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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대립

새벽지기1 2016. 12. 1. 10:24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대립

 


 

 

[적극적인 비판과 반론을 환영합니다. 내용에 대한 오해나 추가하면 좋을 사항들에 대한 지적도 환영합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환영합니다.]

Ⅰ. 서론

1. 들어가는 말
① "이 대립은, 사람인 우리가,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고 사람은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무엇을 하시는지 계시(啓示)하기를 기뻐하셨으므로 인간에게는 이를 탐구해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할 의무가 있다."
② "이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한 것'인지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것'인지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이 해석의 기본이다."

2. 논점의 정리
넓은 의미의 아르미니우스주의(이하 AM이라 함)는 넓은 의미의 칼빈주의(이하 CV라 함)에서 갈라져 나온 입장이다. AM이 CV로부터 갈라져 나온 것은 다음과 같은 문제 의식들 때문이었다. ① 하나님이 누군가를 반드시 지옥에 가도록 의도 하신다는 생각은 납득하기 어렵다. ② CV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무기력하고 자신의 구원을 위해 힘쓰는 것에 있어 매우 소극적이다. ③ CV는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 이상으로 인간을 비참하고 비열하며 악하고 무능한 존재로 그리고 있다.
CV와 AM 간의 핵심 쟁점은, 구원받는 자와 구원받지 못하는 자의 차이가 누구 때문에 발생하는 것인가에 있다. (ⅰ) 구원의 공로가 누구에게 돌아가야 하는가 하는 점이나 ⅱ) 인간이 홀로 구원을 좌우하는가 하는 점, ⅲ) 구원받지 못한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하는 점은 이것과 별개의 쟁점이다. 이것을 주의해야 한다.) 
  먼저 이 차이가 하나님에 의해 발생한다고 보는 것이 넓은 의미의 칼빈주의다. CV는 누군가는 구원을 받는 반면 누군가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비롯된 차이라고 주장한다반면 이 차이가 인간에 의해 발생한다고 보는 것이 넓은 의미의 아르미니우스주의다. AM은 누군가는 구원을 받는 반면 누군가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인간에 의해 비롯된 차이라고 주장한다CV와 AM은 도르트 회의(1618년)에서 공식적으로 갈라졌다. 이 도르트 회의에서 칼빈주의의 5대 강령이 ① 인간의 전적부패(Total Depravity), ②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③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③ 저항할 수 없는 은혜(Irresistible Grace), ⑤ 견인(Perseverance)으로 확립되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이 다섯 가지가 CV와 AM의 쟁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5가지 보다 더 근본적인 사항들이 쟁점이다.
  그것들은 다음의 여섯 가지다. ① 하나님의 주권 행사 범위, ② 의지의 자유의 내용, ③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지식의 내용, ④ 성경이 말하는 예지(預知)와 선택(選擇), 예정(預定)의 인과과정, ⑤ 하나님의 사랑의 균등성 여부, ⑥ 한번 받은 구원을 상실할 수 있는지 여부가 그 여섯가지다. 이러한 견해 대립이 발생하는 이유는 각 입장의 기본적인 토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CV는 모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기본적인 토대로 삼아 이 논점들을 해석해 나간다. 한편 AM은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를 기본적인 토대로 삼아 이 논점들을 해석해 나간다.

