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순절묵상

사순절 묵상(4)

새벽지기1 2017. 3. 11. 08:2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9:12)


위 구절은 유명한 경구다. 의사가 필요한 사람은 물론 병든 사람이지 건강한 사람이 아니다. 전후맥락을 빼놓고 읽으면 뻔한 말씀처럼 들린다. 이 경구는 바리새인들과의 논쟁 가운데서 나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 인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곳은 어촌인 가버나움으로 추정된다. 세관이 있다고 하니 경제 활동도 활성화되었고, 이동 인구도 제법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은 세관 업무를 보고 있던 마태에게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다. 제자가 되라는 말씀이다. 처음 본 사람을 부른 것은 아닐 것이다. 이미 마태가 예수님을 몇 번 찾아갔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다른 제자가 마태를 예수님에게 소개한 것일지도 모른다. 마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예수님은 마태의 집에 갔고, 마태는 먹을거리를 대접했는데, 여러 사람들이 그 자리에 함께 한 것 같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9:10)

 

작은 축제와 같은 정경이 떠오른다. 거기 모인 이들은 예수와 제자들,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이다. 죄인들이 누군지 정확하게 거론되지 않았다. 당시 유대 전통에 따르면 이방인들은 모두 죄인들이다. 살인 강도범이나 파렴치범들도 물론 죄인이고, 난치병에 걸린 사람들이나 귀신 들린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요즘 말로 하면 그들은 마이너리티다.


마침 그곳에 바리새인들도 있었다. 그들도 모임의 일원이었는지, 아니면 모임 소식을 듣고 감시하러 잠시 들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들은 제자들에게 예수가 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느냐고 따져 물었다. 이런 일은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의사 운운하신 것이다. 병든 자로 사는 게 좋다는 뜻으로 이 말씀을 이해하면 곤란하다. 세리로 사는 게 좋다는 뜻도 아니다. 바리새인들의 태도에 대한 비판이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판단의 기준으로 여겼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범적인 사람들이라고 확신했다. 물론 그들은 모범적인 사람들이다. 경건했고 성실했다. 당시 유대 사회의 중추라 할 율법 실천에 매진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인정받았다. 남에게 보일만한 업적이 많았다. 이것을 신학 용어로 업적 의()라고 한다. 이런 삶 자체를 비판할 수는 없다. 남에게 본이 되는 삶은 필요하다. 문제는 거기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다른 사람을 자신의 기준으로 재단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본이 될 만한 업적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게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서 오히려 구원의 가능성을 보았다는 생각을 전하고 싶었던 게 아닐는지.


예수님의 생각과 논리가 말이 될까? 억지는 아닐까? 자기 합리화는 아닐까? 예수님의 이 말씀을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하려면 그 말씀에 이은 13절을 읽어야 한다. 거기서 호 6:6절을 인용하셨다. ‘나는 긍휼을 원하지 제사를 원하는 게 아니다.’ 긍휼을 공동번역은 자선으로, 새번역은 자비로 번역했다. 루터는 Barmherzigkeit로 번역했다. 이 독일어 단어는 자비, 연민 등을 가리킨다. 어떤 단어로 번역되었든지 핵심은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을, 또는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을 가리킨다. 역지사지, 또는 측은지심일 수도 있다. 여기서 긍휼이 제사와 대비되었다. 제사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면 긍휼은 사람을 향한 것이다. 예수님이 제사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제사에만 마음을 두고 사람에 대한 연민이 없는 경우를 가리켜 하신 말씀이다.


바리새인들은 연민이 없고 세리와 죄인들은 연민이 많을까? 이것도 개인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 바리새인이라고 모두 율법주의자는 아니며, 세리와 죄인이라고 해서 모든 휴머니즘이 넘치고 연민이 넘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만 본다면 그걸 개연성이 높다. 과부의 마음은 과부가 안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하나님이야말로 우리를 우리 자신보다 더 잘, 더 깊이, 더 연민을 갖고 아시는 분이다. 그게 긍휼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 사람들과 똑같은 고난을 짊어지게 한 것도 그분이 우리에게 베푸신 긍휼이다. 우리가 그분의 긍휼을 받았으니 다른 사람에게도 긍휼을 베풀어야하지 않겠는가. 그런 능력이 우리에게 있을지, 그런 마음이라도 먹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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