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갈라디아서

갈라4- 불미스런 안디옥 사건 (갈라디아서2:11-16)

새벽지기1 2017. 12. 18. 07:24


바울은 단독자로서 하나님의 복음을 받았습니다. 집단 속에서 군중과 함께 받지 않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단독자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단독자로 받은 복음은 바울만을 위한 복음도 아니었고, 유대인만을 위한 복음도 아니었습니다. 사사로운 욕망과 이익을 충족시켜주는 복음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받은 복음은 온 세상 만민을 위한 복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을 헐어버린 복음, 모든 차이와 차별의 장벽을 완전히 무너뜨린 복음, 모든 상처와 죽음의 저주를 치유하고 몰아낸 복음, 이리저리 분열된 세상을 하나 되게 하는 복음, 온 세상을 새롭게 하는 복음, 자기에 갇히고 시대에 갇히고 자기 욕망에 갇히고 무지에 갇히고 우상에 갇히고 종교에 갇힌 자들을 자유케 하는 복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받고 즉시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의 울타리를 넘어 이방인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예루살렘의 사도들과도 복음의 교류를 했습니다. 서로가 받은 복음이 하나의 복음이라는 것, 유대교의 장벽을 뛰어넘는 복음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친교의 악수를 나눴습니다. 예루살렘 사도들과의 일치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구원 받는 방법이나 지혜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철학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자신이 직접 겪고 행한 일들을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믿어왔던 바울이 직접 겪고 행한 일들을 말했습니다. 사실을 말했고 사건을 말했습니다. 예, 하나님의 복음은 신기한 이론이 아닙니다. 고상한 지혜가 아닙니다. 오로지 사실이고 사건입니다. 바울은 실제로 부활하신 예수의 복음을 통해 구원받았습니다. 저 하늘에 태양이 작열하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사랑하시고 예수님께서 온 세상을 구원하신 것 또한 사실입니다. 아니, 태양이 존재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사랑하시고 예수님께서 온 세상을 구원하신 것이 더 분명하고 구체적인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보았고 겪었고, 그래서 알았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자기가 보고 겪어서 안 것을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자기가 전한 복음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강변하기 위해서 자기가 보고 겪고 안 것을 가감 없이 전했습니다.

 

이렇게 자기가 보고 겪고 안 것은 말한 바울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불미스런 일화(사실)를 전합니다. 이 일화는 안디옥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안디옥은 로마 제국에서 대략 세 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전체 인구가 약 25만 명 정도였는데 그중에 유대인이 2만 5천명 정도였을 것이라고 추산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예수 믿는 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지자 위협을 느낀 유대인들이 교회를 핍박했는데(바울도 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앞장섰음) 그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피해 여러 곳으로 흩어졌습니다.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흩어져서 예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행11:19). 처음에는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하다가 점차 헬라인에게도 전했는데 주의 손이 함께 하사 수많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행11:21). 그런 연유로 안디옥은 예루살렘 다음으로 중요한 복음의 도시가 됐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최초로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또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안디옥 교회는 여러 면에서 교회 역사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베드로는 이처럼 의미 있는 안디옥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어떤 경위로 방문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베드로는 안디옥에 가서 이방인 신자들과 자유롭게 식탁교제를 했습니다. 오늘날은 이 일이 그렇게 논쟁거리가 되지 않습니다만 1세기 유대인들에게는 이 일이 매우 중대한 논쟁거리였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신자와 함께 먹었다는 것은 한 마디로 율법이 금한 음식을 먹었다는 말이거든요. 그리고 유대인이 먹으면 안 되는 부정한 음식을 먹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일일이 알려주면서 정한 짐승의 고기는 먹고, 부정한 짐승의 고기는 먹지 말라고 엄중하게 말씀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가 거룩하니 너희들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시며 부정한 짐승의 고기를 먹지 못하도록 금하셨습니다(레위기11장, 신명기24장). 이처럼 정결한 것은 먹고 부정한 것은 먹지 말라고 확실하게 선을 그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음식 규례를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바벨론에 끌려갔을 때 왕의 음식과 왕이 마시는 포도주를 먹지 않고 채소와 물만 먹은 것도 부정한 음식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으려고 그런 거였습니다(단1:8).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도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고기를 멀리하기 위해 무화과와 견과류만 먹은 제사장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 유대인들은 대대로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에 관한 규례를 지켜왔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 규례를 무시하고 자유롭게 부정한 음식을 먹었습니다. 이방인들과 아무런 거리낌 없이 교제했습니다. 왜 이렇게 막돼먹은 행동을 한 것일까요? 율법을 우습게 여겨서일까요? 하나님 말씀을 무시해서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음식도 정결하다고 말씀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 그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욥바에서 복음을 전하던 어느 날 정오 쯤 되었을 때 갑자기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늘이 열리며 네 귀퉁이를 줄에 매단 커다란 보자기 같은 것이 땅바닥으로 내려왔습니다.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파충류 동물과 새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베드로는 즉시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하자 두 번째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보자기가 다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행10:9-16).