2. 견해대립의 의의 
  이 견해의 대립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실제 신앙생활에 커다란 차이를 가져 오기 때문이다. 십자가 앞에서 감사하는 이유도 달라지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이유도 달라진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역시 달라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간의 입장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달라진다. 실제로 경험을 해보면, 서로 다른 종교를 믿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다. 오히려 양 견해의 공통점으로 이야기 되고 있는 것들은 단지 논리적인 공통점에 불과한 것으로 느껴질 정도다. 다만 오늘날은 어느 교단이든 신학 상실 상태이기 때문에 이 차이를 덜 느끼고 있는 것 뿐이다.
  이것은 순수한 사견인데, 이 두 입장의 대립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어떠한 이미지로서 받아들이고 있는가에 대한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먼저 CV는 하나님을, 신자의 머리 꼭대기에 앉으셔서 모든 것을 완전하게 그러나 인자한 손길로 운행하여 가시는 하나님으로 그린다는 데에 그 특이성이 있다. 반면 AM의 하나님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 계시면서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인자하신 하나님으로 그린다는 데에 그 특이성이 있다. AM은 성인 대(對) 성인의 관계와 유사하게 신인(神人) 관계를 그린다면, CV는 부모 대(對) 자식의 관계와 유사하게 신인(神人) 관계를 그린다.
  AM은, 내가 어떠한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회개하고 '돌아가면' 언제나 나를 맞아 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중점이 있다면, CV는 내가 어디서 뒹굴고 있더라도 나를 '찾아오셔서' 반드시 당신의 품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중점이 있다. 다만 논리적으로 CV에는 이러한 AM의 요소가 함께 존재할 수 있는 반면, AM에는 이러한 CV의 요소가 공존하기 어렵다.
3. 나의 입장
  나는 칼빈주의자는 아니다. 왜냐하면 CV와 AM은 모두 성경에만 최종적인 권위를 부여하는데, 나는 왜 그러해야 하는지를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성경이 우리의 믿음과 생활에 독보적인 권위를 가지는 기준이라면, 나는 칼빈주의의 해석론이 옳다고 생각한다.
  사실 칼빈주의는 많은 사람들의 선입견과는 달리, 꽤 소박하고 단순한 견해다. 칼빈주의에 대한 가장 많은 선입견은 ① 그것이 칼빈이라는 한 사람의 견해일 것이라는 생각, ② 칼빈이라는 인간을 교조화 하고 있는 것일 것이라는 생각, ③ 칼빈은 우중충하고 인간미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 볼 수 없는 엄한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 ④ 칼빈의 신학을 계승한 사람들은 17세기에 스콜라식 논리에 함몰되어 현실이나 감정과 균형을 갖추지 못한 채 밤낮으로 논쟁만을 일삼는 사람들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된 오해는 ⑤ 칼빈주의는 그 사랑 많으신 분의 아름다운 죽으심을,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논리로 얼룩지게 만든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단순하고 소박하며 쉬운 생각이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든 우리는 믿는다.' 이것이 칼빈주의다. '성경이 명백하고 단순하게 말하고 있는 것들을 체계화하고 우리는 그것을 믿는다. 그것이 말이 되는지 여부나, 우리가 납득할 만한 것인지 여부는 그 다음의 문제다.' 이것이 칼빈주의다. 칼빈주의는 따지기 좋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계시에 우리 자신을 철저히 굴종시키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을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이해하고 싶은 대로 이해하는 태도를 철저히 경계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만 내가 보기에 제한속죄론 만큼은 명백한 성경 본문에서 비롯된 해석이라기 보다는 다른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명백한 성경 본문들을 통해 수정이 가해진 견해라는 생각이 든다.)

4. 서술 방식
힘이 닿는 한, 각 견해들을 최대한 명료하게 설명하여 제시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아르미니우스주의는 견해가 다양하기 때문에 가급적 다양하게 제시하였다. 다만, 주장자 별로 견해를 제시하면 논의가 산만해지기 때문에, 논점 별로 주장을 제시하였다.

