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은혜를 잊지 말라 (누가복음17:11-21)

새벽지기1 2018. 2. 1. 07:02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17:17)

오늘 아침 읽은 이 말씀은 우리가 평소에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에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어떠한 작은 촌에 들르시게 되었습니다. 그 촌 어구에서 문둥병 자 열 명을 만났습니다. 그 가운데는 유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마는 사마리아 사람도 한 사람 섞여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유대 사람들과 사마리아 사람들 사이에는 감정이 좋지 않아서 보통사람들은 그렇게 접촉하기를 꺼려합니다. 그렇지마는 이 문둥이들은 다 같은 불행한 병을 만나서 이러한 불행한 가운데 서로 동정하면서 한 집단이 되어서 쫓겨다니며 사는 신세에 유대 사람 사마리아 사람 할 것 없이 같이 살았던 모양입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지나가심을 멀리서 보고 소리를 높여서 외칩니다.『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필연 이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대해 이미 들은 소식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원하시면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는 줄 확실히 믿은 모양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다만 하시는 말씀이『가서 제사장들에게 네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뜻은 옛날 문둥병 자들이 혹 병이 낫게 되면 낫다고 하는 증명서를 제사장들에게 받아야 다시 일반 사회와 자유로 교제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제사장들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하는 그 말씀 가운데는 메 몸이 곧 나을 것이라고 하는 뜻이 내포된 줄 생각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서슴지 아니하고 곧 그 자리에서 떠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제사장들에게 나아갔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들이 가는 도중에 그 추악한 병이 온전히 나았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오직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 것을 깨달아서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예수님께 향하여 돌아왔습니다. 다 돌아와서는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송하며 예수님에게 사례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올시다.『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잇느냐? 이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 밖에는 하나님께 돌아와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업느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나음을 받았지마는 그 은혜를 깨닫고 돌아와서 감사를 드린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아홉 사람은 은혜를 잊었습니다. 감사를 드리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에 우리 마음가운데 곧 들어오는 생각은 과연 그럴 수가 있을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과연 이렇게 은혜를 잊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제가 염려하는 것은 이것이 우리 보통 인간의 일반적인 모습이 아닌가 고 생각이 됩니다. 깊이 생각하면 이것이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이 타락한 인간성의 일면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입니다. 이 문둥이들처럼 물론 우리도 여러 가지 병 가운데 걸리게 될 때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병을 낫게 하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 후에 우리의 병이 나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병이 나은 다음에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약조하고 하나님 원한 그대로 꼭 지키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조용히 내 생활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런 말씀이 우연한 말 같지가 아니합니다.


여기 앉으신 여러분은 대부분 38선을 넘어 오신 분인 줄 생각합니다. 우리가 38선을 넘어올 때에 안 믿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지마는 믿으면서 넘어온 사람은 많은 기도를 하면서 넘어온 줄 생각합니다. 38선을 넘어올 때에 마음속에 결심한 일도 많고 작정한 일도 많고 문자 그대로 하나님 앞에서 원(願)을 하면서 넘어오신 이들도 많이 계십니다. 우리가 위기를 당할 때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서 원을 맺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잠깐 우리의 생활을 돌이켜 보십시오. 우리가 38선을 넘어올 때에 마음 가운데 결심한 하나님과의 약조를 얼마나 그대로 실행하였는가? 우리가 맨 처음에 38선을 넘어와서는 누구나 다 같이 피난민이었습니다. 다 똑같이 집이 없고 생활의 위협을 받는 내일 어떻게 살는지 알 수 없고, 장래가 어떻게 되려는지 알 수 없는 똑같은 운명가운데 생활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런 때에 다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어떻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에 안정을 주시기 위해서 간절한 기도했습니다.


