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순절묵상

사순절 묵상(22)

새벽지기1 2017. 4. 10. 07: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3:3)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 이야기는 여러 가지 점에서 특이하다. 이 이야기가 공관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이어지는 4장의 사마리아 여자 이야기도 공관복음서에 나오지 않는다.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자 이야기는 초기 기독교의 신앙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다. 그런데도 공관복음서가 이를 전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 이야기가 당시에 광범위하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요한복음 기자가 이 정보를 어디서 얻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다. 다만 우리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 두 이야기가 주로 초기 기독교와 유대교의 갈등을 배경으로 한다는 사실이다.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시작된 시점은 아무도 모른다. 요즘 교회를 개척하듯이 기독교가 시작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 경험 이후로 그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자기들끼리의 모임을 시작했다. 구성원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유대교를 떠나서 기독교로 개종할 생각이 없었고, 그럴 필요로 없었다. 유대교 안에서 나사렛파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지금 우리 눈에는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당시에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유대교 당국에서도 이들을 굳이 배척하지는 않았다. 사도들을 비롯한 예수 추종자들은 여전히 예루살렘 성전을 드나들었고, 회당 모임에도 참가했다. 바울도 전도하기 위해서 여러 지역을 방문할 때마다 회당을 우선적으로 찾았다. 초기 기독교가 구약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데서도 이런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 로마에 의해 함락당한 이후에 생겼다. 성전을 잃은 유대인들은 율법 중심의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얌니야 학파가 주도권을 행사했다. 얌니야는 지역 이름이다. 이제 유대교는 자신들과 느슨한 관계를 맺고 있던 초기 기독교, 정확하게 말해서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 기독교에 압력을 행사하여 율법을 철저하게 따르게 했다. 이미 이방 기독교는 유대교와의 관계가 멀어진 상태였다. 요한복음 기자는 유대교의 노골적인 박해에 직면해서 복음을 변호해야만 했다. 그래서 요한복음 앞 대목에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자 이야기를 삽입하였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면서 당시 유대교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 의원이었다. 그가 어느 날 밤에 예를 찾아와서 보기에 따라서 엉뚱하게 들리는 말을 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그가 왜 예수를 찾아왔는지, 예수의 말을 듣고 그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해서 요한복음은 일언반구도 없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마치 선문답 같다. 질문도 아니고 대답도 아니다. 주장도 아니고, 반론도 아니다. 물론 거듭남에 대해서 질문과 대답이 나오지만 그것도 성령의 사람이니, 또는 하늘에 올라간 인자니 하는 말로 끝난다. 그만큼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가 애매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무조건 부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인정할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요한복음 기자가 유대교와의 관계에서 말하려는 핵심은 분명하다. 유대교가 하나님 나라 운운하는데, 기본적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그런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유대인들은 표적을 하나님 나라의 증거로 생각했다. 바울은 고전 1:22절에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고 말했다. 니고데모도 그런 관점으로 예수의 표적을 거론한 것이다. 여기서 표적은 예수가 행한 기적적인 사건들을 가리킨다. 그는 예수에게 상당한 호의를 갖고 있었던 사람이다. 유대교 고위 공직자로서 드문 경우다. 그가 호의를 표시한 표적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아니다. 예수에게 표적은 필요하지 않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표적이 나타났을 뿐이지 표적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한 것은 아니다. 예수도 그런 표적을 요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12:39). 요나의 표적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킨다. 본문이 말하려는 것은 거듭나야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거듭난다는 건 또 무슨 뜻인가? 니고데모는 다시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온다는 말로 알아들었다고 한다. 그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한건 아니다. 자기가 동의하기 어려운 말을 듣고, 그냥 모른척하고 따져 물은 것이다. 예수는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대답했다. 물은 육의 세례이고, 성령은 영의 세례다. 영의 세례가 핵심이다. 육의 세례는 세례 요한의 전통이고, 영의 세례는 예수의 전통이다. 초기 기독교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죄가 용서된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성령 세례라고 생각했다. 그게 바로 거듭남이다. 이런 거듭남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즉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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