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갈라디아서

갈라9- 믿음, 처음부터 기획된 생명의 길 (갈라디아서3:5-9)

새벽지기1 2018. 2. 5. 07:23


1-2장에서 자기가 전한 복음이 하나님께 받은 복음이라는 사실을 강변한 바울은 3장부터 갈라디아교회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룹니다.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의 문제를 피상적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문제의 근원을 파고들며 깊이 있게 다룹니다. 바울은 문제의 근원에 접근하기 위해서 질문 공세를 퍼부었습니다. 사람은 질문을 받아야 자극을 받고, 질문을 받아야 돌아보기 때문에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에 질문 공세를 퍼부었습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v.2)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하나님이 하신 일-구원)이 율법의 행위로서냐 듣고 믿음에서냐?”(v.5)

이 질문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예수의 복음에 참여하게 된 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서 묻는 질문입니다.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예수의 복음에 참여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성령을 주셨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 된 것이냐 듣고 믿음으로 된 것이냐, 라고 물은 것입니다.

 

바울은 위 두 질문 사이에 놀라운 질문 하나를 끼워 넣었습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v.3)

이 질문은 갈라디아교회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꿰뚫고 하는 질문입니다.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율법의 행위를 좇는 것은 ‘성령으로 시작한 일을 육체로 마치는 것’이라는 사실을 꿰뚫고서 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질문은 형식만 질문이지 내용은 질문이 아닙니다. 내용은 꾸짖음입니다. ‘너희는 지금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려 하고 있다’고 매섭게 꾸짖은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쳐가는 이것이 바로 복음의 세속화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세속의 범주에 가두고 육체적 욕망과 연결시키는 것이 바로 복음의 세속화입니다. 갈라디아교회의 경우 복음의 세속화는 급속하게 일어났습니다. 바울이 예수의 복음을 전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곧바로 세속화가 일어났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복음의 세속화는 갈라디아교회에서만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교회 역사를 훑어보면 모든 교회, 모든 그리스도인이 같은 일을 반복했습니다. 예수의 복음은 항상 성령으로 말미암아 시작되는데, 성령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예수의 복음은 거의 언제나 세상 속에 갇히고 세속적인 관심사와 연루되고 조작되곤 했습니다.

바울은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너무도 급속하게 복음이 세속화되는 것을 보면서 바울의 심정은 까맣게 타들어갔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갈라디아교회의 실상을 제대로 꿰뚫어보지 못하니까,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쳐가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니까 대부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눈에는 모든 것이 보이니까, 갈라디아교회가 허물어져가고 있는 것이 보이니까 한없이 안타까웠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시작한 것을 육체로 마치면 안 된다고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설득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소환합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조상인 아브라함, 온 이스라엘 백성이 존중하는 아브라함을 소환해서,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었다(v.6). 그러기 때문에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다(v.7). 로마서에서는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합니다. 육체의 할례를 받은 자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고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 곧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이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다(롬2:28-29).

 

그런데 바울은 아브라함을 소환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이야기만 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심히 놀라운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음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v.8)

우리말 성경 개역개정판은 말이 좀 어렵게 번역됐는데 알아듣기 쉽게 풀면 이렇습니다. 아주 오래 전 모세오경에 아브라함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온 땅의 민족들을 믿음으로 의롭게 하신다는 복된 소식을 미리 내다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지금 전하고 있는 복음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미 전했다는 것입니다. 즉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주인이든 종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에게 전했다는 거예요.

결국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복음은 예수님이 창안한 것도 아니고, 바울이 창안한 것도 아니고, 심지어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창안한 것도 아니라는 게 바울의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창안했다는 말일까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이 복음은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창안됐다는 게 바울의 주장입니다.

바울의 말을 들어봅시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3-5)

이 말씀은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세상을 창조하기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방식으로 우리를 불러 신령한 복을 주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은 정말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이 사실이라고 말합니다.

 

최초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에덴동산 이야기도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살고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동산에 있는 각종 나무의 열매를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2:16-17). 여러분,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 말씀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메시지도 아니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게 위협하는 메시지도 아닙니다. 이 말씀의 진짜 메시지는 하나님 말씀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믿으면 먹지 않을 것이고 믿지 않으면 먹을 것이기 때문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말씀은 결국 행위의 문제를 말한 게 아니라 믿음의 문제를 말한 것입니다.

물론 교회는 지금까지 에덴동산 이야기를 행위의 문제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에덴동산 이야기를 ‘행위언약’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가 이 언약의 핵심이고, 아담이 불순종해서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행위를 강조했습니다. 불순종이라는 행위에 초점을 맞춰 에덴동산 이야기를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에덴동산 이야기는 사실 행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행위와 무관하지는 않지만 행위언약이라고 보는 것은 충분한 이해가 못됩니다. 행위에 초점을 맞춰 해석하는 것은 사실 피상적인 해석입니다. 부족한 해석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단순한 행위를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겉으로 보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했으니까 행위의 문제를 말한 것처럼 들리지만, 이 말씀은 단지 행위의 문제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순종하라는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물론 에덴동산 이야기 속에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에덴동산 이야기의 진짜 메시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살고 믿지 않으면 죽는다.’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가 중심 이슈가 아니고,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믿느냐 믿지 않으냐에 따라 인간의 운명과 세상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것이 진짜 메시지입니다.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다른 말씀 하지 않으셨어요. “나를 믿으라. 나를 믿으라. 나를 믿으라. 나를 믿지 않으면 너희는 반드시 죽는다.”는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않으냐에 따라 인간과 세상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세상의 근원 진실입니다.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않으냐에 따라 인간의 운명과 세상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것이 우주 전체를 통틀어, 또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진실이고 가장 근원적인 진실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이 어떤 세상입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한 이 세상은 모든 것이 관계의 그물망으로 연결되어 있는 세상입니다. 자기 홀로 존재하는 세상이 아니라 너 없이는 내가 존재할 수 없는 세상, 오직 너를 통해서만 내가 존재할 수 있는 세상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땅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태양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바람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물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부모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회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물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땅, 태양, 바람, 물, 부모, 토끼, 나비, 벌, 나무, 들풀 등등 만물이 있어야만 비로소 내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관계입니다. 네가 있어야만 내가 있고, 내가 있어야만 네가 있는 것이 바로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 관계는 무조건 작동하지 않습니다. 자동적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모든 관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려면 반드시 신뢰(믿음)가 있어야 합니다. 기계가 원활하게 작동하려면 윤활유가 있어야 하듯이 모든 관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려면 반드시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신뢰가 깨지거나 무너지면 곧바로 관계가 일그러지고 찌그러지고 뒤틀어집니다. 그리고 관계가 일그러지고 찌그러지고 뒤틀어지면 삶 또한 일그러지고 찌그러지고 뒤틀어지고 파괴됩니다.


