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순절묵상

사순절 묵상(3)

새벽지기1 2017. 3. 9. 07:44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9:18)


구약 다니엘의 역사적 배경은 바벨론 포로다. 기원전 587년에 남유다는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패망했다. 유대의 수도인 예루살렘은 초토화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다윗 궁도 허물어졌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노예로 끌려가거나, 귀족들과 지식인들은 포로 신세로 떨어졌다. 다니엘도 그런 포로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가 지식인인 까닭인지 모르겠지만, 바벨론 왕궁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바벨론 제국은 다니엘을 비롯한 사회 지도급 인사들을 바벨론에 동화시키려고 했다. 그게 당시 제국들의 식민지 통치 방식이었다. 이름도 바꾸고, 먹을거리도 바꾸고, 말도 바꿔야만 했다. 물론 종교도 바꿔야 했다. 다니엘은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 보통의 경우라고 한다면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다니엘에게 초자연적인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성서기자는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으로 일어났다고 말한다.


다니엘에는 몇 가지 드라마틱한 에피소드가 나오지만 그게 핵심은 아니다. 그런 서사 사이에 들어 있는 묵시사상이 핵심이다. 구약의 묵시사상은 바벨론 포로 경험에서 시작되었다. 이 세상에서는 그 어떤 희망의 조짐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세상이 완전히 망하고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희망했고, 그렇게 확신했다. 지금 우리가 봐도 이해가 간다. 그들이 처한 상황은 흑암과 같았다. 거기서는 변혁이나 혁명도 불가능하다. 이 세상은 변화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 여기에 기대를 걸 수가 없다. 이런 세상이라면 없어져야만 한다. 박경리의 <토지>에는 토속 관용어나 속담이 수없이 나온다.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사람들은 하늘과 땅이 딱 붙어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세상이 끝장났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바벨론 포로 상황에서 유대인들도 하나님에 의해서 이 세상이 끝장나고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기대했다.


다니엘 9장은 다니엘의 기도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 1-19절까지가 기도이고, 20-27절은 가브리엘 천사가 등장하는 환상에 대한 설명이다. 기도문은 다니엘의 전체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시편의 분위기와 비슷하다. 다니엘을 기록한, 또는 편집한 사람이 다니엘의 기괴스러움을 염려해서 이 기도문을 삽입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지 이 기도문으로 인해서 이제 다니엘은 유대의 보편적 영성과도 소통이 가능한 구약의 한 대목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다.


다니엘의 기도는 예루살렘의 회복을 목표로 한다. ‘주의 얼굴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9:17). 살려달라는 호소요 간구다. 그런데 바벨론이 악하고 이스라엘은 선하기 때문에 자신들을 구해달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의 공의를 의지해서 기도하는 게 아니다.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할 뿐이다. 놀라운 영성이다. 우리는 자신을 합리화하기에 바쁘다.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물론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의 억울함, 자신의 옳음을 말할 수 있다. 시편에도 그런 기도가 흔하다. 그러나 시시비비를 따지는 기도는 그렇게 수준 높은 기도는 아니다. 주의 긍휼에 의지하는 기도야말로 수준이 있는 기도다.


주의 긍휼에 의지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를 전제한다. 자기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집중하는 자세다. 다니엘은 유대인들의 율법 의를 추구할만한 한데도 오히려 복음적인 태도를 보인다. 구약사상이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 여기서도 발견된다. 이미 그 안에 은총 사상이 들어 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토대다. 그래서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을 내가 피할 바위라고 자주 표현했다. 하나님 외의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의 안전한 피난처가 되지 못한다.


본문은 한 걸음 더 나가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19)라고 기도한다. 놀라운 고백이다. 어떻게 보면 뻔뻔스럽다 할 정도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 황폐한 예루살렘을 지켜달라니.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라는 말씀과도 상통하는 기도다. 이런 신앙의 토대에서만 우리는 비굴하지 않게 세상의 권력에 대항하면서 살아갈 수 있지 않을는지.


예수님은 십자가 처형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다고 한다. 가능하면 이런 운명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건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죽음이 두려워서라기보다는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서 자기의 사명이 부정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 나라와 의만을 구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당도했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십자가 처형이라니. 하나님의 나라와 십자가 죽음은 그 어떤 식으로도 연결될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길이 열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 잔을 내게서 물리쳐 달라.’고 기도했다. 자기가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결국은 당신의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참된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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