Ⅱ. 대립이 (있을 수) 없는 부분
① 원인이 무엇인지는 별론으로 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기 이전 시기인)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각 사람의 인생에는 서로 다른 일들이 벌어졌고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하와는 뱀을 만났고, 아담은 만나지 않았다. 아벨의 제사는 받아들여진 반면, 가인의 제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의 인간들에게도 모체에 있을 때부터 벌써 각자의 인생에 똑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심지어 야곱과 에서의 경우에는 태어나기 전부터, 생후에 그들의 인생에 있을 일들이 예고되었다.
②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이 시간에도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 채 육체의 생명이 끝나고 있다는 점이다.
③ 또한, 최소한 구약시대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차별적인 사랑 때문이었는지는 별론으로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다른 민족에게는 허락하지 않으신 당신과의 특별한 교통을 허락하셨다는 점이다.
④ 그리고 신약시대인 지금도, 최소한 이미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것이 '사랑'인지는 별론으로 한다 하더라도) 구원받지 않은 자들에게는 베푸시지 않고 계신 하나님과의 특별한 교통을 허락하고 계신다는 점이다.
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바위나 나무나 염소를 인간과 균등하게 사랑하시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⑦ 어떤 사람들은 네팔의 최하층민으로 태어나게 하시고, 어떤 사람은 1950년대 미국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게 하셨다. 어떤 사람은 600년대에 태어나게 하셨고 어떤 사람은 1400년대에 태어나게 하셨다. 어떤 사람은 여자로 태어나게 하시고, 어떤 사람은 남자로 태어나게 하신다. 어떤 사람은 귀족으로 태어나 살다 죽게 하셨고, 어떤 사람은 일평생 노비로 태어나 살다 죽게 하셨다.
⑧ 본래 우리(카이사르, 도요토미 히데요시, 수달, 멍게, 유대웅, 헨리 8세, 장영실, 크세르크세스, 사자, 토끼, 고라니, 공작, 티라노사우르스, 다이아몬드, 노루궁뎅이 버섯, 구지뽕 나무, 고래상어, 연어, 정이품송, 유틀랜드 반도, 이베리아 반도, 소순다열도, 갈라파고스 제도, 포카혼타스)는 이 우주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으나 일시적으로 존재하거나 했다는 점이다. 본래는 하나님만이 존재하셨고 우리는 없는 것이었으나 지금은 그 분의 의지에 의해 다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부분에 대해서는 CV나 AM이나 이견이 있을 수 없다.