결국 에덴동산의 선악과 이야기는 ‘창조주인 나를 신뢰하라. 나를 신뢰하라. 너희가 나를 신뢰하지 않으면 모든 관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관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는 이 상태를 가리켜 성경은 ‘죽음’이라고 표현합니다. 반대로 관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상태는 ‘생명’이라고 표현합니다. 예, 성경이 말하는 생명과 죽음은 항상 이런 뜻입니다. 내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 생명이 아니고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과 더불어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며 사는 것이 생명입니다. 호흡이 멈추는 것이 죽음이 아니고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과 불화하면서 사는 것, 삐뚤어진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에덴동산 이야기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정상적인 관계 속에서 살지 못한다, 허물어지고 삐뚤어지고 뒤틀린 관계 속에서 죽음살이를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신뢰(믿음)가 없으면 모든 관계가 삶을 공격하고 파괴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도 확인됩니다. 어느 정도 인생살이를 경험해본 분들은 사람들이 뭣 때문에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는지를 알 것입니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다들 ‘인간관계 때문에 힘들고 고통스럽다. 일이 힘든 게 아니라 인간관계가 힘들어서 죽을 맛’이라고 통탄합니다. 사실입니다. 신뢰가 없기 때문에 인간관계가 무너지고 찌그러지고 삐뚤어진 것이고, 인간관계가 무너지고 찌그러지고 삐뚤어졌기 때문에 사는 게 죽을 맛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떠실까요? 하나님은 모든 관계가 무너지고 찌그러지고 삐뚤어진 것과 상관없이 홀로 고고하게 평화로이 사실까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상상을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관계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아버지 ‧ 아들 ‧ 성령으로만 존재하시는 뿌리부터 관계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어느 누구보다도, 어떤 피조물보다도 더 깊이 아파하시고 슬퍼하십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당신과만 관계적으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도 아름다운 관계를 갖고 싶어 하시고, 온 세상과도 아름다운 관계를 갖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아담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소망했던 관계가 완전히 무너지고 찌그러지고 삐뚤어졌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 자연과 자연의 관계까지 다 무너지고 찌그러지고 삐뚤어졌습니다. 바로 이것이 대재앙입니다. 가뭄이나 홍수나 경제공황이 대재앙이 아니고 관계가 무너지고 찌그러지고 삐뚤어진 것이 삶의 대재앙이고 생명의 대재앙입니다.

 

하나님은 이 끔찍한 재앙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무너지고 찌그러지고 삐뚤어진 관계를 복원시켜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을 불렀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2-3)고 말씀하시며 아브람을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갔습니다. 또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고, 아브람의 유업에 참여할 상속자가 하늘의 별처럼 많을 것’이라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말씀까지도 믿었습니다(창15:4-6). 그러자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아브람을 의로 여겼습니다(창15:6). 여기서 ‘의로 여겼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복원’됐다는 말입니다. 아브람과 연결된 모든 관계가 정상적으로 복원되어 죽음살이에서 해방되고 생명살이를 하게 됐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대표자이자 표상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방식으로 의롭다 하셨고, 또 믿음의 방식으로 세계 열방을 의의 자리로 이끌겠다고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 하늘의 별처럼 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유업을 상속받게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후손만 받는 복이 아니었습니다. 세상 만민이 받을 보편적인 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을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부활시킴으로써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이 받은 복, 즉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는 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됐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힘주어 강조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육체의 할례를 받은 자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고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라고 힘주어 강조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아브라함을 소환해 그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내가 전한 복음이 옳은 복음이요 참 복음이라고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을 설득했습니다.

 

이제 정리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꼭 이 말을 하고 싶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이 기독교의 공식이요 성경의 공식인데, 이 공식은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이상야릇한 공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실 때부터 기획된 하나님의 세계경영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믿음의 방식으로 관계 맺기를 기뻐하셨고, 온 세상을 믿음의 방식으로 통치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아니, 믿어야만 모든 관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의 작은 지혜를 믿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아브라함처럼, 모세처럼, 다윗처럼, 바울처럼, 베드로처럼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살고 믿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세계경영 방식입니다. 믿음은 이성을 거부하거나 부정하는 무지의 길이나 어리석음의 길이 아닙니다. 믿음은 정상적인 관계의 축복을 누리는 생명의 길입니다. 맨 처음부터 기획된 우주적인 생명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