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순절묵상

사순절 묵상(6)

새벽지기1 2017. 3. 17. 07:36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사순절 기간에 시편은 3일 동안 같은 본문으로 나온다. 19-21일에는 시 25:1-10절이, 23-25일에는 시 77편이 나온다. 오늘의 구약 본문은 욥 5:8-27절이다. 어제의 본문인 욥 4:1-21절과 똑같이 욥의 친구로서 욥을 비판하거나 충고한 엘리바스의 말이다.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통칭하지만 모든 게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다. 예컨대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8:7)는 경구가 겉으로는 은혜로운 하나님의 말씀처럼 들리겠지만 실제로는 함정이 있는 말이다. 친구 빌닷이 욥을 책망하는 말이다. 경구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 빌닷에 의해서 왜곡된 것이다. 이런 구절을 듣기 좋다하여 기독교인의 사업장에 걸어놓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종교 언어는 교언영색에 떨어질 위험성이 크다. 언어 자체가 그럴듯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거기에 속을 수 있다. 설교가 대표적인 경우다. 하나님, 구원, 희망, 믿음, 사랑, 사명감, 헌신 등등의 말씀이 나열된다. 설교자가 오해한 채 설교하더라도 청중들은 그걸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이걸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설교 자신도 그렇고, 청중들도 그렇다. 오늘의 구약 본문인 저 욥기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허튼 소리로 판단 받은 사람 엘리바스의 말이라는 것을 기억해두자.

 

벧전 3:15절은 희망의 이유에 대해서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대답할 준비를 하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희망의 이유는 물론 구원이다. 본문은 기독교인의 영적 실존을 정확하게 짚고 있다. 두 가지다.

 

첫째, 기독교인은 세상으로부터 질문을 받는다. ‘당신들이 말하는 구원이 무엇인지 설명해보라.’고 말이다. 이런 질문을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기독교 신앙은 질문하는 게 아니라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태도는 세상과 단절된 채 자기들끼리만 비밀스럽게 소통하는 밀의종교 유에 속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 교회는 늘 세상과 소통했다. 3:16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해서 독생자를 보내셨다. 세상이 없는 교회는 가능하지 않다. 세상이 말하는 진화론은 창조론에 대한 질문이다. 자본주의는 자본을 우상숭배로 보는 우리의 입장에 대한 질문이다. 예수님이 공생애 시작할 때 받았던 마귀로부터의 세 가지 시험도 결국 이런 질문이다. 우리 기독교인의 실존은 깨어 있는 영성으로 질문 앞에 서는 것이다

 

둘째, 우리가 세상의 질문에 대답을 준비한다는 것은 진리에 개방적이어야 한다는 의미다. 진리는 독단적이지 않다. 기독교의 진리가 따로 있고, 세상의 진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진리는 하나다. 그 진리를 해명하는 방식은 물론 차이가 있다. 자연과학의 방식과 인문학의 방식과 신학의 방식이 다르다. 그러나 진리에 자체에 대한 경험은 분리되지 않는다. 쉬운 예를 들어 물리학은 만유인력을 진리라고 말한다. 신학은 그 만유인력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가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작곡가는 소리의 존재론적 능력을 절대에 대한 경험이라고 말할 것이다. 신학은 그들이 경험하는 그 절대 생명을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어쨌든지 기독교인은 세상의 진리로부터 폐쇄된 성채 안에 숨어서 자기만의 독단에 떨어지지 않고 진리 논쟁에 참여해서 자신의 희망에 대해서 대답해야 한다.

 

우리의 희망인 구원이 무엇인가? 우리 기독교인은 이 질문을 신앙적 화두로 삼아야 한다. 종말이 오기 이전의 세상을 살아야 할 우리는 그 질문이라는 사건에 휩싸여 살아야 한다. 최종적 답은 종말에나 가능하다. 기독교의 대답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의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부활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 부활의 세계는 영생이며, 하나님의 전적인 통치이다. 이런 대답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직 명백한 대답을 얻지 못했다. 이런 대답을 향해서 수행하듯이 길을 가는 게 바로 신앙으로서의 삶이다. 이걸 놓치고 단순히 교회생활에 익숙해지는 것에만 마음을 두고 산다면 희망의 이유에 대해서 설명할 준비를 하라는 베드로 사도의 충고에 충실하지 못한 게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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