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갈라디아서

성령에서 육체로 (갈라디아서3:1-5)

새벽지기1 2018. 1. 30. 11:23


바울은 갈라디아서 1-2장에서 갈라디아 교회에 전한 복음이 어떤 복음인지를 강력하게 변증했습니다. 자기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 전수받은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복음이고,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과 같은 복음이라고 강변했습니다. 물론 바울은 예수라는 분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했다는 사실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예수로 말미암아 자기 안에 일어난 변화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예수와 함께 나는 죽었다고 말했고,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고 말했습니다. 예수가 내 안에 살고 내가 예수 안에 산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복음은 단지 정보가 아닙니다. 단지 이론이 아닙니다. 단지 지혜가 아닙니다. 예수의 복음은 듣는 자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롬1:16). 그것도 변죽만 울리는 시시껄렁한 변화가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놀라운 능력입니다. 예수의 복음은 존재 전체, 삶 전체를 변화시킵니다. 첫째로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는 변화를 일으키고, 둘째로 죽인 자들을 살리는 변화를 일으킵니다. 정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죽이고 사람을 살리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야기가 온 세상의 복음일 수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사람을 죽이지 못하고 살리지 못하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사람을 죽일 수 있어야 복음이고, 사람을 살릴 수 있어야 복음입니다.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이 복음을 경험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살아나는 신비한 경험을 했습니다. 율법을 좇는 옛 사람이 죽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자기가 자기의 주인인 주체는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주체로 살아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것이 구원이고,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나 홀로 주체’는 죽고 ‘예수와 함께 하는 주체’로 사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에 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생생하게 경험한 복음,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게 된 복음을 전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 또한 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경험한 것과 같이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나는 중생의 체험을 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복음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놀라운 복음의 능력을 경험한 성도들이 어느 순간 거짓 가르침에 빠졌습니다. 너무도 빨리 바울이 전한 복음에서 돌아섰습니다. 바울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을 향해 탄식했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홀리더냐)?”(3:1) 3절에서도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고 묻듯 따졌습니다. 예, 정말 어리석습니다. 저들은 빛을 보았습니다. 저들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율법의 체제를 넘어서는 자유의 은총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죽음살이를 하던 것에서 생명살이를 하는 것으로 거대한 삶의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도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버리고 거짓 가르침에 홀렸습니다. 그것도 너무나 빨리.

 

그런데 교회 역사를 보면 갈라디아교회만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한 게 아닙니다. 거의 모든 교회가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중세 가톨릭교회를 보십시오. 중세 가톨릭교회가 어떻게 했습니까? 거짓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홀렸습니다. 성경이 말하지 않은 것을 말했습니다. 그래서 루터와 칼빈이 거짓 가르침을 폭로하고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혜라는 기치를 내세워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런데 500년이 지난 지금 루터와 칼뱅의 후예들은 중세 가톨릭교회가 한 짓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거짓 가르침으로 성도들을 홀리고 있고, 성경이 말하지 않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당시에는 할례와 율법의 행위를 강요함으로써 성도들을 홀렸고, 중세 가톨릭교회는 면죄부를 판매함으로써 성도들을 홀렸다면, 지금의 개신교회는 오직 믿음 ‧ 오직 성경 ‧ 오직 은혜라는 지극히 성경적인 기치로 성도들을 홀리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이라는 기치로 행위를 폐기처분해버렸고, 오직 성경이라는 기치로 이성과 교양을 밀어내버렸고, 오직 은혜라는 기치로 인간의 주체성을 짓밟아버렸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개독교로 추락한 것도 다 그 때문입니다. 행위 없는 값싼 믿음을 양산한 때문이고, 성경에 갇혀서 편견과 오만과 무지가 가득하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은혜로써 인간의 주체성을 짓밟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겉으로만 보면 한국교회가 전하는 복음이나 바울이 전한 복음이나 같은 복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말인즉슨 바울과 똑같이 믿음을 말하고 은혜를 말하니까 바울의 복음과 같은 복음을 전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깊이 들여다보면 바울이 전한 복음과 정반대되는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전한 복음이 어떤 복음이었습니까? 바울이 전한 복음은 ‘사람을 죽임으로써 살리는 복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가 전하는 복음은 ‘사람을 살림으로써 죽이는 복음’입니다.

