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감사한 생활의 비결 ―감사 주일― (고린도 후서 9:6-15)

새벽지기1 2018. 2. 7. 07:03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9:15)

우리가 언제 하나님 아버지 앞에 감사를 드리지 아니하리오마는 특별히 이렇게 일년에 한번씩 한 주일을 정해서 감사의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만복의 근원이시는 하나님께서 금년 일년 동안 우리에게 주실 은총을 기억하면서 중심으로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내 개인에게 주신 은혜, 내 가정에 주신 은혜, 우리 교회에 주신 은혜, 또한 우리 교회에 속하는 여러 기관들, 보린 원이나, 경로원이나, 모자원이나, 기도원이나, 초등학교나, 중 고등학교나, 모든 기관들, 또는 본 교회 전도사업, 개척교회, 태국선교, 이 모든 사업 위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여 주시는 것을 우리는 감사드립니다.
또한 우리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우리 나라 위에 하나님께서 주신, 금년에 특별히 시정을 새롭게 한 모든 일이나, 하나님께서 우리 나라를 지켜주신 모든 축복을 기억하고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는 일년 동안 하나님께서 온 세계 교회와 온 세계 나라 위에 축복을 더하여 주시고 평화를 더하여 주신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감사를 하나님 앞에 드립니다. 우리가 영적 은혜를 감사할뿐더러 우리는 여러 가지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방면에 주신 은총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일년에 한번씩 특별히 한 날을 정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또한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이것만은 부족합니다. 우리는 평소의 생활이 감사의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매일 매일의 생활과 일생의 생활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을 읽어보면 그는 언제든지 제일 먼저 문안을 한 후에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 그 서신을 읽어보면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하는 권면이 어떻게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범사에 감사하라『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이와 같이 글을 쓸 때에 항상 감사하라고 권면한 이 사도 바울의 생활을 보면 그 생활 자체가 한 감사의 생활이올시다.
그의 마음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감격으로 사무쳤고 따라서 그의 하루의 생활, 한 달의 생활, 일생의 생활이 은혜를 감사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어떻게 사도 바울이 이렇게 감사한 생활을 할 수 있었는가? 그의 감사한 생활의 원인이 어디서 났는가? 우리는 보통 생각하면 모든 것이 다 평안하고 환경이 좋으면 물론 감사한 생활을 할 수 있지 않는가? 몰론 일반적으로 이렇게 생각됩니다. 하지마는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좋은 환경이나 평안한 생활로 인해서 감사한 생활을 한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 후서 11장 하반부를 읽어보세요. 거기 보면 사도 바울의 일생을 간단히 기록한 몇 마디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매를 몇 번 맞고, 몇 번이나 감옥에 들어갔고, 몇 번이나 파선을 당하고, 길의 위험함과 산의 위험함과 도적의 위험함과 도회의 위험함과, 유대 사람들에게도 핍박을 받았고, 이방 사람들에게도 핍박을 받았고, 다메섹에서도 그랬고, 에베소에서도 그랬고, 고린도에서도 그랬고, 예루살렘에서도 그랬고, 로마에 가서도 대부분 감옥에 있었고……그의 일생은 핍박과 환난(患難)과 곤고(困苦)의 계속적인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감사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대부분 생각할 때에 우리 몸이 건강하면 몰론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지 않은가? 이렇게 병들고 몸 약한데 무슨 감사가 있으랴! 흔히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바울의 감사한 생활은 몸이 건강한데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 후서 12장을 보면 그가 무슨 병인지는 확실히 말하지 않아서 모르겠지마는 그의 육체 가운데는 찌르는 가시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가시를 없이하여 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마는 그냥 두었다고 그랬습니다.


