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갈라디아서

갈라7-왜 오직 예수인가? (갈라디아서2:16-20)

새벽지기1 2018. 1. 15. 10:20


성경은 성공한 자들의 빛나는 삶을 증언하는 모음집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면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말해주는 성공 안내서가 아닙니다. 성경은 성공한 자들의 찬란한 지혜를 말하지도 않고, 의롭게 산 자들의 아름다운 열전을 전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은 놀랍게도 죄인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철저하게 실패한 자, 힘센 놈들에게 짓밟혀 신음하는 무력한 자, 가진 것 없는 벌거벗은 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빛을 잃어버린 자들의 몰락한 삶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자유를 잃어버린 자들의 삶을 불쌍히 여기시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주목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가장 깊이 이해하고 참여한 바울도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멋지게 성공한 자들의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오직 인간의 삶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사실만을 반복해서 말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말할 때마다 항상 빼놓지 않고 인간의 삶이 철저하게 몰락했다는 사실을 말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두 가지만 꼽아보겠습니다.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갈2:16)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

바울이 예수의 복음을 말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이 말을 했는데, 이 말은 한 마디로 인간의 존재와 삶이 형편없이 무너졌다는 말입니다. 어떤 정화의 가능성도 찾아보기 힘들만큼 철저하게 몰락했다는 말입니다. 예, 이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성경은 세상에 빛이 없다고 말합니다. 선한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인간과 세상이 철저하게 부패하고 몰락했다고 말합니다.

 

물론 사람들은 이와 같은 성경의 증언에 별로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꾸준히 발전해왔으니까, 무지에서 지식으로, 가난에서 부유함으로, 미개에서 문명으로, 지역에서 세계로, 육체노동에서 기계 산업으로, 권위적인 사회에서 민주적인 사회로 꾸준히 발전해왔으니까 성경이 증언하는 말에 별로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때때로 이런 놈의 세상은 망해야 한다고 한탄하기도 하고, 세상 돌아가는 것에 절망하기도 합니다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세상은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인류의 역사가 꾸준히 발전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놀랍게 발전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인간의 삶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인류의 문명이 끝없이 발전해왔지만 세상과 인간의 삶은 아직도 몰락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죽음살이라고 하는 운명의 쳇바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역사가 흘러갈수록 더 심화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세상의 현실을 ‘죽음’이라는 언어로 표상하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의 아담에게 ‘네가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했던 그 죽음이 인간의 삶 전체를 뒤덮고 있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갈2:16),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은 인간의 삶이 죽음살이가 됐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사실을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합니다.

‘사망이 모든 사람 위에서 왕 노릇하였다’(롬5:14,17)

‘모든 사람이 죄와 사망의 법에 갇혀 있다’(롬8:2)

이 말은 이 세상이 공동묘지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말은 모든 사람이 생명을 살지 못하고 죽음을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정상적인 삶이 아니라 심히 부패한 삶, 심히 왜곡된 삶, 심히 몰락한 삶을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입니다. 이 세상은 공동묘지가 아닙니다. 온갖 생명이 살아가는 생명의 동산입니다. 70억이 넘는 사람들이 엄청난 것들을 생산하고 교역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찬란한 문명의 이기를 향유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은 여전히 죽음살이를 면치 못하고, 죽음살이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보십시오.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가진 것이 많을수록, 지식이 많을수록 어떻게 합니까? 안하무인인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갑질만 할 줄 알지 피차 존중하며 살줄은 모르지 않습니까? 아는 것이 많을수록, 문명이 발달할수록 더 심하게 경쟁하며 다투지 않습니까? 국민소득이 높을수록 부자와 가난한 자의 간격이 더 크게 벌어지지 않습니까? 사실이에요. 성공을 거머쥐면 거머쥘수록, 가진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기 삶이 몰락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더 심한 악취가 납니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예요. 모든 사람의 인격과 삶이 철저하게 부패하고 몰락했습니다.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성실하게 모범적으로 죽음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닙니다. 정보가 아닙니다. 이것은 눈앞의 사실이고 진실입니다. 오늘도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사망 권세입니다. 모든 사람이 사망 권세 아래에서 죽음을 향해 질주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살기 위해 서로를 짓밟고 싸우고 죽이고 있습니다. 그 어디에도 정상이 없어요. 세상 구석구석이 다 병들었고, 다 부패했고, 다 왜곡됐고, 다 뒤집혔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 볼 것도 없어요.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기만 해도 압니다. 여러분, 여러분 안에 꿈틀거리는 기운이 어떤 기운인 것 같습니까? 생명의 기운인 것 같습니까, 죽음의 기운인 것 같습니까? 당연히 죽음의 기운이 더 강하게 꿈틀거립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했어요.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마15:11). ‘사람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말씀은 ‘사람 속에서 나오는 것이 생명의 기운이 아니라 죽음의 기운’이라는 말입니다. 사실입니다. 사람 속에는 죽음의 기운이 준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살기 위해 애쓰면 애쓸수록,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면 끌어낼수록 죽음의 기운이 준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지가 강하고 의욕이 왕성한 사람들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을 쉽게 무시하고 짓밟고 죽이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이라는 게 이래요. 썩은 냄새가 진동합니다. 아무리 선한 뜻을 갖고 살려고 발버둥을 쳐대도, 인류의 평화를 위해 이 한 몸 바친다고 기염을 토해도 결국 죽음살이를 피하지 못합니다.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성실하게 모범적으로 죽음살이를 합니다. 어쩔 수 없어요. 이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근원 실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찌하지 못하는 이 운명, 너무도 확실한 이 근원 진실에 눈 감고 삽니다. 날마다 죽음의 기운에 짓눌려 아파하고 신음하면서도 근원 진실에 눈 감은 채 자기 안의 죽음의 기운으로 살아갑니다.