그 후에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생활의 안정을 얻었고 물질적으로도 하나님 앞에 축복을 얻은 이가 많이 계신 줄 압니다. 우리가 피난민으로 처음에 왔을 때에 기도하던 그 생각 그 소원대로 얼마나 실행하였습니까?
영국에 유명한 트랜취라고 하는 감독이 있는데 그이가 특별히 예수님의 이적에 대한 주석을 중심해서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이 분이 이적에 대해서 주석을 써 가다가 이런 구절을 썼습니다.『자기가 살펴보는 대로 모든 은혜 가운데 감사할 줄 아는 은혜는 아마 제일 드문 은혜이라.』이런 말을 기록한 것을 읽어보았습니다. 이것은 옛날부터 우리 동양에 내려오는 속담과도 과히 틀리는 말이 아닙니다.『원수는 돌에 새기지마는 은혜는 물에 새긴다.』곧 잊어버린다고 하는 말입니다. 언제나 국가의 충신이 바르고 가정에 효자가 드물고 회사에 참된 봉사자가 적고 세상에 참된 신자가 적은 것은 이 진리를 우리에게 웅변으로 증명하여 주는 것입니다.
은혜를 구하는 이는 많지마는 은혜를 받은 다음에 그것을 기억하는 이는 적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가 특별히 주의하지 아니하면 우리도 그 아홉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옛날 다윗이 스스로 자기의 영혼을 깨우치며 하는 말이『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송하여 그 모든 은택(恩澤)을 잊지 말지어다.』자기의 영혼을 스스로 깨우친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사실을 주의해 보세요. 이 열 사람 가운데 아홉 사람이 은혜를 잊어버렸는데 이상스럽게 전부가 유대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실 유대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을 비교해 보면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 유대 사람이요, 또 은혜를 깨달아 알 만한 사람이 어떤 면으로 보든지 유대사람이올시다. 이 유대 사람들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올시다. 모세의 율법을 배운 사람들이올시다. 여러 선지자들의 교훈을 들은 사람들이올시다. 매 안식일에 회장에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올시다.
그런데 이 유대인 아홉 사람 전부가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이것도 우연이 아닌 줄 압니다. 우리가 한 가지 마음가운데 꼭 깨달아야 될 것은 은혜를 많이 받는 자가 더 잘 잊어버립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몰론 예외도 있습니다. 부자 집 자녀들과 가난한 집의 자녀들을 비교해 보면 어떤 집 자녀들이 부모의 은혜를 더 잘 하는가? 부모의 혜택을 많이 받은 부자 집 자녀들인가? 그렇지 아니하고 보통 집 자녀들인가? 예외가 있지만 보통으로 하는 말입니다.
옛날 속담에 외아들이 밥투정을 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왜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대에도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시고 주님이 온 것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이사야 1장 3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안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내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은혜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아마 은혜를 받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으레 받을 것이라, 이렇게 생각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면서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고 세례를 받으라고 외칠 때에 여러 사람이 나아와서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바리새인과 많은 사두개인들은 죄는 자복하지 아니하고 그냥 세례만 받으려고 나아올 때에 세례 요한이 책망하였습니다.『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로 하여금 장차 올 화를 면하라고 하더냐?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스스로 믿지마는 하나님께서는 이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가 있는 것이 아니냐?』
오히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믿는 까닭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줄 생각합니다. 이 사실이야말로 우리 오래 믿은 사람들 특별히 믿는 가정에서 자라나는 자녀에 대하여 큰 경고가 되는 말씀이올시다. 또한 누구든지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 어렸을 적부터 많이 받은 사람들, 영적으로, 육 적으로, 물질적으로, 건강상으로, 재능 상으로, 어떤 방법이든지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에게 대하여 전감이 되는 교훈인 것을 우리가 마음가운데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가 은혜를 많이 받을수록 은혜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송하여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다윗과 같이 항상 우리의 심령을 깨우치지 아니하면 안 되겠습니다. 


