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순절묵상

사순절 묵상(8)

새벽지기1 2017. 3. 20. 15:16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3:25)

 

신약성경 27권 중에서 10권 내외가 바울의 편지다. 바울의 편지는 신학적으로 뛰어나다. 로마서가 압권이다. 전체 주제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다. 그의 입장은 확고하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3:28). 당시 초기 기독교에는 여러 분파가 각축하고 있었다. 토라와 할례를 받아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류였다. 바울은 이들과 반대 입장을 취했다. 그는 로마서에서 반복적으로 율법의 행위를 상대화하고 믿음의 절대성을 강조했다. 토라와 할례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서 복음의 본질이 훼손될 것을 염려한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3:31). 바울의 이런 입장을 정확하게 따라가려면 그의 기독론, 즉 예수가 왜 그리스도인지에 대한 그의 신학적 해명을 들어야 한다. 3:25절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새번역으로 다시 읽어보자.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속죄제물로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피를 믿을 때에 유효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주심으로써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짧은 한 구절에 기독교 신앙의 토대라 불릴만한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우선 하나님께서 예수를 속죄제물로 주셨다고 한다. 이런 발언은 구약의 제사 전통을 배경으로 한다. 유대인들은 여러 모양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속죄제사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죄로 인해서 단절되었기 때문에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제사를 드렸다. 제사 행위는 일종의 종교적 세리모니일 뿐이지 그것으로 인해서 실제로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리가 있는 생각이다. 제사에 주술적인 효능이 있는 건 아니다. 전혀 마음의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다른 이의 강요에 의해서 속죄제사에 참여했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오늘의 예배와 비교해서 생각해보자. 예배는 하나님에 영광을 돌리는 종교적 세리모니다. 여기에도 어떤 주술적인 능력이 있는 건 아니다. 예배를 드린 사람이라고 해서 만사가 잘 되지도 않는다.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배는 다른 차원이 분명히 있다. 예배는 예배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궁극적인 생명을 경험하게 한다. 거룩한 경험이 거기서 가능하다. 바르게 예배를 드리기만 한다면 이 세상에서 그 무엇으로도 얻을 수 없는 기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약의 속죄제사에 바르게 참여하기만 한다면 그는 하나님으로 용서받았다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예수를 화목제물, 또는 속죄제물로 주셨다는 말은 예수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는다는 뜻이다.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이 초보 교리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렇지만 이 사실을 영혼의 깊이에서 인식하고 경험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죄가 무엇인지, 죄의 결과들이 무엇인지, 하나님으로부터 죄가 없다고 인정받는다는 사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예수를 믿어도 사람은 여전히 잘못을 행한다. 실수도 반복한다. 어떤 기독교인은 죄책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다가 우울증에 걸리기도 한다. 거꾸로 죄와 그 결과들에 대해서 무감각해지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가 속죄제물이라는 말은 공허하게 들릴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나타난 사건이라는 뜻이다. 사람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관건이다. 우리는 의로울 수가 없다. 무늬가 세련될 수 있을지 몰라도 실제의 삶이 의로울 수 없다. 사람이 실제로 의롭게 사느냐의 기준만으로 본다면 구약의 속죄제사 행위는 반복되어야 한다. 거기에 기대서 근근이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 이후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의에 기대서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어떻게 하나님의 의인지에 대해서 간단히 짚고 오늘의 묵상을 마치자. 하나님은 본래부터 의로우신 분이다. 의로운 분 앞에 가려면 사람은 자신의 악을 털어내야 한다. 사람은 늘 악과 더불어서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으며, 하나님 앞에 선다고 하더라도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나님은 주로 벌을 주는 분으로 인식되었다. 벌을 피하려면 율법을 철저하게 준수해서 하나님 마음에 들어야만 했다. 그런 방식으로는 아무도 의로워질 수 없었다. 아무도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없었다. 불꽃같은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다른 길은 없다. 하나님이 사람의 죄를 없는 것으로 인정해주는 길이 유일하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의해서 그것이 가능해졌다. 이제 하나님은 사람들의 죄를 징벌하는 의가 아니라 오히려 간과하는 의를 나타내게 된 것이다. 그걸 어떻게 믿느냐고 질문하는 이들에게 여기서 더 설명하기는 어렵다. 다음에 언젠가 좀더 자세하게 설명할 기회가 올 것이다. 믿음의 눈이 있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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