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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이슬람의 공통과 차이점

새벽지기1 2017. 1. 4. 08:29

기독교와 이슬람의 공통과 차이점

newsletter 2014.11.14 23:39

[현재 기독교 계는 물론이고 한국 사회 내에 이슬람(무슬림) 이해에 대한 혼선이 적지 않다. 그래서 오늘은 교통정리겸 기독교계의 이슬람에 대한 최신의 연구를 반영하여 - 기독교와 이슬람을 비교 대조하는 가운데 - 이슬람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간략하게 다뤄보도록 하려 한다. 이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슬람이 정확히 신학적으로, 지형적으로, 대외적으로 어떤 노선을 밟고 있는지를 다뤄보겠다는 의미다.]

1. 교세(distribution)
- 이슬람은 적어도 향후 1-200년 내에는 기독교의 성장을 따라잡지 못할 것.



 
- 범기독교(위)와 범이슬람(아래) 교세 지형도. 오직 기독교와 이슬람만이 미래에 제1·제2의 핵심적인 두 종교로 살아남을 것으로 보임. 그러나 21세기 내에 이슬람의 성장이 기독교를 압도하는 일은 없을 것으로 보임.[각주:1] 

통상적으로 기독교계 내에서 이슬람의 급격한 성장에 대한 근거 없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어 왔다. 그러나 현재 많은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바는 기독교의 성장을 이슬람이 적어도 21세기 내에는 압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각주:2] 위의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남반구에서의 기독교의 성장은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반면에 - 이들의 성장세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 이슬람은 태생적으로 지형적·지리적 한계를 보인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성장에 대해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본적 자세는 그저 그들을 내버려두는 것이다. 이슬람의 성장세는 결코 기독교의 성장세는 압도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낙관적인 전망은 곧 이어서 다루게 될 기독교와 이슬람을 특징 짓는 신학적 정합성을 살펴볼 때 더욱 강화된다.

참고1. 아프리카에서조차 압도적인 기독교의 성장을 보여주는 퓨포럼의 통계적 지표[각주:3]




참고2. 21세기 최대 국가들의 교세 비교. [각주:4]

1. 무슬림이 압도적으로 많은 나라파키스탄, 방글라데쉬,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이란, 예멘
2. 무슬림이 주를 이루고 기독교인이 주요 소수파인 나라 인도네시아, 이집트, 수단
3. 기독교인이 압도적으로 많은 나라 미국 브라질 멕시코
4. 기독교인이 주를 이루고 무슬림이 주요 소수파인 나라 필리핀 콩고민주공화국 독일 러시아 우간다
5. 기독교인과 무슬림 어느 쪽도 다수파가 아닌 나라 나이지리아, 에티오피아, 탄자니아
6. 기독교나 이슬람이 지배적이지 않는 기타 국가 인도, 중국, 베트남, 태국, 일본


2. 신학(theology)
- 왜 기독교의 신학이 우수한가? 기독교의 "부활 논증"이 중요한 이유.

2.1. "부활 논증"

현재 기독교와 이슬람 모두 공통적으로 그것들의 "전통적인(철학적) 변증학"은 쇠퇴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안셀름으로부터 시작한 하나님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ontological argument), 그 뒤를 이어서 아퀴나스의 '목적론적 증명'(teleological argument)과 '우주론적 증명'(cosmological argument)의 세 가지 유명한 <신-존재논증> 모두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에 상응하여 전통적인 세 가지 <신-비非존재논증> 역시 모두 실패한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서는 다음 글 참고 바란다: http://wordspirit.tistory.com/574) 그런데 이런 기독교의 유신론 진영의 변증학 방법론의 쇠퇴는 그대로 이슬람 변증학에도 영향을 미친다. (많은 현대의 이슬람 변증가들은 기독교의 고전적 병증을 그대로 가져다가 쓰고 있다) 이 이유는 간단하다. 이슬람 역시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유신론 전통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슬람의 현재 변증학은 위기에 처해 있다.  지난 몇 세기 동안 그들이 가져다 써왔던 기독교의 '고전적' 변증론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기독교 변증의 상황은 이슬람이나 무신론 진영보다 훨씬 낙관적이다. 그 이유는 기독교 내에 "부활 논증"이라는 "새로운 르네상스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부활 논증"이란 간단하게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지상 사역 기간 동안에 자신의 신성을 주장하며 죽음과 부활을 예고했고 결국 그의 예언대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이다. 최근 모든 기독교의 변증을 종합하면, 결국 그것은 그리스도의 시체가 없어졌으며(빈무덤) 그가 실제로 부활했다는 "부활 논증"으로 압축이 된다. 이 굳건한 공리(axiom)를 중심으로 모든 전통적 변증이 재형성되고 있는 길 위에 기독교의 변증은 굳건히 서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러한 "부활 논증"의 새로운 전환이 기독교 변증을 더 이상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기초 위에만 서 있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신약 성서의 증언을 토대로 한다. 물론 20세기 과격한 "예수 세미나"집단을 비롯해서, 역사적 예수를 폄훼하려는 시도가 있어왔긴 했다. 그러나 이런 가장 강력한 비판자들의 철저한 비평은 역설적으로 기독교가 얼마나 역사적인 종교인지를 잘 드러내 준다. 그래서 현재 기독교에 대한 논쟁은 무신론 진영과 활발하지, 결코 신약학에서 활발하지 않다. 비판의 기세가 완전히 이 분야에서 꺾였기 때문이다.


