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순절묵상

사순절 묵상(23)

새벽지기1 2017. 4. 11. 08:43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3:1)

 

3:1절을 새번역 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그러므로 하늘의 부르심을 함께 받은 거룩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사도요,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마틴 루터는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그러므로 하늘의 소명을 통해서 부름 받은 거룩한 형제들이여, 우리가 신앙고백을 바치는 사도이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개역개정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라는 대목이 특별히 그렇다. 한 성경으로 뜻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경우에 다른 번역을 참조하는 게 좋다. 헬라어 성서를 직접 읽는 게 가장 좋겠지만 일반 신자들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목사들에게도 그건 어렵다. 헬라어나 히브리어, 라틴어 성경은 그 언어를 전공한 학자들만 충분히 다룰 수 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처럼 서양 고어(古語)를 대충 아는 목사가 원어 성경을 직접 풀이하고 설교하는 건 섣부른 일이다. 목사라고 하더라도 원어 성경에 너무 집착하지 않는 게 좋다. 학자들의 도움을 받으면 충분하다.

 

히브리서 기자는 수신자들을 하늘의 소명을 통해서 부름 받은 거룩한 형제들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하늘의 소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는 뜻이다. 이런 표현도 아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손에 딱 잡히는 게 아니다.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소명의 진위여부는 자기가 소명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의해서 확인되지 않는다. 그가 소명을 어떻게 살아내는가가 더 중요하다. 소명은 한 순간에 부름을 받은 것에 머물지 않고 삶 전체를 통해서 드러나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은 평생 수행하듯이 살아감으로써 소명을 확증해야 한다

 

거룩한 형제들이라는 표현도 중요하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되었다는 뜻이다. 이것도 겉으로 확연하게 드러나는 건 아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늘 얼굴에 빛이 나거나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구별되지 않은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여기서 구별은 우리의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겉모양으로 사람을 구별하지만 하나님은 속으로 구별하신다. 하나님만이 어떤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하실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기초 교리인 칭의론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인정하신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된 것이다.

 

초기 기독교부터 기독교인들은 서로를 향해서 형제, 또는 자매라고 불렀다. 이런 호칭이 하나의 관례이기도 하지만, 깊은 뜻도 있다. 형제는 인간관계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호칭이다. 형제는 상사관계가 아니라 수평관계다. 물론 형과 동생으로 구분되지만 이걸 수직관계라고 할 수는 없다. 헬라어로 사랑을 가리키는 단어가 세 가지다. 에로스, 필로스, 아가페가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필로스는 형제애를 가리킨다. 에릭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필로스가 모든 사랑의 기본이라고 설명했다. 교회 구성원들은 모두가 형제다. 세상에서 사장과 종업원이라 하더라도 교회에 들어오면 똑같이 형제다. 교수와 학생도 교회에서는 형제들이다. 만약 세상에서의 인간관계가 형제애에 근거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하늘도 놀랄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왜 형제로 살아가지 못하는가?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사건을 본다면 형제애보다 인간의 욕망과 시기심이 더 강렬한 것으로 보이긴 한다. 어쨌든지 초기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서로를 형제로 인식했다는 것은 잘한 일이고 당연한 일이다.

 

위 구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를 두 가지 직책으로 표현했다. 하나는 사도다. 본문 외에 신약성경 그 어디서도 예수를 사도라고 하는 구절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낯선 표현이다. 우리는 보통 예수의 제자들을 사도라고 말하지 예수를 사도라고 하지는 않는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본문은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는 분이라는 뜻으로 사도라고 했다.

 

다른 하나는 대제사장이다. 이것이 히브리서의 기독론이다. 대제사장은 유대교 전통에서 볼 때 일 년에 한 번씩 지성소에 들어가서 유대인 전체의 속죄를 위한 제사행위를 수행한다. 제사 행위는 속죄를 목표로 한다. 동물의 피를 제단에 뿌리는 것이 제사행위의 정점이다. 피는 생명을 가리키며, 피를 뿌린다는 것은 생명을 바친다는 뜻이다. 인간의 죄는 생명을 바쳐야만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직접 죽을 수 없기 때문에 대신 동물을 잡아서 피를 제단에 뿌린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바로 이런 제사 행위의 정점인 피 뿌림 사건으로 보았다. 유대교의 대제사장은 동물의 피를 뿌렸지만 예수는 자신의 피를 뿌렸다. 양쪽은 질적으로 다른 행위다. 이런 점에서 예수야말로 참된 대제사장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그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말했다. ‘바라보라.’는 루터의 번역도 비슷한 뜻이다. 예수에게 집중하라는 말이다. 이게 신앙의 근본이다. 예수가 누군지, 예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이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교회를 다녀도 사람들은 예수보다는 자기에게 관심이 더 많다. 예수에게 일어난 사건보다는 교회 일에 열정을 보인다. 이제부터라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만을 깊이 생각해보자. 신앙의 신비를, 즉 신앙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득음의 경지에 올라간 사람이 소리의 신비를 경험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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