제가 방금 ‘사람을 살림으로써 죽이는 복음’이라고 했는데, 아마 무슨 말인지가 잘 다가오지 않을 겁니다. 바울의 복음과 대비시키느라고 제가 만든 조어이기 때문에 낯설기도 하고 헷갈리기도 할 겁니다. 그러나 제가 근거 없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교회가 전하는 복음이 어떤 복음인지를 생각하며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한국교회가 전하는 복음이 어떤 복음입니까? 한국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를 들어보면 사람들을 위로하는 설교, 하나님이 복 주신다는 설교가 대부분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으면 예수님이 우리를 치유하시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복에 복을 더한다고 말합니다. 이 땅에서는 무병장수하는 복, 만사가 형통하는 복, 자식이 잘 되는 복을 받고, 죽은 후에는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복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을 뿐만 아니라 온갖 복이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백일기도를 정성껏 올리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고 말합니다.


자, 이것이 어떤 것들입니까? 어디에 속한 것들입니까? 하나님나라에 속한 것들입니까? 아닙니다. 하나같이 세상에 속한 것들이고 인간의 욕망에 속한 것들입니다. 물론 사람을 죽을 형편에서 건져내고, 질병과 가난에서 건져내고, 절망에 빠진 사람을 위로하고, 상처를 극복하게 도와주는 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마땅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궁극적인 구원은 아닙니다. 구원의 부스러기일 수는 있지만 구원의 핵심이나 본질은 아닙니다. 무병장수하는 것, 만사형통하는 것, 크게 성공하는 것들은 사실 하나님나라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것들을 위해서 죽지 않았어요.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려고 죽지 않았어요. 세상에 속한 우리를 죽임으로써 하나님나라에 속한 삶을 살게 하려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하나님나라와 아무 관계없는 것들을 하나님의 복이요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강변해왔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을 생각해보면 보다 정확히 이해됩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장로입니다. 그는 CEO로서도 성공했고, 서울 시장으로서도 성공했고, 대통령에도 당선되는 실로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모르긴 몰라도 소망교회 담임목사님과 성도들은 함께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대통령으로 세웠다고 믿고 환호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정말 믿음의 사람이었을까요? 그가 진정 하나님나라에 속한 삶을 살았을까요? 하나님이 과연 그를 대통령으로 세웠을까요? 지금 드러나는 일들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의 인생은 한 마디로 거짓투성이였습니다. 거짓으로 대통령에 당선됐고,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도 자기 이권을 챙기는 일에 대통령의 권한을 남용했습니다. 국민혈세로 강물을 틀어막았고, 자연을 훼손했습니다. 토목회사 사장님들의 호주머니에 22조2천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부었습니다.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사람들을 감시했습니다. 이명박 씨의 삶은 참으로 불의했고 잔혹했고 교활했고 세속적이었습니다. 돈에 미친 삶이었습니다. 물론 그는 예수의 십자가 복음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 복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삶, 하나님나라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런 이명박 씨를 장로로 세웠습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했습니다. 본인 스스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런 자기를 복주시고 높이셨다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수많은 목회자와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생각했고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이명박 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또 한국교회가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실까요? 하나님께서 정말 그를 사랑하시고 복 주셔서 대통령으로 높이셨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을 겁니다. 하나님은 심히 아파하시며 분노하실 것입니다. ‘너는 지금 예수의 복음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하나님나라와 정반대되는 삶을 살고 있다.’며 탄식하실 것입니다. 사실 이명박 씨는 믿음으로 열심히 죽음살이 했습니다. 예수의 복음으로 예수의 복음과는 아무 관계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명박 장로만 이럴까요? 아닙니다. 한국교회 안에는 이명박 같은 장로, 이명박 같은 집사들이 차고 넘칩니다. 예수의 복음으로 죽음의 길을 가는 목사와 성도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최근에 있었던 명성교회의 이야기 한 토막을 전해드리겠습니다. 10여 년간 명성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고 지금은 외국에서 신학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최건우 전도사님이 잘 아는 명성교회 성도님께 안부를 물었던가봅니다. 교회 상황이 좀 그럴 텐데, 교회 생활하기 어렵지 않으시냐고. 그러자 자기를 비롯해 현재 남아 있는 많은 교인은 세습 문제에 개의치 않는다고 하면서 ‘자기들에게 중요한 것은 명일동 아파트 값이 떨어지지 않는 것뿐’이라고 했답니다. 거기다가 충고하듯 한 마디를 덧붙였답니다. “전도사님이 아직 젊어서 모르시는 것 같은데, 목회는 서비스업이고 교회는 고급문화 공간이에요.”라고 하더랍니다. 여러분, 이것이 한국교회의 민낯입니다. 한국교회의 믿음이라는 게 고작 이 수준이에요.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가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왜 이명박 장로 같은 성도들이 차고 넘치는 것일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한국교회가 잘못된 복음, 거짓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아니라 세상나라의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죽임으로써 살리는 복음’이 아니라 ‘사람을 살림으로써 죽이는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명박 씨는 한국교회가 전하는 복음을 통해 힘을 얻었습니다. 한국교회가 전하는 복음을 힘입어 성공했고, 한국교회가 자랑하는 믿음으로 출세가도를 질주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죽음살이를 열심히 하게 했을 뿐입니다. 제가 한국교회가 전하는 복음을 가리켜 ‘사람을 살림으로써 죽이는 복음’이라고 한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잘 살게는 해줬어요. 세상에서 성공하게는 해줬어요. 그러나 사실은 죽음살이를 획책했을 뿐입니다.

