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순절묵상

사순절 묵상(2)

새벽지기1 2017. 3. 8. 07:28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시 25:3)


시편은 일종의 기도이자 노랫말이다. 이런 내용의 기도나 노랫말은 책상머리에 앉아 있는 어떤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게 아니라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기도에 이스라엘의 집단 영성이 담겨 있는 셈이다. 그들이 당한 역사 경험을 어느 정도는 알아야 시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애굽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았던 서러움, 광야에서 경험했던 생존의 위기감, 가나안 문명과의 끊임없는 충돌, 주변 제국에 의한 시달림과 패망, 특히 바벨론 포로생활 등이 이들의 역사적 배경이다. 이런 지난한 역사 경험은 사람을 패배주의로 몰아가곤 한다. 개인들도 어렸을 때 당한 쓰린 경험들이 트라우마로 남는 것처럼 말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런 데에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상처가 있는 진주주개가 영롱한 진주를 생산하듯이 놀라운 신앙의 세계를 열었다.


25편은 이런 말로 시작된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단순히 라고 하지 않고 나의 영혼이라고 했다. ‘내가 주를 우러러보나이다.’라고 해도 되는데, 이 사람은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고 한 것이다. 나와 나의 영혼은 동일한가, 다른가. 영혼, 또는 영은 우리가 무슨 말로도 다 표현해낼 수 없는 생명의 심연을 가리킨다. 사람의 정체성이 확보될 수 있는 가장 깊은 차원의 어떤 힘을 가리킨다. 이성이나 지성과는 다르다. 어떤 사태를 파악하고 분석하고 인식하는 것과 다른 역할을 영혼이 한다. 그래서 지성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다.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는 말은 그 어떤 논리나 합리성에 의해서도 훼손되지 않는 깊이에서 하나님을 향한다는 뜻이다. 이런 깊이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세상의 그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을 것이다.


1절의 주를 우러러보는 자3절의 주를 바라는 자는 똑같다. 공동번역으로 3절은 다음과 같다. “당신만을 믿고 바라면 망신을 당하지 않으나, 당신을 함부로 배신하는 자 수치를 당하리이다.” 당신만을 믿고 바란다는 게 간단한 게 아니다. 말은 쉽지만 그렇게 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시편기자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것이지 그렇게 살았다는 말을 하는 건 아니다. 당신만을 믿고 바라려면 하나님이 누군지를, 생명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여기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살아가는데 부족한 게 전혀 없는 사람이다. 늘 배가 부르다. 돈이 많아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소유할 수 있다. 다른 한 사람은 가난해서 끼니를 때우기도 힘들다. 이 두 사람 앞에 각각 밥 한 그릇과 김치가 놓여 있다. 누구에게 이 밥과 김치가 절실한지 답은 분명하다. 배고픔을 알아야 먹을거리의 소중한 걸 안다. 하나님을 바란다는 것은 영혼의 배고픔과 비슷하다. 그런 사람만이 하나님을 찾는다.


하나님만 바라면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나님을 잘 믿기만 하면 세상에서 인생이 잘 풀린다는 뜻이 물론 아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아니 하나님만을 진실하게 믿으면 믿을수록 세상에서 수치를 당할 가능성이 더 높다. 그게 세상의 원리다. 사순절의 중심에 놓여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수치다. 당시에 그것을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제자들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 당신이 고난 받고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말씀을 듣고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뜯어말렸다.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당하는 수치를 실감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세상에서 직접 받는 수치에만 민감하다. 자식들이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좋은 사람과 결혼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만 걱정을 하지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예수 믿는 가정도 비슷하다. 신앙을 세상살이에서 종교적인 위로를 받는 도구쯤으로 여긴다. 하나님에게 수치를 당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마지막 심판이 일어날 때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다. 생명으로부터의 소외다. 종말론적인 부정이다. 그것은 종말에서 확정되지만 이미 지금 여기서도 우리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은폐의 방식으로 우리의 삶이 심판받는다. 그런 심판의 하나가 허무다. 생명의 심연이자 그 중심인 하나님을 배신하는 자는 허무의 늪에 빠진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은 그걸 안다. 자신은 끊임없이 그걸 부정하고, 아닌 것처럼 착각할 수도 있긴 하다. 그러나 언젠가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허무의 공포가 그의 삶 전체를 압도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서가 말하는 지옥불의 실체가 아닐는지.

'좋은 말씀 > -사순절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순절 묵상(6)  (0) 2017.03.17
사순절 묵상(5)  (0) 2017.03.13
사순절 묵상(4)  (0) 2017.03.11
사순절 묵상(3)  (0) 2017.03.09
사순절 묵상(1)  (0) 2017.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