또 한 번 이 사살을 기억해 보세요. 이 아홉 사람은 은혜를 받되 보통 은혜를 많이 받은 것도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그야말로 큰 은혜를 받았지마는 그것까지 잊어버렸습니다. 문둥병 환자가 문둥병이 나았다고 하는 것은 생명을 도로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우리 보통 생각에 적은 일에는 보통 바로 잊어버리지마는 큰 은혜만은 받은 것을 어떻게 잊어버리랴 하지마는 그렇지도 않습니다. 이런 큰 은혜도 잊어버렸습니다.
요즘 전기 사정이 좋지 못해서 불이 가는 때가 많습니다. 어떤 친구가 좋은 등을 준비해서 이런 때 여러분께 준다고 말하면 그 은혜를 감사히 받을 것입니다. 그 은혜를 항상 잊지 않을 줄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매일 아침 하나님께서 밝은 햇빛으로 주실 때에 아침마다 해를 보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는 분이 몇 분이나 됩니까?
전에 6·25때 괴뢰군이 여기 들어온 다음에 우리 교우 몇 분의 도움을 받아서 저도 피난 갔습니다. 한강을 건너서 시흥으로 해서 수원에까지 갔는데 괴뢰군이 들어온 바로 그 날은 아주 맑고 더웠습니다. 많은 피난민들이 수원 거리에서 남으로 남으로 그냥 밀려 내려갑니다. 저도 무리 가운데 섞여서 내려가는데 얼마쯤 내려가다 보니까 어떤 긴 옷을 입은 성공회 선교사들이 두 사람이 서서 큰 물동이에 냉수를 가득 채워 놓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물 한 잔씩 부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매우 더운 날 땀을 흘리면서 가던 피난민들이 감사히 그 물을 받아먹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 물 한잔 받아먹은 생각이 잊혀지지 않고 감사합니다. 여러분, 우리 특별한 한국 같은 데는 물의 축복을 받아서 어디 가든지 몇 자만 파면 맑은 냉수를 주시는 이 하나님 앞에 물을 마실 때마다 감사를 드리는 분이 몇이나 됩니까? 저도 사실 그런 경험을 한 다음에는 물을 마실 때도 감사의 기도를 올리느라고 힘을 쓰지마는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여러분의 가족 중에 하나가 중한 병으로 앓는데 호흡하기가 대단히 괴로울 때에, 어떤 친구가 산소를 한 통 보내서 그 호흡하는 것을 도와주었다고 하면, 아마 여러분은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오래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넉넉한 공기를 주어서 항상 숨쉬며 살면서 숨쉴 때마다 기도를 드립니까? 이것이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큰 은혜일수록 우리가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작은 은혜를 우리가 어떤 때 기억하지만 큰 은혜일수록 오히려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옛날 글을 보면 요 임금이 어떻게 정치를 잘하였는지 모든 백성들이 아무 근심 없이 평안히 삽니다. 그 때 백성들이 격양가를 불렀다고 합니다. 흙을 치는 노래입니다. 그 격양가의 내용이『경전이식(耕田而食)하고 천장이음(穿井而飮)하니 제은이 어아(帝恩於我)하야 하관언(何關焉)고?』『우리가 밭을 갈아서 밥을 먹고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는데 임금의 은혜가 내게 무슨 상관인고?』이게 격양가의 내용입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그 때 백성들이 요 임금이 너무 정치를 잘해서 그저 평안해서 잘 사니까 오히려 노래 부르면서 임금의 은혜가 무슨 상관이냐며 그의 은덕을 잊어버렸습니다. 우리 많은 사람들은 여기 있는 문둥이와 같이 참 죽을죄에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이 십자가의 은혜를 항상 잊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까?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조심하지 아니하면 이 은혜를 잊어버리기가 쉬운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사실을 이것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세요. 이 아홉 사람을 보면 멀리 예수님께서 가시는 것을 보고 소리를 높여서『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주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는 잘 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가 응답된 다음에 은혜는 잊어버렸습니다. 명심하십시다. 기도를 열심히 잘 하는 사람도 은혜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또 보세요, 이들이 아직 문둥병이 몸에 그냥 있는데 예수님께서 어서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는 말이 곧 떨어지자마자 예수님 말씀 그대로 꼭 믿고 곧 돌아서 간 것을 보니까 이 사람들의 믿음이 어떻습니까? 믿음이 독실합니다. 산을 옮길 수 있는, 병 고침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믿음 있는 사람들이 그 믿음의 결과로써 은혜를 받은 다음에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믿음 있는 사람도 은혜를 잊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를 열심히 하든지 아무리 믿음이 진실하다고 하지마는 우리가 이 방면에 주의하지 아니하면 이 아홉 사람 틈에 들기 쉽습니다.『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송하여 그 모든 은총을 잊지 말지어다.』