Ⅲ. 주권의 범위

1. 논점의 정리
여기서 말하는 주권이란 그것을 보유한 자의 뜻대로 세상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완전하고 확실하게 통제할 수 있는 힘이다. 일반적인 의미로 하나님께서 주권적이시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권을 행사하지 않으시는(혹은 못하시는) 영역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견해가 대립한다. 좀 더 정확히는 이 창조세계에 어느 한 점이라도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지는 않더라도) 무관하게 작동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논점이다.
2. 성경의 증언 
(1) 사람의 마음에 많은 계획이 있어도 결국 성취되는 것은 여호와의 뜻이다. [바른성경 잠언 19장 21절]
(2) 여호와시여,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며, 그의 걸음을 정하는 것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함을 내가 압니다. [바른성경 예레미야 10장 23절]
(3) 여호와께서 사람의 발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즐거워하신다. [바른성경 시편 37편 23절]
(4)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은 영원하여 거기에 보탤 수도 없고 뺄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그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시려는 것임을 내가 알았다. [바른성경 전도서 3장 14절]
(5)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것들 중 하나라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바른성경 마태복음 10장 29절]
(6)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이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이 더 좋다고 말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재앙을 가져오기 위해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깨뜨리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바른성경 사무엘하 17장 14절]
(7) 이미 작정되었으니,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땅 가운데 행하실 것이다. [바른성경 이사야 10장 23절]
(8)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말씀하신다. "내가 계획한 그대로 반드시 이루어지며, 내가 작정한 그대로 될 것이다. 내가 아시리아를 내 땅에서 부수고 내 산에서 짓밟을 것이니, 그 때에 그 멍에가 그들에게서 떠나고 그 짐이 그의 어깨에서 벗겨질 것이다." 이것이 온 땅에 대해 정해진 계획이며, 이것이 모든 민족을 향해 펼쳐진 손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계획하셨으니, 누가 그것을 무산시킬 수 있겠느냐? 누가 그 손을 거두어들일 수 있겠느냐? [바른성경 이사야 14장 24절 ~ 27절]
(9)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 부음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앞으로 올 통치자의 군대가 성읍과 성소를 파괴할 것이니, 그 마지막은 홍수에 덮일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을 것이니, 황폐하게 될 일이 작정되었다. [바른성경 다니엘 9장 26절]
(10) 이는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인간들의 왕국을 다스리시고, 그분께서 원하는 자에게 그것을 주시며, 또 가장 낮은 사람을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사람들이 알게 하려는 것이다. [바른성경 다니엘 4장 17절]
(11) 그분은 땅의 모든 거민들을 없는 것같이 여기시고 하늘의 군대나 땅의 거민들에게 자신의 뜻대로 행하시나 누가 그분의 손을 막거나 그분께 '무엇을 하십니까?'라고 말할 사람이 없다. [바른성경 다니엘 4장 35절]
(12)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행하시는 그분의 의도대로 [바른성경 에베소서 1장 11절]
(13) 그분께서 인류의 모든 민족을 하나로부터 만드시고 그들을 온 땅 위에 살게 하셨으며, 그들이 사는 때와 거주지의 경계를 정하셨는데 [바른성경 사도행전 17장 26절] 바울은 자신이 이미 선포한 하나님의 주권 ─ 천지의 주재(행 17:24) ─ 의 본질을 더욱 구체적으로 명시하려는 목적으로 여기서, 하나님은 세상 민족들이 존재하는 연대와 거주하는 지리적 경계를 정하셨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적 주관을 분명히 한다. 어떤 민족이 존속할지, 또 각 민족이 얼마 동안 존속할지, 각 민족이 존속하는 각각의 무대에서 소유할 영토를 정확히 얼마나 차지할지 미리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뜻을 민족들이 성취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역사사 얼마나 많은 왕과 군대들이 다른 민족들의 영토를 정복하기 위해 세워졌는지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 하나님은 작은 자와 큰 자 곧 왕의 결정과 백성들의 뜻을 주관하셔야 한다. 하나님은 전체 국민이 고안하고 창줄하고 발전시키는 것을 엄밀하게 알고 주관하셔야 한다. 하나님은 국민의 재정력과 군사력을 주관하셔야 한다. 하나님은 폭동과 혁명과 반동을 규제하셔야 한다. 요약하면, 하나님은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기."(행 17:26) 위해 세상 민족들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적폭적으로 주관하셔야 한다. 그렇다. 하나님은 (역사의 전체시기를 망라하므로) 주권적이고, 하나님의 주권은 (모든 세부 사실을 계획하고 규제하므로) 철저하고 엄밀하다. [브루스 웨어,『더 큰 하나님의 영광』, 표현을 약간 수정함]
(14)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 마음의 뜻은 대대로 지속된다. [바른성경 시편 33편 11절]
(15) 모든 이들 가운데서 모든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같으시다. [바른성경 고린도전서 12장 6절]
(16) 네 원수가 너를 포위하고 큰 공경에 몰아넣어, 네가 여호와 네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네 태의 열매, 곧 내 아들들과 네 딸들의 살을 먹게 될 것이다. 네 가운데서 아무리 부드럽고 고상한 사람이라도 그가 그의 형제와 그 품의 아내와 그 남은 자식들을 향해 살기를 띠고 그가 먹은 자기 자식의 고기를 그들 중 누구에게도 주지 않을 것이니, 이는 네 원수가 네 모든 성문에서 너를 포위하고 곤경에 몰아넣어 그에게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네 가운데 부드럽고 고상한 여자, 곧 고상하고 우아하여 그 발바닥으로 땅을 밟아 보지 않은 여자라도 그 품의 남편과 자기 아들과 자기 딸을 향하여 여자의 눈이 살기를 띨 것이니 [바른성경 신명기 28장 53절 ~ 57절]
(17)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으로 들어오지 못하였으니, 사무엘이 살아 있는 동안 여호와의 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막으셨다. [바른성경 사무엘상 7장 13절]
(18) 이같이 왕이 백성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 일이 여호와게로부터 말미암았으니, 여호와께서 실로 사람 아히야를 통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다. [바른성경 열왕기상 12장 15절]
(19) 그가 제단을 향해 여호와의 말슴으로 외쳐 말하기를 "제단아, 제단아,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아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하는 한 아들이 태어날 것인데, 그가 네 위에서 분향하는 산당의 제사장들을 네 위에 제물로 바칠 것이며,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태울 것이다."하고 [바른성경 열왕기상 13장 2절]