찌르는 가시를 그냥 가슴에 안고 지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편지할 때에, 그가 무리들에게 전도하게 된 경위도 그가 병이 나서 다른 데 못 가고 거기 유함으로 전도를 했다고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몸 건강한 사람은 아닙니다. 이런 감사와 기쁨의 생활이 건강해서 온 것도 아닙니다. 물론 건강하면 좋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경우는 이것은 아닙니다.
물론 가정이 화평하고 가정이 평안하면 그거 감사한 일이올시다. 하나님의 축복이올시다. 가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큽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마는 사도 바울의 경우는 이 가정의 안락(安樂)에서 온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는 사도 바울은 문자 그대로 가정의 단락이라는 것은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일생을 독신 생활을 하였습니다. 종일 일하고도 편안히 들어와서 쉴만한 집이라도 일정한 가정이 일생토록 없이 살았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주님께서 말씀한 대로 바울은 일생토록 나그네로서 이 곳 저 곳 방랑하며 평안(平安)이 없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사도 바울의 감사한 생각과 생활이 어디서 생기는가? 그것은 밖에 있지는 아니했습니다. 그 속에 있었습니다. 그의 환경이나 그의 건강이나 그의 가정이나 무슨 금전이나 명예나 지위나 성공이나 그런데 있은 것은 아닙니다. 그의 감사한 생활은 그 속 깊은 심령 속에서 우러나왔습니다. 여기 말씀하는 대로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이필난설(以筆難說)이란 말이 있지요? 붓으로 다 쓸 수 없습니다. 이구난설(以口難說입)이란 말이 있지요? 입으로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크고 귀한지 말로 다할 수 없는 큰 은사를 이 사도 바울은 마음속에 받았습니다. 그 은사가 무슨 은사인지 압니까? 그 은사는 제 생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켰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도 바울이 알게 되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그 신앙은 그 뿌리요, 감사는 거기서 나는 열매인 것입니다.


로마인서 7장을 읽어보면 사도 바울의 그야말로 세기적 고민이 잠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우리가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심각한 도덕적 고민을 느꼈습니다. 그는 양심적인 인물이올시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구약을 배운 사람이올시다. 그는 옳은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사람 앞에 뿐만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꼭 옳은 사람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를 얻기 위해서 힘썼습니다. 구약은 그르쳐 줍니다. 네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려고 하면 계명을 지키라. 율법을 지켜라. 양심대로 계명을 지키기를 힘썼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이와 같이 양심적으로 계명을 지키기를 힘쓸 때에 자기가 전에 깨닫지 못하던 자기 육체 속에 다른 힘이 있어서 자기가 아무리 힘쓰고 애쓰지마는 그대로 할 수 없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속에는 죄의 능력이 또한 있었습니다. 육을 기초로 하는 죄의 능력이 있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행하지 못하고 실패했습니다. 그래서『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랴.』긴 탄식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스스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뜻을 깨닫고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받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생명의 복을 깨닫게 되고 성령의 축복을 박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를 받은 다음에 그는 외칩니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은사인 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죄에서 구속을 받았습니다.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구속과 해방의 기쁨은 언제든지 그로 하여금 이 은혜에 보답하기를 원하게 하는 감사의 생활로 변하게 한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난 때부터 그리스도는 옛날 승천한 그리스도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만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 살아 계신 그리스도는 언제나 역시 사도 바울과 같이 계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은『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오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에 속하던 자기는 죽었습니다. 그 대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속에 살아 계시는 것을 항상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대모데 후서 4장에 보면『내가 나를 위해서 변명할 때 내 친구들은 다 나를 떠났다. 한 사람도 나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강한 힘을 주고 주께서 언제든지 나와 같이 계셨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전도하려 갔습니다. 기회는 큽니다. 죄는 많습니다. 반대하는 유대 사람들은 벌 때와 같이 일어납니다. 어떻게 할까? 주님께서 특별히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였다고 그랬습니다.『두려워하지 말아라. 이 도회에 내 백성이 많으니 입을 닫지 말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하라.』살아 계신 주님은 언제든지 사도 바울과 같이 한 것입니다.
지중해에서 큰 풍파를 만날 때에도 주의 사자가 나타나서 바울을 격려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릴보 4장 13절에 있는 대로『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그리스도는 역사적 그리스도만이 아닙니다. 현재에 자기와 같이 계셔서 능력을 간단없니 쥐시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풍파를 만날 때에도, 핍박을 만날 대에도, 돌에 맞을 때에도, 파선을 당할 때에도, 조금도 두려워할 것은 없었습니다. 언제든지 주님의 능력이 같이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당할 때에 사도 바울은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다 이와 같은 신앙이 있습니까?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써 죄에서 구속을 받았습니까? 우리가 다 해방을 받았습니까? 우리가 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이 계시는 이 새로운 믿음, 참 믿음, 산 믿음을 우리가 다 가졌습니까? 그러면 우리도 순경이나 역경이나, 괴로울 때나 평안할 때나, 초막이나 궁궐이나, 밤이나 낮이나, 언제든지 감사로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닌 줄 압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와 동행한 생활을 하게 되니 자연히 그의 생활은 많은 열매가 맺혔습니다. 우선 마음 속게 성신의 열매를 맺혔습니다. 사랑과 희락(喜樂)과 화평(和平)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良善)과 충성과 온유(溫柔)와 절제의 열매가 맺혔습니다. 가는 곳마다 죽은 생명을 구원합니다. 다른 사람을 도와줍니다. 가는 곳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웁니다.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열매가 맺히게 될 때에 자연히 감사한 마음이 마음가운데 일어납니다.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 가운데도 주를 위해서 무슨 열매든지 열매를 맺히는 사람일수록 감사한 마음이 더 많이 있습니다. 내가 주를 위해서 한 사람에게라도 복음을 전파할 수 있으면 그 사람은 감사한 마음이 더 많습니다. 내가 주를 위해서 한 사람에게 옷을 한 벌이라도 줄 수 있고, 내가 주를 위해서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 잔을 줄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는 감사한 마음이 더 많아질 것입니다.