참고3.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슬람과 기독교의 관점 차이.




2.2. 성서와 꾸란에 대한 상반된 비평

성서와 코란의 역사를 살펴볼 때 - 
특히 신약성서의 경우 - 꾸란과 성서의 역사적 '신빙성'은 서로 비교가 안 된다는 점을 여기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기독교의 성서가 여러 시대에 걸쳐(약 850년간) 여러 사람들이 각기 다른 언어로 쓴 것을 모아둔 것인데 비해, 꾸란은 한 장소에서 한 인물에게 비교적 짧은 기간(610년 이후 23년 간) 동안 한 언어(아랍어)로 계시되어 완성되었다. 또한 꾸란은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예언자 무함마드(570~622)에게 내려지는 것을 그가 그대로 받아 적고 후대에 우스만 이븐 아판(Uthman ibn Affan, ?~656)이 자의적으로 모은 것이다. 이런 문서에 텍스트 내적인 통합성을 기대하는 것은 애초에 무리다. 현재에조차 꾸란은 무함마드에게 계시된 바를 해설이 없이 모은 것이므로, 이것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후세 학자들이 쓴 많은 주석서에 의존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많은 무슬림 중에 꾸란을 실제적으로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현재 한국에도 신뢰할만한 번역된 꾸란이 있긴 있지만, 이들은 이를 꾸란과 동일시하지 않고 "꾸란 주해"(세창미디어)라고 주석서의 개념을 더 강조하고 있는 모습이다.

결국
성서와 꾸란의 역사적 '신빙성'이 비교가 안 되는 것은 - 꾸란의 경우 아예 역사학자들이 역사적 문헌으로조차 꺼리는데 - 시기적으로 전승적으로 전혀 우리가 성서에 비해 꾸란의 증언을 신뢰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의 전승은 실제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뒤, 채 한 세대(2~30년)가 넘어서기 전에 완성된다. 더군다나 마가복음의 매우 이른 초기 전승, 그리고 만약 조작이었다면 마가복음 내에 존재하지 말았어야 할 여러 증언들(후기에 조작되었다면 존재하지 말았어야 할 예수 부활에 대한 여성의 증언), 지어낸 이야기라고 볼 수 없는 매우 구체적인 장소와 이름들. 또한 이와 반대급부로 꾸란에서 나오는 여러 시대착오적 진술들. 이 모든 것들은 성서의 역사적 우수성을 잘 보여준다 하겠다. 꾸란에 대해 결론짓자면, 꾸란이 무함마드 자신에 의해 쓰였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신뢰할만하나, 그 이상의 증언의 효력은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각주:5]