자 여러분, 이와 같이 아홉 사람은 은혜를 잊어버리고 한 사람만 돌아와서 감사의 찬송을 할 때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요?『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아홉은 어디 잇느냐? 이 사마리아 사람 외에는 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업느냐?』여기 보면 놀란 기색이 보입니다. 예수님은 본래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분입니다. 그렇게 아시는 예수님에게 있어서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큰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을 볼 때에 놀랐습니다. 인간성이 타락했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타락한 수 있나? 사람의 마음이 목석이 아닐진대 이럴 수야 있겠느냐? 예수님께서도 대단히 놀라셨습니다. 또 놀란 것뿐 아닙니다. 아홉 사람은 어디 잇느냐?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얻지 못하였느냐? 이것을 보니까 예수님의 탄식이 그 마음가운데 말할 수 없는 슬픈 기색이 이 말씀 가운데 포함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매우 섭섭했습니다. 이렇게도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깨닫지를 못할 때에 그 마음이 섭섭합니다.


또 보세요.『아홉은 어디 잇느냐?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얻지 못하였느냐?』이거 보니까 이제라도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돌아와서 은혜를 알고 찬송하기를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이제라고 돌아와서 자기의 은혜를 깨달아 알 수 있도록 기다리는 모양이 여기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런 감사를 받아서 유익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돌아오기를 원하는 것은 이렇게 은혜를 받은 다음에 감사할 줄 알아야 은혜를 더 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 사마리아 사람은 와서 이렇게 감사한다고 할 때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가라 네 마음이 너를 구하였느니라.』본문대로 하면『네 믿음이 너를 제 생명 전체를 온전케 하였느니라.』『네가 네 병만 고친 것이 아니고 네가 이렇게 은혜를 깨닫고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그 믿음은 너의 영혼까지 구원함을 얻었느니라.』사마리아 사람은 이렇게 돌아와서 자기의 영혼까지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왜 돌아와서 감사하기를 기다리는가? 은혜를 더 주기 위해서입니다.


흔히 옛날부터 사대은(四大恩)을 말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올시다. 우리 육적(肉的) 영적 모든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됩니다. 둘째는 부모의 은혜올시다. 이 세상에 있어서는 나를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시고 가르쳐 주신 부모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는 국가의 은혜올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에 국가가 없으면 살수가 없고 평화를 누릴 수도 없습니다. 국가를 통해서 오는 모든 은혜를 기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넷째는 사회의 은혜, 옛날 말대로는 중생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여러 친구들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혜택을 입히는 이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가 많습니다.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각 방면에 이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차이는 여기에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1절에 보면 안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아니한다고 그랬습니다. 안 믿는 사람의 표는 여기 있습니다. 감사할 줄 모릅니다. 믿는 사람의 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이는 감사할 일이 더욱 더 많이 생깁니다. 그러나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감사할 일이 점점 적어집니다. 사실 참된 신앙과 헌신의 생활의 배후에는 이와 같은 은혜를 깨닫고 은혜에 대한 감사 감격의 마음이 그 마음속에 충만한 것을 우리가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을 꼭 지키라고 명령했는지 압니까?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구원해냈다고 하는 애굽으로부터의 해방을 기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게 하려고 유월절을 꼭 지키라고 그랬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도 왜 감사절을 지키는지 압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잊지 않고 그 은혜를 감사할 줄 알기 위해서 감사절을 지킵니다. 우리가 어느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잊으리 오 마는 특별히 감사절을 기해 한 주간을 감사 주간으로 지키는데 여기 주보에 있는 대로 매일 성경 보면서 우리 가정에서 감사의 예배를 꼭 드립시다. 그 동안 기도해 보지 못한 가정이라도 이 주간에는 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온 가족이 예배를 드립시다. 그래서 오는 주일날 감사절을 당해서 우리가 다 나와서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향하여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우리의 영혼을 스스로 깨울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960년 11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