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순절묵상

사순절 묵상(24)

새벽지기1 2017. 4. 12. 11:46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를 므리바 물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서 그 거룩함을 나타내셨더라. (20:13)

 

위 구절 민 20:13절에 나오는 여호와와 다투었다.’는 문장은 사실 말이 되지 않는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 다툴 수 있겠는가. 유치원 또래의 아이가 올림픽 복싱 금메달리스트와 싸우는 꼴이다.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다. 상대가 되지 않는 다툼이다. 이 말이 실제로 다툰다기보다는 이스라엘 자손의 불신앙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라는 건 누구의 눈에나 들어올 것이다. 신명기 기자는 왜 이런 표현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 역사적 배경이 무엇인가?

 

성경을 읽을 때 염두에 두어야 할 대목이 바로 그 본문의 역사적 배경이다. 구약은 구약대로, 신약은 신약대로 그 배경이 다 있다. 예수의 말씀도 공중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다. 예수가 유대 혈통으로 태어난 것처럼 그의 말씀도 그런 구체적인 역사적 배경에서 나왔다. 예수는 구약성경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모세 오경과 시편 등을 인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제거하고 순수하게 말씀만 듣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성서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공부가 곧 신학이다. 한국교회에 신학무용론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성경 해석의 토대가 빈약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위 구절이 포함된 민 20:2-13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시절에 벌어졌던 한 이야기를 전한다.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세와 아론에게로 모여드니라.”(20:2). 짧은 한 문장이지만 여기에 고대 유대인들의 애환이 숨어 있다. 대략 지금부터 34백 년 전 광야에서 유목민으로 생활하던 그들에게 물은 생존의 필수 조건이었다. 물이 없다는 것은 곧 죽음을 각오해야한다는 의미다. 최소한의 생존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이들은 노약자들이다. 늙은 부모와 병든 이들, 그리고 어린 자식들이 물을 마실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찾아가 따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떠난 애굽에서의 삶은 최소한 먹고 마시는 것이 보장이 되었다. 나일 강이 그들에게 젖줄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원망했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회중을 이 광야로 인도하여 우리와 우리 짐승이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20:5). 모세와 아론이 곤란했다. 그들은 하나님께 형편을 아뢴다. 하나님은 반석에 명령하여 물을 내서 백성들에게 마시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모세는 백성들에게 뭔가 불만이 있었던 탓인지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다. 일단 물이 솟아나와 백성들이 충분히 마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를 책망하신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니라.”(20:12). 이어서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와 다투었다는 위 구절이 나온다. 출애굽 당시 스무 살이 넘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와 갈렙 만 제외하면 아무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알려져 있다.

 

반석을 지팡이로 두 번 친 모세의 행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책망 받은 근본 원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그렇게들 말한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반석 앞에서 말로 명령을 내리라고 했는데 모세가 하는 성질을 부렸다는 것이다. 병행구인 출 17:1-7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로 반석을 치라고 말씀하셨다. 모세는 그 말씀에 따라서 반석을 지팡이로 쳤다. 이 두 본문을 다른 것으로 볼 수 없다. 동일한 사건이다.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내리쳤다는 사실은 여기서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런 것에 초점을 두면 성경 이야기의 희화화를 피할 수 없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다.’는 말은 훨씬 근원적인 사태를 가리킨다. 12절은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했고, 13절은 여호와께서 스스로 거룩함을 나타냈다고 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것은 지팡이와 상관없이 모세와 아론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다는 뜻이며, 하나님이 스스로 거룩함을 나타냈다는 것은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신뢰할만한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여호와와 다투었다.’는 말이 핵심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번만이 아니라 생존의 위기가 닥칠 때마다 불평했다.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자신들의 기준으로 재단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통치 방식을 자신들의 입맛에 따라서 요구한 것이다. 그 기준에 차지 않으면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거둬들였다. 이런 태도가 바로 여호와와 다투는 것이다. 거꾸로 신앙은 하나님의 자유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이 곧 순종이다.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어울리지 않는 죽음이었다. 가능하면 그런 죽음을 거부하고 싶었다. 거부한다기보다는 피하고 싶었다. 광야에서 물이 없는 상황에 부닥친 이스라엘과 같았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전폭적으로 믿었고, 거기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던 것처럼 십자가의 길을 결국은 받아들였다. 하나님과 다투지 않고 순종한 것이다. 그렇게 인류 구원의 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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