2.3. 순수 신학 논쟁

순수 신학적 논쟁 역시 이슬람의 현실은 암담하다.
최근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E. McGrath, 1953~)는 2009년도에 집필한 "그들은 어떻게 이단이 되었는가"라는 책에서 비교적 온화한 태도로 지금까지의 이슬람의 기독교에 대한 공세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왔음을 잘 지적한 바 있다. 많은 무슬림들이 기독교 신앙에 대한 지식을 꾸란에만 의존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많은 기독교에 대한 이슬람의 비판은 변죽만을 울리고 있을 수밖에 없어왔다. 맥그래스는 여기에 두 가지 핵심 쟁점을 요약한다: a. 삼위일체 교리, b. 그리스도의 신성 교리. 이슬람이 기독교를 적대하는 이 두 가지를 차례로 살펴보면, 약간의 논란이 있을지언정 꾸란은 그리스도인들이 별개의 세 인격, 하나님-예수-"마리아"의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일부 이슬람 학자들은 이러한 묘사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제시하는데[각주:6], 맥그래스는 이러한 경향이 아마도 오늘날 중동이라 불리는 기독교 이단 종파의 영향 때문이 아닐까 하고 추측한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동의할 수 있듯이, 우리는 전혀 성부의 어머니 마리아를 신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마리아에 대한 선호도가 비교적 높은 가톨릭에도 마찬가지다) 
이와 같은 이슬람의 기독교에 잘못된 이해의 문제가 그리스도의 신성 교리에 대한 이슬람의 이해를 살펴볼 때 똑같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제
b. 그리스도의 신성 교리를 살펴보면, 기독교의 삼위일체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꾸란은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신체적인 신의 형상으로 이해하고 예배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 역시 정통 기독교에서 '전혀' 주장할 법하지 않은 주장이기에, 어디서부터 어떻게 기독교에서 대응해야 할지 그 갈피를 잡을 수 없다. 현재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론은 물론이고, 이슬람의 신학은 현재 어떠한 형태로든 그 정합성이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3. 요약(summary), 그리고 기독교가 나아갈 길
- <어떻게 승리>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서, <어떤 승리>를 원할 것인가?


글을 요약 정리하면서, 이 글의 마지막은 좀더 이슬람을 비판적 시각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일단 사실상은 완전히 다른 기독교와 이슬람의 기본적 유사성은 다음과 같다.


1. 기독교와 이슬람교 두 종교는 미래에 다른 종교를 제치고 독보적인 성장을 할 것이다.

2. 말씀에 중심을 두고 있고 어떤 문서에 기초한 종교다.[각주:7] (성서가 아니라) <근본주의>와 <꾸란>의 대립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다. 즉, 기독교의 역사가 성서에 대한 문자주의적 근본주의적 해석을 견지한 시기는 매우 짧았으며, 대부분의 성서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서를 해석한다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3. 종교 문헌의 해석을 두고 많은 분파가 갈린다.
4. 하나님에 대한 유신론적 신관을 지지한다.



그러나 두 종교의 공통점은 여기까지다. 이슬람의 성장(성장률을 포함해서)이 적어도 21세기 내에 기독교의 성장을 넘어서지 못할 것임은 위에서 이미 보았다. 성장세에 관한 한 기독교의 입장에서 한 가지 문제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확장일로에 있는 두 종교 간의 충돌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는 상당 부분 두 종교의 충돌은 각 진영의 근본주의에 의해 촉발된 것이고, 이는 지금도 그렇다. 각 진영의 근본주의는 '이슬람 포비아' 혹은 '기독교 포비아'라는 용어에서 볼 수 있듯이 서로에 대한 섬뜩한 공포심을 전제로 하는데, 이 공포심은 상당 부분 - 특히나 기독교의 입장에서 - 그 근거가 없는 것이다. 현재 가공된 모든 통계는 온갖 음모론에 고무된 특수 기독교인들의 기대에 반하여 기독교에 낙관적인 전망을 제공한다. 기독교의 승리는 이미 정해져 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이길 것인가?" 하는 질문에서 "우리가 어떤 승리를 택할 것인가?"하는 질문으로 넘어가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의 승리가 강압적이고, 제국주의적이고, 승리주의적이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사랑의 지배다. 모든 신학과 신앙과 교파의 영역에서 기독교의 미래는 긍정적이다. 그러면 답은 단순하다. 우리가 힘써 노력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핵심인 '사랑'이 온 세계 만방에 선포되는 것일 것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혹시나 해서 짚어두고 넘어가자.
기독교와 이슬람의 결정적 차이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이러니하게 바로 당사자인 기독교인들 스스로에 의해 쉽게 망각되는 '사랑'이다. 이슬람의 근본 정신이 '사랑일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언어도단일 뿐이다. 아무리 그리스도의 말씀을 급진적으로 해석한다 해도 과연 “적의 목을 치라는 말"[각주:8]이 단 한 구절이라도 신약성서에서 발견되는가. 꾸란의 절대적인 남녀 불평등과 부분적 남녀 평등, "원수를 죽이라"와 "원수를 사랑하라", "기만하는 자"와 "신실하고 약속을 지키는 분", 일부다처와 일부일처,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사랑의 확증. 이 모든 이슬람과 기독교의 차이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만치 분명해 보인다.[각주:9] 기독교 성서가 폭력적이고 야만적이라고 표현하는 현시대의 맹렬한 기독교 비판자들은 그저 온실 속의 화초와 같이 안락한 환경에서만 가상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우리는 이슬람 세계가 전세계의 패권을 잡는 그 날을 상상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