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순절묵상

사순절 묵상(5)

새벽지기1 2017. 3. 13. 07:34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시편 77:1)

 

하나님께 부르짖는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문자만 읽어서는 시편기자의 심정과 생각을 우리가 다 따라갈 수 없다. 언어는 신앙의 실체를 온전히 담아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언어로 인해서 오히려 오해될 수도 있다. 성경의 언어를 전혀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부르짖는다는 것을 실제로 고함을 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또 진정성을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부르짖는다고 해서 그것이 다 옳은 것도 아니다. 아내에게 행패를 부리면서 고함치는 사람도 있고,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밤새 부르짖으면 기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경우를 제외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는다는 것은 소중한 신앙적 태도다

 

18:1-8절에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이야기가 나온다. 과부는 원한을 풀어달라고 재판장에게 매달렸지만, 재판장을 무시하다가 나중에 들어주었다고 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이어서 인자가 올 때 이런 믿음을 보기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18:35-43절에는 예수님이 시각장애인을 고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장면에서도 시각장애인이 더욱 크게 소리 질러예수님의 관심을 끌어냈다. 과부와 시각장애인이 이렇게 부르짖고 소리 지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른 길이 그들에게 없었다는 데에 있다.

 

위 본문에 나오는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는이 사람에게도 다른 길이 없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여주실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2절과 3절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그가 환난을 당해서 하나님을 찾았고 밤새도록 손을 들고 기도했지만 내 영혼이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다.’(2)고 한다. 그는 왜 하나님의 위로를 거절했을까? 하나님의 위로가 아무 소용이 없을 정도로 그의 상황이 절망적이었는지 모른다. 더 나가서 그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고 근심이 되었고, 심령이 상했다.’고 한다. 하나님을 기억하면 마음이 평화로워져야 마땅하지 않는가. 그에게 뭔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분명하다. 그게 뭔지를 우리는 모른다. 다만 그가 영적으로 몸부림을 치고 있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사건을 기억하고, 우리가 거기에 동참하는 절기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에 동참하는 첫 걸음은 십자가에 이르는 그의 운명을 우선 이해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컴퓨터 프로그램에 입력된 인류 구원의 과정을 기계처럼 따라간 게 아니라 자신의 실존을 걸고 자신의 운명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당당히 맞섰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만큼 우리는 사순절 영성의 깊이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체포와 피의자 심문과 십자가 처형이라는 운명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다. 모든 복음서가 똑같이 전하는 내용이다. 기도할 때 몸에서 흘러내린 땀이 마치 피처럼 보였다고 한다. 단순히 자신이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두려워한 것은 아니다. 그런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면 국가를 위해서 죽음을 불사하는 애국자들보다 예수님의 정신세계가 훨씬 뒤떨어진다는 증거다.


십자가 처형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부정당하는 사건이다. 더 나가서 하나님 자체가 부정당하는 사태다. 하나님의 통치가 승리하는 게 아니라 세속의 질서가 승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런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들이닥친 십자가 처형을 피해서 도망갈 수도 없다. 그는 막다른 골목에, 즉 백척간두에 올라서서 기도한 것이다.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의 심정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언제 이런 부르짖음의 경험을 하는가? 지난 평생 동안 이런 경험이 있기나 한 것일까? 각각의 사연들이 많을 것이다. 실연을 당해서, 사업이 망해서, 배신을 당해서 죽어버릴까 하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그런 특별한 불운을 제외하면 대개는 이런 절박한 경험을 하지 않고 산다. 이런 인생을 행복하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이들의 영혼은 오히려 불행하다. 부르짖지 않는 영혼이 어떻게 살아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역설적으로 예수님은 팔복의 말씀에서 가난하고 우는 자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다. 부르짖는 영혼의 소유자들이다. 실제로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영혼만은 부르짖어야만 한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하나님을 아는 사람, 또는 하나님을 직면할 줄 아는 사람은 아무리 행복한 조건에서 일상을 살아간다고 해도 부르짖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직면한다는 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마치 곡예사처럼 동시에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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