 말합니다. 타자로부터 받는 구원이 너무 초라하게 생각됐다고 말합니다.

상당히 일리 있는 의문입니다. 사실 채사장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예수 덕분에 구원받는 것을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인간을 너무나 초라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니체도 기독교를 ‘주인의 도덕’이 아니라 ‘노예의 도덕’이라며 비판했습니다. 버트런트 러셀도 ‘종교는 합리적이지도 않고 유용하지도 않다’고 비판했습니다. 바울의 복음을 들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그렇게도 빨리 율법의 행위로 돌아선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인간은 주체적으로 뭔가를 성취하고 싶어 하는데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지나치게 수동적이니까 성에 차지가 않아서 율법의 행위로 돌아선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 하더라도 그래도 뭔가 내가 하는 게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겁니다.

 

사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에는 인간의 주체성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요소가 있습니다. 조금만 잘못 이해하면 인간의 주체성을 치명적으로 위협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교회는 그동안 하나님의 절대주권 교리와 예정론으로 인간의 주체성을 무참히 짓밟아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은 결코 인간의 주체성을 짓밟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체성을 상실한 인간, 세상의 노예로 살아가는 인간을 진정한 주체자로 회복시킵니다. 그리고 그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은 다른 게 아니에요. 죄의 종노릇하는 인간, 세상을 우상으로 떠받드는 인간, 자기 안에 갇힌 인간을 건강한 주체자, 자기라고 하는 깊은 감옥에서 해방된 주체자, 하나님 앞에 우뚝 선 주체자로 회복시키는 것이 구원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진정한 주체자로 우뚝 섰습니다. 유대교와 율법의 울타리에서도 해방되고, 부와 가난의 굴레에서도 해방되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그 무엇에도 굴복하지 않는 진정한 주체자로 우뚝 섰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경험한 그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은 유대주의자들의 꾐에 빠져 율법의 행위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돌아간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을 설득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소환했습니다. 율법의 조상인 모세를 소환하지 않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소환해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갈3:6). 바울이 이처럼 아브라함을 소환한 것은 사실 아브라함을 통해 예수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왜 구원의 길이 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먼저 아브라함 이야기를 조금 들여다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시며 말씀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겠다. 너로 말미암아 세계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을 것이다.”(창12:2) 이 말씀은 아브람의 직계 후손을 크게 높이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브람의 직계 후손들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강대한 나라를 이루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브람과 아브람의 후손을 통해 온 세상 만민을 구원하시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람을 통해 세상 만민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겠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겠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놀라운 계획을 갖고 아브람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에게는 정작 큰 민족을 이룰 만한 자식이 없었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기는커녕 자기 혈통조차도 끊어질 판국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큰 민족을 이룰 가능성이 전혀 없는 아브람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그런 형편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따라나섰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아브람이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렀을 때 그 땅(가나안 땅)을 그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말씀했습니다(창12:7). 그러나 아브람에게는 그 땅을 이어받을 상속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창한데 아브람의 상황은 형편없이 초라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는 너무나 큰 간격이 있었습니다.

아브람은 이 커다란 간격이 신경 쓰였습니다. 이 땅을 물려받을 상속자가 없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염려가 됐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될 것이고, 그이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을 것’이라고 다시 한 번 확약해주었습니다(창15:4-5).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아브람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창15:5-6). 여기서 ‘의로 여겼다’는 것은 아브람을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나라의 권속으로 받아주셨다는 뜻입니다. 아브람은 믿음으로 하나님나라의 권속이 됐습니다.

 

그러나 아브람과 사라 사이에는 여전히 아이가 없었습니다. 무엇 하나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사라는 늙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자식을 얻을 가능성이라고는 완전 제로 상태가 됐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사라는 아브람에게 자기 여종인 하갈을 통해서라도 아이를 얻어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아브람은 사라의 제안을 따라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17:6-8)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놀라운 언약을 하신 후 놀랍게도 경수가 끊어져 임신을 할 수 없는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창17:16)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17:19)는 말씀까지 했습니다.