사실이에요. 한국교회가 전하는 복음은 겉으로만 보면 바울이 전한 복음과 같은 복음인 것 같으나 내용적으로 깊이 따져보면 바울의 복음과 전혀 다른 복음입니다. 바울은 ‘사람을 죽임으로써 살리는 복음’을 전한 반면 한국교회는 ‘사람을 살림으로써 죽이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의 복음과 아무 관계없는 것들을 예수의 복음과 관련시켰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아닌 것들을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복이 아닌 것을 하나님의 복이라고 거짓말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자기들 맘대로 하나님을 갖고 논 겁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들 맘대로 하나님을 들었다 놨다 한 겁니다. 목사들은 교회성장을 위해서, 성도들은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렇게 짝짜꿍하며 놀아났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의 현상을 정확하게 꿰뚫어봤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3:3)

정말 핵심을 꿰뚫는 설명입니다. 모든 믿음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시작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4:6)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는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고 말했습니다. 옳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오직 성령으로만 시작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갈라디아교회 성도들 또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믿음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시작한 그들이 지금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몇몇 율법을 지킴으로써 자기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확인하려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2장에서는 ‘율법의 행위를 좇는 것’이라고 했고, 3장에서는 ‘육체를 따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육체로 떨어진 것은 율법의 행위를 좇음으로써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의 한국교회는 어떻게 육체로 떨어질까요? 크게 네 가지만 짚겠습니다.

첫째 예수의 복음을 자본주의적 가치에 맞춤으로써,

둘째 세상에 속한 욕망을 정당화하고 만족시켜줌으로써,

셋째 하나님나라의 삶을 종교적 행위로 대체함으로서,

넷째 교회 성장을 하나님나라 성장과 직결시킴으로써 육체로 떨어졌습니다.

물론 지금 여기서 네 가지를 다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나하나가 다 따로 설교를 해야 할 만큼 중요한 내용들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네 가지를 다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단지 자본주의적 가치와 관련해서만 조금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현대인은 거의 예외 없이 자본주의적 가치에 매몰되어 삽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자본주의적 가치가 지배하는 환경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가치가 뼛속깊이 박혀 있습니다. 지금도 눈만 뜨면 돈이 왕 노릇하는 세상, 모든 것을 돈으로 평가하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현대사회는 개인의 욕망을 끝없이 자극하고 극대화합니다. ‘네가 왕이야. 네 맘대로 해. 욕망해도 괜찮아. 너를 지킬 것은 돈밖에 없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야. 이 세상이 전부야.’라고 끝없이 속삭입니다. 실제로 온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다보니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속삭임에 훅 넘어갑니다. 예수를 믿어도 세상이 쏟아내는 말에 홀리고 세상의 질서를 좇아갑니다. 자본주의적 가치에서 해방되지 못한 채 신앙생활을 합니다. 아니, 믿음으로 자본주의적 가치를 열렬히 추구합니다. 믿음으로 부귀영화를 좇고, 믿음으로 무병장수를 좇고, 믿음으로 돈을 좇고, 믿음으로 욕망을 좇고, 믿음으로 성공을 좇습니다.