3. 견해의 대립
하나님께서 주권을 행사하지 않으시는(혹은 못하시는) 영역이 있는가에 대해, CV는 그런 영역은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AM 내에서는 견해가 갈린다. ① 어떤 이들은, 하나님은 이 지상의 사건 중 어느 정도는 지배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은 '전체적인' 목표를 달성하시는 것에만 개입하시고, 구체적인 사건 모두를 당신의 뜻대로 하시지는 않는다고 한다. 이들은 하나님이 주권을 행사하지 않으시는 영역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자유롭게 주권을 행사하실지 여부를 선택하시는 것이므로,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그 부분에 있어서도 주권적이시라고 주장한다.
  ② 또 다른 이들은 하나님 혼자서는 이 지상의 어떤 사건도 일으키실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을 설득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르도록 시도해 보시기는 하지만, 하나님도 어떤 사건이 구체적으로 발생하게 될지를 그 사건의 발생 이전에는 알지 못하신다고 한다. 

4. 적극적 · 소극적인 이성적 근거
① AM 내의 ①설을 취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에너지 곧, 대뇌가 작동할 수 있는 힘은 하나님 밖에서 공급된다고 보는가?

5. 적극적 · 소극적인 성경적 근거
6. 검토


Ⅳ. 인간이 가진 의지의 자유의 내용

1. 논점의 정리
많은 사람들이, CV는 인간이 가진 의지의 자유를 AM과 같은 것으로 보면서도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주장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CV에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의지의 자유의 개념 자체가 AM과 다르다.