 

지금까지 대강 훑어본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언약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 또 앞으로 태어날 이삭과 그의 후손들과 세우겠다고 하신 언약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이 언약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어떻게 지키는지를 유심히 살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을 제대로 읽는 방법입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누구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의 후손이 누구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아브라함의 후손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입니다. 물론 육체적으로만 보면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묘하게도 이스마엘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항상 이삭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님은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과는 어떤 언약도 하지 않았어요. 오직 사라에게서 낳은 이삭에게만 언약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삭이 어떻게 태어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삭이 어떻게 태어났습니까? 아브라함과 사라가 그들의 능력으로 이삭을 낳았습니까? 아닙니다. 이삭은 도무지 낳을 수 없는 중에 낳은 아들입니다. 사라가 이미 늙고 경수가 끊어져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었기 때문에 이삭은 엄격하게 말해서 아브라함의 씨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정자와 사라의 난자가 합해져 탄생한 아이가 아니라고요.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이 낳은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으로 얻은 아들, 즉 언약의 아들이에요. 아브라함의 후손은 처음부터 육체적인 혈통을 따라 낳은 자가 아니었어요. 아브라함의 후손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얻은 자였습니다. 육체의 씨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씨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아브라함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꿰뚫어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진짜 후손이 누구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말했습니다. 16절입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자, 이 말은 매우 심오한 말입니다. 성경의 중심을 꿰뚫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한 ‘이 약속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하신 약속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이 별처럼 많을 것이라는 약속,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인해 복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창12:2-3),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신다는 약속(창13:15,17:8)들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 약속들을 환기시킨 후에 곧바로 자손 문제를 꺼냅니다. 이 약속은 사실 한 사람의 자손을 향한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여러 자손을 향해 약속한 게 아니라 한 사람의 자손, 즉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약속이라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여러 후손들을 염두에 두고 약속한 게 아니라 오직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염두에 두고 약속한 것이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성취한 후손은 여러 사람이 아니고 오직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삭은 뭘까요?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예표이자 표상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이삭은 아브라함의 육체의 씨가 아니었습니다. 사라가 낳기는 했지만 이삭은 아브라함의 육체의 씨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씨였습니다. 언약의 씨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육체의 씨는 이스마엘인데, 하나님은 육체의 씨인 이스마엘과는 어떤 언약도 맺지 않았어요. 오직 약속의 씨인 이삭과만 언약을 맺었습니다. 오직 이삭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약속)을 이루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이삭을 통해 그 언약이 성취됐나요? 아닙니다. 그 언약을 성취한 자는 이삭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땅의 족속들이 복을 받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땅의 족속들이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영원한 기업을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최종적으로 성취한 자는 이삭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그 약속을 성취할 자로 이삭을 마음에 두신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셨습니다.


그러면 이삭은 왜 등장했을까요?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상이 되기 위해 등장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성취할 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표상하기 위해 등장했어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자식이 없는 아브람을 부르셨는지 아십니까? 이삭을 주실 때에도 왜 사라가 나이 들어 경수가 끊어질 때까지 기다렸는지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할 자는 예수 그리스도인데,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의 씨로 오시는 분이 아니라 약속의 씨로 오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걸 예표하고 표상하기 위해서 자식이 없는 아브람을 부르신 것이고, 아들을 주실 때에도 사라가 나이 들어 경수가 끊어질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렸던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 이야기가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은 아브라함의 육체적인 후손을 통해 성취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은 언약의 씨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다.’ 바로 이것이 아브라함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구약성경 전체가 증언하는 것도 사실은 그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십시오. 구약성경은 처음부터 끝가지 유대인들의 역사가 완전히 실패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성전이 무너지고 유대인들이 바빌론의 포로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줄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성취되지 못했다는 거예요. 이 한 마디가 구약성경의 전체 메시지입니다.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저들의 실패는 사실상 처음부터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 속에서 출발한 역사였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은 애당초 유대인들을 통해 성취될 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될 복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의지와 정성과 노력으로 성취할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만이 성취할 수 있는 매우 특별한 복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복이고, 하나님만이 이룰 수 있는 복이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이룰 수 있는 복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의 본질이고 독특함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체로 이 복의 본질과 독특함을 모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모르고 목사들도 대부분 모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실패를 유대인들의 마음이 강퍅해서 그런 거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해서 그런 것이고, 믿음이 없어서 그런 거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전적으로 틀렸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강퍅해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해서, 믿음이 없어서 실패한 것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피상적인 사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근원 진실은 그게 아니에요. 이스라엘의 역사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는 것이 근원 진실입니다. 예, 이스라엘의 역사는 성공할 수 없고 성공해서도 안 됩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는 매우 독특한 복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역사는 실패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것도 사실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자세한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율법의 역할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얻게 하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죄 아래 가두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은 정말 이상야릇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데, 이스라엘의 역사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실패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실패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이스라엘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하나님의 뜻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근원 진실을 드러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운명이었어요.