내가 사실 주의 복음을 전파할 생각으로서 전도 회비를 많지는 않지마는 매달 꼭 내고, 보린원 후원회비를 꼭 내고, 온전히 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가 병자를 방문하고,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준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는 더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사도 바울은 항상 빛나는 소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우리를 위하여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화의 중한 것을 이루는 것을 분명히 알고 살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조금 환난을 받지마는, 이 세상에서 내가 의를 위해서 핍박(逼迫)을 받지마는, 이 모든 것은 하늘 나라의 큰 영광을 더하게 하는 것이니 얼마나 감사한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 갈 길을 다 가고 내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나를 위해서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는 것을 언제든지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감사한 마음이 자연히 북받쳐 올라왔습니다.
우리가 다 이 소망이 있습니까? 사실 감사는 믿음의 척도올시다. 감사를 가지고 믿음을 헤아려 볼 수 있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도 말씀했지마는 로마서 1장 21절에 보면『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에게는 감사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다 살건만 하나님의 은혜인 줄 모릅니다. 하박국의 말과 같이 그물에 감사의 제사를 드립니다. 물고기 잡고는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고 그물에 감사합니다. 주의(主義)에 감사를 드립니다. 내 배에 감사를 드립니다. 안 믿는 사람은 감사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믿음이 있게 됩니다. 믿음에 있게 되면 점점 감사할 줄 알게 됩니다. 평안할 때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믿음이 적을 때는, 괴로울 때는 감사를 못 드리고 무엇이 잘 될 때에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실패할 때는 감사를 잘 못 드립니다. 든든할 때는 감사를 열심히 잘 드립니다. 병날 때에는 불평합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좀 좋은 때에는 감사드리지마는 역경에 가서는 그만 불평이 나옵니다.
점점 정성해서 가령 사도 바울의 믿음의 정도만큼 이르렀다고 하게 되면 평안할 때에도 감사를 드리지마는 불편할 때에도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건강할 때에도 감사를 드리지마는 약할 때에도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성공할 때에도 감사를 드리지마는 실패할 때에도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순경에서도 감사를 드리지마는 역경에서도 감사를 드립니다. 살 때에도 감사를 드리지마는 죽을 때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는 우리 마음의 척도올시다. 우리가 온전한 그리스도의 신앙에 들어가게 될 때에는 문자 그대로 성경에 있는 말씀과 같이 범사에 감사합니다. 모든 일에 감사합니다.
하늘 나라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만 모인 까닭으로 불평이라고는 없습니다. 하늘 나라에는 불만이 없습니다. 하늘 나라에는 기도도 없습니다. 하늘 나라에는 설교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는 찬송과 감사만이 있습니다.
이 세상 교회에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왜? 기도로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세상 교회에서 예배 볼 때에 성교가 필요합니다. 하늘 나라에서 예배 볼 때에는 찬송과 감사밖에는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영락교회 이 시간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심령이 오직 이 찬송과 감사로써 충만하다고 하면 이 자리가 곧 천당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당의 축복을 미리 맛보는 사람이올시다. 참으로 은사를 받아서 언제든지 감사함으로 사는 사람은 이 땅에서 살지마는 하늘 나라의 축복을 미리 받고 천당의 생활을 미리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와 같은 은혜를 우리가 다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960년 11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