바울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율법은 알았지만 삶의 근원 진실, 인간의 근원 진실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누구보다도 뜨겁게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한다고 사랑했고, 또 율법을 따라 흠 없이 산다고 살았지만 죽음의 권세 아래에서 죽음의 기운에 사로잡혀 살고 있다는 사실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누구보다도 열심히 성실하게 죽음살이를 했습니다. 자기 속에 있는 죽음의 기운에 사로잡혀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알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하나님에 대한 열심으로 사람을 죽이는데 앞장섰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섰습니다. 바울까지도 이랬어요. 하나님을 안다고 자부했던 바울, 율법을 따라 산다고 자부했던 바울까지도 사실은 근원 진실에 눈 감은 채 죽음살이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바울이 어떻게 됐습니까? 어느 날 갑자기 근원 진실에 눈을 떴습니다. 자기 삶이 철저하게 부패하고 몰락했다는 것, 자기 안에 어떤 희망도 없다는 진실에 눈을 떴습니다. 이방인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삶도 다 같이 부패하고 몰락했다는 진실에 눈을 떴습니다.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근원 진실에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탄식했습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요.”(딤전1:15)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외다. 사망의 권세에 갇혀 있는 불쌍한 사람이외다.”(롬7:24)

예, 이것이 눈을 뜬 자의 고백입니다. 진실로 눈뜬 자는 자기 존재가 얼마나 추악한지를 압니다. 자기 삶이 얼마나 누추하고 망가졌는지를 압니다. 사람은 자고로 이 근원 진실에 눈떠야 합니다. 이 근원 진실을 눈뜨기 전까지는 눈뜬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시시콜콜 안다 해도 이 근원 진실에 눈뜨기 전까지는 눈뜬 것이 아닙니다. 진짜를 보지 못하는 맹인,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를 알지 못하는 맹인, 무엇이 생명이고 무엇이 죽음인지를 알지 못하는 맹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세상 사람들은 몽땅 앞을 못 보는 맹인입니다. 맹인이기 때문에 죽음의 권세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고, 맹인이기 때문에 아주 성실하게 모범적으로 죽음살이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물어야겠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눈을 떴을까요? 깊은 산에 들어가서 정신 수련이라도 한 것일까요? 엄청난 사건에 휘말려 나락에 떨어지기라도 한 것일까요? 훌륭한 스승을 찾아가서 대오각성이라도 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뜻하지 않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뿐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며 자기를 부르신 예수님을 만났을 뿐인데 눈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그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았습니다. 그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세상의 깊은 어둠을 보았고, 그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죽음의 실체를 보았고, 그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죄인 중의 괴수인 자기를 보았고, 그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부패하고 몰락한 세상의 실상을 보았습니다.

물론 어두운 진실만 본 것은 아닙니다. 만일 어두운 진실만 봤다면 바울은 결코 우리가 알고 있는 바울이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의 복음을 이방 세계에 전하는 사도의 삶을 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저 철저하게 절망하다가 맥없이 죽었겠지요. 구름처럼 떠돌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겁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몰락한 삶의 어두운 진실만 본 게 아니라 온전하게 회복된 삶의 영광도 보았습니다.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기를 보았습니다. 철저하게 부패하고 왜곡되고 몰락한 자기, 죽음의 기운이 가득했던 자기는 죽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 자기, 생명의 기운으로 충만한 자기를 보았습니다. 또 철저하게 갈라졌던 하늘과 땅이 조화롭게 통합된 것을 보았습니다(엡1:10).

 

이 모든 일은 바울이 기획한 것도, 바울이 꿈꾼 것도, 바울이 의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그저 뜻하지 않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을 뿐입니다. 자기를 부르신 예수님을 만났을 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눈이 열렸고 자기가 새로워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과는 영 다른 사람이 된 것입니다. 자기 안에 이전과는 다른 생명, 즉 하나님의 생명이 꿈틀거리는 것을 본 것입니다.

물론 이 변화를 설명할 길은 없습니다. 어떻게 눈이 열렸고, 어떻게 새로운 피조물이 됐는지를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할 길은 없습니다. 단지 예수를 만났을 뿐이에요. 예수를 만났을 뿐인데 눈에 열렸고, 새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죽음의 기운으로 살던 바울은 죽고 생명의 기운으로 사는 바울로 변화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 변화를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표현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

참 이상한 말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죽지 않고 살아있는데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말합니다. 또 분명히 바울이 살고 있는데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내가 살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말합니다. 자, 이게 무슨 말일까요? 왜 이렇게 헷갈리는 말을 한 것일까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바울 안에 예수님이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바울 안에 예수님이 들어오심으로써 바울이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됐기 때문입니다.