 

그런 면에서 이스라엘의 실패는 하나님의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행하셨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부활하게 함으로써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성취하셨습니다. 온 땅의 민족들을 불러내시어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성취하신 복에 참여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 이루셨으니까, 하나님이 역사의 현장에 들어오셔서 구원의 큰일을 행하셨으니까 우리는 그저 참여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 이루셨다는 사실을 신뢰하고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성경이 믿음을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다 이루셨어도 믿지 않으면 참여하지 않을 테니까, 믿지 않으면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 제발 좀 믿으라고 애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 죽었지 않느냐, 내가 너희의 저주를 다 받았지 않느냐, 그러니 제발 내 진심을 받아달라며 애원하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온 세상의 구원은 이미 성취됐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통해 구원의 큰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 것도 한 것 없이 그냥 믿음으로 하나님이 성취한 구원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너무 쉽습니다. 너무 단순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 때문에 넘어집니다. 구원이 너무 쉽다는 겁니다. 구원이 어린애 장난 같다는 겁니다. 무임승차하는 것 같다는 겁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에 무임승차하는 것은 비굴하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인간의 주체성과 능동성을 짓밟는 일이라는 겁니다. 채사장도 그렇게 생각했고, 니체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정말 자존심 상하는 일일까요? 인간의 주체성과 능동성을 짓밟는 일일까요? 너무 쉬운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지금 엄청나게 다채로운 세상, 놀랍도록 신비로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내가 만들었습니까? 내가 만든 지구에서 내가 만든 태양의 빛을 받으며, 내가 만든 물을 마시며 살고 있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에 몸담고 살아갑니다. 내가 만들지 않은 물 덕분에 살아가고, 내가 만들지 않은 나무 덕분에 살아가고, 내가 만들지 않은 꽃과 벌 덕분에 살아가고, 내가 만들지 않은 수많은 식물과 동물 덕분에 살아갑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사실조차 인식하지 않은 채 삽니다. 마치 처음부터 자기 것이었던 것처럼 뻔뻔하게 삽니다. 이런 사실을 가슴 깊이 인식하고 사는 사람은 소수예요. 그런데 그 소수의 사람들이 자존심 상해합디까? 하나님께 빌붙어 살고, 나무와 물에게 빌붙어 산다고 부끄러워합디까? 자기의 주체성이 위협받는다고 생각합디까? 너무 수동적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합디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순간 감동하고 감탄하며 삽니다. 기쁘게 능동적으로 삽니다. 주체적으로 자기 역량을 발휘하며 삽니다. 창조적으로 삽니다. 자유를 구가하며 삽니다.


우리의 삶이 이래요. 우리 모두는 우리가 창조한 것 하나 없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하물며 구원은 어떻겠습니까? 구원은 창조보다 더 위대하고 더 값지고 더 놀라운 일인데 하나님께서 구원을 다 이루어놓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이루어놓은 구원을 그냥 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자존심 상하는 일일까요? 그것이 인간을 초라하게 만드는 일일까요? 그것이 인간의 주체성과 능동성을 짓밟는 일일까요? 언어도단입니다. 만일 그것 때문에 자존심 상해한다면 그것은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몰라서 그러는 겁니다. 나는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에 몸담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고, 하나님이 이루어놓은 구원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여러분, 인간이 어떤 존재입니까? 인간이 태양을 만들 수 있습니까? 인간이 흙을 만들 수 있습니까? 인간이 곡식을 만들 수 있습니까? 인간은 자기가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당연히 자기를 구원하는 것도 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양,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양 착각하는데 어불성설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살 수 있고, 하나님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이것 때문에 자존심 상해하지 마세요. 예수님 덕분에 구원받는 것에 자존심 상해하지 마세요. 이것은 감사하고 기뻐하고 영광스러워할 일이지 자존심 상해할 일이 아닙니다. 이것 때문에 자존심 상해하는 것은 정말 자기 분수를 몰라서 그러는 겁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지 못해서 그러는 겁니다. 여러분, 제발 부탁합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겠다고 개폼 잡지 마세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겠다고 헛힘 쓰지 마세요.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신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듯이 하나님께서 성취한 구원을 맘껏 기쁘고 감사하게 향유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온 세상 만물도 하나님의 선물이고, 개개인의 생명도 하나님의 선물이고, 구원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선물을 그냥 받으십시오. 그것이 믿음입니다.

 

성경이 왜 그리도 믿음을 강조하는지, 왜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지가 좀 이해되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