여기서 말하는 대로 베드로는 본래 이방인의 음식을 부정하다고 생각하고 결코 먹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생각지 않은 환상을 본 것입니다.

 

베드로는 의아했을 겁니다. 이 환상이 뭘 뜻하는 것인지가 궁금했을 겁니다. 그래서 환상에 대하여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이방인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를 찾았습니다. 또 동시에 성령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행10:19-20) 베드로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여 고넬료의 집으로 갔습니다. 고넬료의 집에 가서 자기가 온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유대인이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이라는 것은 여러분도 다 아는 일입니다. 나도 지금껏 이방인과 교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게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나를 부르러 왔을 때에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따라온 것입니다.’(행10:28-29) 이렇게 고넬료의 집에 온 이유를 설명하고는 예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성령이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에게 임했습니다(행10:44). 자기네들이 받은 성령이 이방인에게도 임한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상상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상상도 못한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신’다는 사실(행10:34-35)을 깨달았습니다. 유대인이냐 헬라인이냐와 상관없이, 할례를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깨닫고 나자 할례자와 무할례자의 구별이 무의미했습니다. 무할례자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하등의 거리낄 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할례자들과 자유롭게 식사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안디옥에 갔을 때에도 이방인들과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식탁교제를 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야고보가 보낸 몇몇 사람들이 오기 전까지는 식사 때마다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야고보(예수님의 형제)로부터 보냄 받은 몇몇 사람들이 안디옥에 온 일로 인해 상황이 복잡하게 꼬였습니다. 베드로가 항상 해오던 대로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데 예루살렘에서 온 자들이 들어온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이방인 형제들과 함께 먹던 자리에서 슬그머니 물러났습니다. 그러자 바나바를 비롯한 다른 유대인 신자들도 슬슬 자리를 떴습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이 딱 분리되는 상황이 연출됐습니다(2:12-13).

 

바울은 이것을 보고 베드로를 책망했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처럼 살지 않고 이방인처럼 살았습니다. 이방인처럼 하나님이 정한 음식 규례와 상관없이 먹고 마셨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방인의 자리를 떠나는 것입니까? 그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는 것이고, 이방인으로 하여금 유대인처럼 살라고 강요하는 것이라는 걸 모르십니까? 우리는 이미 깨달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유대인이지만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예수 그리스를 믿은 것 아닙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한 것이지 않습니까?’(2:14-16)라고 책망했습니다.

그렇다면 물읍시다. 바울은 왜 면전에서 공개적으로 책망했을까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해서였을까요? 다혈질이라서였을까요? 베드로의 권위를 짓밟고 올라설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해서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올곧게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2:14). 복음의 진리를 알면서도 복음의 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복음의 영광과 복음의 본질을 훼손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복음의 영광과 복음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복음의 영광이고 복음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이 허물어졌다는 뜻이고, 할례와 무할례의 차이가 무의미해졌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담이 공고했어요. 할례자와 무할례자 사이에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었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알았고 유대인들도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저들이 예수를 믿은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복음의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은 거였고, 이방인들과 함께 자유롭게 식사를 한 거였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이 들이닥치자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여 자리를 떠났습니다. 바울이 볼 때 이 행동은 위선이었습니다. 우리 말 성경 개역 개정판은 ‘외식’(2:13)이라고 번역했습니다만 노골적으로 말하면 ‘위선’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의 행동은 위선이었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표리부동한 행동이었습니다. 할례를 강조하는 보수주의자들을 두려워한 비겁한 행동이었습니다(2:12). 복음의 본질과 영광을 훼손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헐어버린 것을 다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져오신 변화의 핵심을 무너뜨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참지 않고 책망한 것입니다. 그것도 베드로의 면전에서 공개적으로 책망한 것입니다.