 

잘 아는 대로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 만남은 일회성 만남이 아니었습니다. 잠깐 만나고 굿바이 하는 만남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울 안으로 들어가고, 바울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 공존하는 매우 신비한 만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바울 안에 들어가 바울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만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만남 이전의 바울과 만남 이후의 바울은 같은 바울이 아니었습니다. 겉은 같은 바울이었지만 속은 같은 바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는 사는 이유도 달라졌고, 사는 방식도 달라졌고, 사는 힘도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기 의지의 힘으로 율법을 따라 살려고 애썼고, 자기 감정과 판단을 중시하며 살았고,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 살았는데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자기 의지의 힘이나 자기 감정이나 자기 판단을 따라 살지 않고, 매순간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그리스도를 통해 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기운을 힘입어 살게 됐습니다.

바울은 이 놀라운 일을 어떻게든 말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기가 변화된 일을 사실 그대로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의 본질이자 핵심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라는 분을 인정하고 존경하며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내가 죽는 것이고, 예수님이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여기서 오류가 발생합니다. 그것도 아주 심각한 오류가 발생합니다. 특히 믿음이 좋은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범하는 오류입니다. 믿음이 좋은 그리스도인들은 대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다’는 말을 자기 주체성을 부정하라는 말로 듣습니다. 내 생각과 내 의지와 내 감정을 부정하라는 말로 듣습니다. 자기 주도적으로 살지 않고 예수님을 의지하며 수동적으로 사는 것이라는 말로 듣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좋은 그리스도인 중에 스스로 사고할 줄 모르는 사고 장애를 겪는 자들, 스스로 판단할 줄 모르는 판단 장애를 겪는 자들이 꽤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뜻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압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를 깔아뭉개려고 우리 안에 오셨습니까? 우리를 억압하고 짓밟으려고 우리 안에 오셨습니까? 우리를 종으로 부리려고 우리 안에 오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의 주체로 당당하게 세우려고 오셨습니다. 세상의 종노릇하고 죽음의 종노릇하는 우리를 우주 만물 위에 우뚝 세우려고 오셨습니다. 자기 안에 갇혀 사는 우리를 해방하려고 오셨습니다. 죽음의 기운에 사로잡혀 사는 우리를 생명의 기운으로 살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사탄의 종의 멍에를 벗겨내고 하나님의 자유의 아들이 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워 율법을 지키는 것에서 하나님을 사랑하여 능동적인 순종의 삶을 살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의 말을 자기 주체성을 부정하라는 말로 들으면 안 됩니다. 내 생각과 내 의지와 내 감정을 부정하라는 말로 들어도 안 되고, 자기 주도적으로 살면 안 된다는 말로 들어도 안 됩니다. ‘나는 예수와 함께 죽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말은 사실상 사람의 의지나 능력만으로는 생명살이를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의지나 능력만으로는 하나님의 자유의 아들의 삶도 살 수 없고, 능동적인 순종의 삶도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진정한 생명살이, 진정한 주체살이, 진정한 능동살이, 진정한 순종살이는 사람의 의지나 능력만으로는 할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을 힘입어서만,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참 묘합니다. 내가 죄의 종노릇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히 죄의 종노릇하며 삽니다. 내가 율법에 갇혀있고, 세상에 갇혀 있고, 자아 안에 갇혀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히 율법과 세상과 자아에 갇혀 삽니다. 내가 죽음살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히 죽음살이를 합니다. 그것도 아주 성실하게 확신을 갖고 모범적으로 죽음살이를 합니다.

반대로 내가 죄의 종노릇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죄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능동적인 진리의 삶으로 나아가는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내가 심히 부패하고 몰락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면 그 삶에서 해방되어 아름답고 조화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내가 율법에 갇혀 있고, 세상에 갇혀 있고 자아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면 율법에서 해방되고, 세상에서 해방되고, 자아에서 해방되어 자유의 삶으로 나아가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내가 거짓된 나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면 거짓된 나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나로 살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근원 진실을 알면(보면) 해방(구원)이 일어나고, 근원 진실을 알지 못하면(보지 못하면) 절대로 해방(구원)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결국 근원 진실을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가 관건입니다. 그런데 누가 이 근원 진실을 보게 합니까? 바울이 대오각성해서 봤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해 봤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눈을 떴고, 예수님으로 인해 죄의 종노릇, 죽음의 종노릇에서 해방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율법에서, 세상에서, 자아에서 해방되어 자유의 삶을 사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거짓된 나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나로 성장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받은 이 놀라운 복의 비밀을 다음과 같이 진술했습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그렇습니다. 바울이 진정한 바울이 되어 바울이 살아야 할 삶을 살게 된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입만 열면 예수, 예수 하는 것도 다 그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눈을 떴고, 예수님을 통해서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해방의 복을 누렸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