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순절묵상

사순절 묵상(25)

새벽지기1 2017. 4. 13. 07:4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8:12)

 

요한복음에는 빛이라는 메타포가 자주 사용된다. 1:4절은 이렇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이어서, 그 빛이 어둠에 비쳤지만 어둠이 깨닫지 못했다고 한다. 예수가 빛으로 세상에 왔지만 세상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오늘의 묵상구절인 요 8:12절도 예수를 빛이라고 했다. 예수를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는 뜻이다.

 

고대인들에게 실제의 태양빛이 어떻게 경험되었을까? 지금 우리는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으며 지구의 자전운동에 의해서 낮과 밤이 생긴다는 물리적 사실을 알고 있지만 고대인들의 눈에는 그 모든 게 비밀이었다. 따지고 보면 우리도 태양과 그 빛에 대해서 모든 걸 아는 게 아니다. 현대물리학은 빛이 입자인지 파장인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빛의 성질을 완벽하게 파악하는 순간이 온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신비다. 왜 빛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는지는 빅뱅의 근원을 알지 못하는 한 영원한 비밀이다. 어쨌든지 우리에 비해서 태양빛에 대해 아는 게 턱없이 부족한 고대인들도 태양빛에 의해서 일어나는 현상만은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두 가지다.

 

하나는 태양에 의해서 세상이 밝아지고, 밝아져야만 세상을 식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둠에서는 모든 사물이 숨고, 빛에서만 드러난다. 모든 사물은 빛에 의해서만 실제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런 걸 고대인은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다. 빛을 생명의 근원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하나는 태양 빛이 있어야만 모든 식물들이, 또한 이를 먹고 사는 동물들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탄소동화작용에 대한 물리적 현상을 알지 못했지만 태양이 생명현상의 필수라는 것만은 알았다. 태양의 시간이 짧아지는 계절에 식물은 성장을 멈춘다. 다시 길어지는 계절이 오면 식물은 살아난다. 이런 현상에서 태양빛은 결정적이다. 그러니 빛을 생명의 근원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창세기의 창조 전승에 따르면 하나님이 육일 동안 세상을 차례대로 지으셨다. 가장 먼저 지은 것이 빛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나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1:3-5). 창세기 기자의 눈에도 역시 빛이야말로 모든 것의 단초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빛을 어둠과 대립적인 관점으로 본 고대 서양철학의 한 분파가 있었다. 영지주의다. 그들이 볼 때 세상은 빛과 어둠으로 분리된다. 빛의 세력과 어둠의 세력이 대립한다. 사람도 빛에 속한 사람이 있고, 어둠에 속한 사람이 있다. 일종의 선악이원론적인 세계관이다. 영지주의는 초기 기독교 기독교에도 영향을 제법 끼쳤다. 그런 흐름이 기독교 역사에 면면이 이어졌다. 한국교회에서 자주 거론되는 영적 전쟁도 이런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세상을 성령과 악령의 대결로 보면서 기독교인들이 이런 전쟁의 선봉에 서 있는 사람들이라는 주장이다. 그들이 보는 악령은 물론 기독교를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다.

 

신구약 전체를 놓고 볼 때 빛과 어둠, 성령과 악령의 이원론적 대립은 설 자리가 없다. 세상의 악은 독립적으로 자신의 근거를 확보하지 못한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을 맞설만한 악의 실체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악은 분명히 활동한다. 악으로 인해서 벌어지는 불행은 많다. 창세기는 그 악을 뱀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욥기에는 사탄이 등장하고, 예수의 공생애 초기에도 마귀가 등장한다. 예수가 악령을 쫓아냈다는 이야기를 복음서 기자들이 전한다. 이런 것들은 악이 현실로 자리하고 있다는 뜻일 뿐이지 하나님과 동일한 힘으로 맞설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세상 통치자는 오직 하나님뿐이다. 하나님은 악과 적절하게 영역을 나누어서 통치하는 분이 아니다. 악이 어디서 왔는지, 왜 악이 완전히 제압당하지 않는지, 등등의 질문은 여기서 다룰 수 없다.

 

빛과 어둠을 대립적인 것처럼 전하는 요 8:12절이 영지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건 그렇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건 아니다. 표현만 당시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그런 방식으로 한 것이지 정작 전하려는 메시지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곧 예수가 세상의 빛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어둠은 종속 변수다. 어둠 자체가 힘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빛이 없을 경우에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다. 어둠에 빛이 오면 어둠이 물러가지만, 빛에 어둠이 오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상수는 빛이다.

 

예수가 왜 빛인가? 이미 답을 얻었을 것이다. 예수가 생명이기 때문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14:6). 여기서 예수가 우리의 생명인 이유가 무어냐, 하는 질문이 가능한데, 이 대답을 여기서 다시 거론할 수 없다. 다 알기도 하고, 대답에는 많은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중의 한 마디만 한다면 이렇다. 예수를 통해서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다. 죄는 죽음을 불러온다. 예수를 통해서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뜻이다. 예수만이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어 죽음을 넘어서게 했는지를 아는 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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