 

저는 안디옥에서 벌어진 불미스런 사건을 묵상하면서 바울이 얼마나 예수의 복음을 소중히 여겼는지를 새삼 발견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것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의 권위를 짓밟고 올라설 절호의 기회를 잡아서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의도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결과적으로 복음의 본질과 영광을 훼손하는 행위를 한 것이기 때문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행위를 한 것이기 때문에 책망한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의 복음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정말 고지식할 정도로 하나님의 복음을 앞세웠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최고로 존귀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바울의 말을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내가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고전2:2)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배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 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빌3:5-9)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다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행20:24)

 

바울에게 예수의 복음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존귀한 것, 심지어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최고의 가치로 인정합니까? 예수의 복음을 위해 다른 것들을 상대화시킵니까? 바울처럼 다른 것들을 쓰레기로 여기지는 않는다 해도 예수의 복음을 가장 존귀한 것으로 여깁니까? 다 아시는 것처럼 그렇지 못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예수의 복음을 쓰레기 취급합니다. 일을 앞세우고, 사업을 앞세우고, 사회적인 성공을 앞세우고, 돈을 앞세우고, 여행을 앞세우고, 취미생활을 앞세우지 복음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명사나 스타를 닮으려고 하지 예수님을 닮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엇비슷해요. 말과 생각은 하나님이 가장 존귀한 분이라고 하지만 일과 하나님, 사업과 하나님, 성공과 하나님, 돈과 하나님, 성적과 하나님이 부딪치면 일이 앞서고, 사업이 앞서고, 성공이 앞서고, 돈이 앞서고, 성적이 앞서지 하나님이 앞서지 않습니다. 실제로 주변의 그리스도인들을 보세요. 하나님 때문에 사업을 뒤로 미루고, 돈을 뒤로 미루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하나님이 뒤로 밀립니다. 말과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앞세우는데 몸으로는 돈과 성공을 앞세웁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최우선성, 복음의 최우선성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나라를 사는 일(구원을 사는 일)이 얼마나 위대하고 가치 있는 일인지에 대한 인식이 사라졌습니다. 세상이 예수의 복음을 쓰레기로 여기니까 그리스도인들도 예수의 복음을 쓰레기로 여기고, 세상이 교회를 우습게 여기니까 그리스도인들도 교회를 우습게 여깁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그리스도인도 많습니다. 몸이 둘이라도 부족할 정도로 바쁘게 일하면서도 날마다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식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가르치고, 예수의 복음 이 가장 존귀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다 자식들에게 양보하는데 예수 믿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절대 양보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삶의 우선순위, 가치의 우선순위가 분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돈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앞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으로 귀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래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을 아는 자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헌신을 아는 자라면, 복음의 영광과 구원의 복됨을 아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존귀한 분이라는 것이 생활의 구석구석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시라는 것이 드러나야 합니다. 복음이 생활이 되고, 생활이 복음이 돼야 합니다. 다른 건 양보해도 복음을 배우고 사는 일에서만큼은 양보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왕 되심이 세상에 드러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한 사랑과 헌신이 세상에 드러납니다. 복음의 영광과 구원의 은총이 세상에 드러납니다. 막혔던 복음의 대로가 뚫립니다.

 

요즘 사람들은 정반대로 삽니다. 다들 자기만족과 자기영광을 위해 삽니다. 삶의 최우선순위에 자기가 있습니다. 현대인의 자기중심성은 정말 하늘을 찌릅니다. 그런데 자기만족과 자기영광을 위해 사는 것처럼 비참하고 곤고한 일이 없습니다. 자기만족과 자기영광을 위해 사는 것처럼 어리석고 허망한 일이 없습니다. 자기중심성에 갇혀 사는 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없습니다. 사실입니다. 자기영광을 위해 살고, 자기영광에 취해 살고, 자기영광을 자랑하며 사는 자야말로 불쌍하고 가련한 삶을 사는 자입니다.

진정한 자기만족, 진정한 자기영광은 오로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할 때 주어집니다. 복음이 삶이 되고, 삶이 복음이 될 때 주어집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은 본래 자기 의와 자기영광에 취해 살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그것이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참된 영광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진정한 영광은 오직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 깨달음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영광이 삶의 최우선순위가 되었습니다. 복음이 삶이 되고, 삶이 복음이 되었습니다. 안디옥에서 베드로를 책망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이 삶이 되고 삶이 복음이 돼야 하는데 삶으로 복음을 부정했기 때문에 면전에 대고 책망한 거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진정한 자기만족, 진정한 자기영광은 오로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할 때 주어집니다. 이것이 삶의 대원칙입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사랑하라. 그러면 삶이 꽃봉오리가 된다. 진정한 자기만족, 진정한 자기영광을 옷 입게 된다. 이 영광은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다.’ 예,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것이 삶의 대원칙입니다. 이 대원칙을 무시하는 자는 예외 없이 삶에서 미끄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