물론 교회도 한 목소리를 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니까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구하십시오. 새벽마다 부르짖고 금식기도 백일기도를 하십시오. 큰 꿈을 꾸고 상상을 하십시오.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머리가 되십시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입니까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 불가능은 없습니다.’라고 쉼 없이 설교했습니다.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야망을 부추기고,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의 영광에 불을 붙였습니다. 교회가 자본주의의 성공을 위해 기도했고, 자본주의의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 온갖 교태를 부렸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들을 예수를 믿은 결과라고 자랑하고 간증하고 난리법석을 했습니다.

 

결국 갈라디아교회나 한국교회나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고 있다는 면에서는 똑같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영적인 모양은 있으나 전혀 영적이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육체적입니다. 여기서 ‘육체적’이란 말은 다른 말로 바꾸면 ‘세속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친다’는 바울의 말은, 성령으로 촉발된 믿음의 지평이 세상이라는 범주, 세상이 중시하는 관심사의 범주로 좁아졌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나라의 지평으로 확장돼야 하는데 확장되지를 못하고 세속이라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교회 성도들의 신앙은 대부분 육체로 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확한 데이터를 가지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강단에서 설교하는 목회자들의 95%, 그리스도인의 95% 이상이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한국교회가 육체로 마치고 있다는 증거는 너무나 많습니다. 사랑의 교회가 새로운 교회당을 지으면서 공공도로를 점유하는 불법을 저질러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명성교회를 비롯해서 규모가 크다는 많은 교회들이 담임목사직을 아들에게 세습하는 불법을 행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복음이 아닌 거짓 복음을 강단에서 마구 쏟아내고 있습니다. 하나님나라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비즈니스를 하고, 세상의 윤리와 교양에도 미치지 못하는 야만스런 짓들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명성교회의 한 성도가 말한 것처럼 담임목사가 세습을 하든 안 하든 개의치 않아요. 단지 자기 아파트 값만 떨어지지 않으면 됩니다. 이런 게 다 한국교회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실 기독교 역사를 훑어보면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일을 반복해왔습니다. 성령은 지금도 쉼 없이 일하십니다. 우리의 닫힌 눈을 열어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하고, 우리가 얼마나 잔악한 죄인인지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이 얼마나 큰 구원인지를 알게 하십니다. 또 나를 예수와 함께 죽게 하시고 예수와 함께 살게 하십니다. 지금도 쉬지 않고 세상을 위해 중보하십니다.

그런데 성령이 그렇게 일하심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항상 육체로 떨어지는 경향을 보여 왔습니다. 아니, 거의 언제나 성령에서 육체로 떨어지곤 했습니다. 말씀샘교회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에 집중하지 않으면 우리도 어쩔 수 없어요. 육체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도 육체로 떨어질 수밖에 없고, 여러분도 육체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려야 됩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믿음으로 육체에 속한 것들을 열심히 추구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바울도 말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선언한 바울,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고 고백했던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뭘 말할까요?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선언했던 바울 안에도 육체에 속한 것들을 추구하는 경향성이 시퍼렇게 살아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와 함께 죽은 바울 안에 육체에 속한 것들을 추구하는 경향이 시퍼렇게 살아있었기 날마다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예수님 안에서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이미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그래도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날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의 길을 갈 수 있고, 예수의 복음을 살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의 복음은 ‘우리를 죽임으로써 살리는 복음’입니다. ‘우리를 살림으로써 죽이는 복음’은 부패한 교회의 복음이지 예수의 복음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직 우리를 죽임으로써 살리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의 복음에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살림으로써 죽이는 부패한 교회의 복음에 홀리지 마시고 우리를 죽임으로써 살리는 예수의 복음에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이 복음을 끝까지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복음을 끝까지 붙잡는 자는 세속에 흔들리지 않고 생명의 길을 갑니다. 나 홀로 주체가 아니라 예수와 함께 사는 참 주체로 우뚝 섭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참된 인간, 겸손하지만 강인한 인간, 하나님의 형상을 구비한 인간, 옳고도 아름다운 인간으로 우뚝 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죽임으로써 그런 인간으로 우뚝 세웁니다. 이것이 예수의 복음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목숨 걸고 전한 복음입니다. 그리고 이것만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다른 구원은 하나님의 구원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