2. 성경의 증언 
(1) 하나님은 인간 역사 속에 일어나는 만사에 대해 주권자가 되시므로, 우리는 인간의 자유의 본질을 하나님의 주권과 양립되는 범주 안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가르치는 성경은 동시에 인간의 의지의 본질에 대해서도 가르치기 때문에(창 45 : 4~8; 창 50 : 20; 사 10 : 5 ~19; 합 1 : 6 ~ 17; 행 2 : 23; 행 4 : 27~28; 롬 9 : 6~26), 우리는 양자가 서로 모순 되지 않도록 이해해야 한다. 양자가 어떻게 하나로 결합되는 지를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그러나 양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 진리라는 것, 양자는 하나로 결합될 때 양립한다는 것을 우리는 처음부터 예상하게 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에 대한 가르침을 포함하여 성경의 모든 가르침의 통일성, 신실함 그리고 일관성에 대한 이해를 추구해야 한다. 인간의 의지의 본질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가르침과 일치될 필요가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력한 가르침과 부합되는 범주 안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한 마디로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의 주권과 양립해야 한다. 즉 철저하고 엄밀한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자유를 발휘하게 하는 실제적이고 참된 방식과 양립해야 한다.  [브루스 웨어,『더 큰 하나님의 영광』]
(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모든 인생들을 살펴보신다. 그분은 그 계신 곳에서 땅의 모든 거민들을 주목하신다.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다 지으시고, 그들의 모든 행사를 헤아리신다. [바른성경 시편33편 13절 ~ 15절]
(3) 내가 그들을 완고한 마음대로 버려두어 자기 뜻대로 행하게 하였다. [바른성경 시편81편 12절]
(4) 모든 이들 가운데서 모든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같으시다. [바른성경 고린도전서 12장 6절]
(5)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시기를 "보아라, 그의 모든 소유를 네 손에 맡길 터이나,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마라." 하시니, 사탄이 여호와 앞에서 떠나갔다. [바른성경 욥기 1장 12절]
(6) 헤스본 왕 시혼은 우리들이 그 땅을 지나가도록 허락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여호와 너의 하나님께서 오늘처럼 그를 네 손에 넘겨주시려고, 그의 영을 완고하게 하고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바른성경 신명기 2장 30절]
(7)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그 귀를 막히게 하며 그 눈을 보지 못하게 하여라. [바른성경 이사야 6장 10절]
(8) 이 같이 왕이 백성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말미암았으니, 여호와께서 실로 사람 아히야를 통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다. [바른성경 열왕기상 12장 15절]
(9) 여호와시여, 어찌하여 우리를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우리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주님을 경외하지 않게 하십니까? [바른성경 이사야 63장 17절]
(10)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고 나의 표징과 나의 이적을 이집트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니 [바른성경 출애굽기 7장 3절 ~ 4절]
(11) 바로에게 들어가거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한 것은 [바른성경 출애굽기 10장 1절]
(12)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의 땅에서 내보내지 않았다. [바른성경 출애굽기 11장 10절]
(13) 여호와께서 이집트 왕 바로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셔서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추격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담대히 나아가고 있었다. [바른성경 출애굽기 14장 8절]
(14) 그러나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므로 그가 백성을 보내지 않을 것이니 [바른성경 출애굽기 4장 21절]
(15)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켜 주님의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고, 주님의 종들을 속이게 하셨다. [바른성경 시편 105편 25절]
(16) 이제 백성의 귀의 말하여 남자는 그 이웃 남자에게, 여자는 그 이웃 여자에게 은 패물과 금 패물을 요구하게 하여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으로 이집트 사람의 눈앞에서 은총을 받게 하시고 또한 그 사람 모세가 이집트 땅에서 바로의 신하와 그 백성에게 아주 위대하게 보이도록 하셨다. [바른성경 출애굽기 11장 2절 ~ 3절]
(17) 그들을 사로잡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들이 불쌍히 여김을 받도록 하셨다. [바른성경 시편 106편 46절]
(18)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이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이 더 좋다고 말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재앙을 가져오기 위해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깨뜨리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었다. [바른성경 사무엘하 17장 14절]
(19) 너희를 위하여 디도의 마음에도 같은 열심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바른성경 고린도후서 8장 16절]
(20)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인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인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아 있는 모든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니,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였다. [바른성경 학개 1장 14절] 
(21) 네 원수가 너를 포위하고 큰 공경에 몰아넣어, 네가 여호와 네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네 태의 열매, 곧 내 아들들과 네 딸들의 살을 먹게 될 것이다. 네 가운데서 아무리 부드럽고 고상한 사람이라도 그가 그의 형제와 그 품의 아내와 그 남은 자식들을 향해 살기를 띠고 그가 먹은 자기 자식의 고기를 그들 중 누구에게도 주지 않을 것이니, 이는 네 원수가 네 모든 성문에서 너를 포위하고 곤경에 몰아넣어 그에게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네 가운데 부드럽고 고상한 여자, 곧 고상하고 우아하여 그 발바닥으로 땅을 밟아 보지 않은 여자라도 그 품의 남편과 자기 아들과 자기 딸을 향하여 여자의 눈이 살기를 띨 것이니 [바른성경 신명기 28장 53절 ~ 57절]
(22) 여호와께서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러 나오게 되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전멸시키고 그들이 은총을 받지 못하게 하여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들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바른성경 여호수아 11장 20절]
(23)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므로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신하였으니 [바른성경 사사기 9장 23절]
(24) 그러나 그들이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바른성경 사무엘상 2장 25절]
(25) 사울도 기브아 자기 집으로 가고, 하나님이 그 마음을 감동시킨 용사들도 그와 함께 갔는데 [바른성경 사무엘상 10장 26절]
3. 견해의 대립
  인간의 의지가 가진 자유의 의미에 대해, CV는 각 개인이 그가 가진 성향에 따라 그가 가장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의지가 자유를 가진다고 말한다. 반면 AM은 인간이 어떤 것을 이미 선택하였다 하더라도 선택하기 이전에는 다른 것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의지가 자유를 가진다고 말한다.
  예컨대, 甲이라는 사람이, a, b, c, d라는 선택지 중에 a에 가장 많이 마음이 끌려서 a를 선택하였을 때, AM은 비록 甲이 a에 가장 마음이 많이 끌렸더라도 甲은 그 끌림을 이기고 a대신 b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CV는 甲이 a에 가장 많이 마음이 끌렸다면, b를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CV는 甲이 a가 아닌 b를 선택하는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a를 선택하는 것보다 b를 선택하는 것을 더 좋게 여기는 새로운 동기(예컨대, 항상 a만을 선택하는 甲에 대한 친구 乙의 비난이 생각난다든지 하는)가 추가 되어야 하고, 이러한 동기가 새롭게 추가 될 경우, 甲은 b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 때는 이미 甲에게 있어서 b는 가장 끌리는 선택지로 변경된 것이었으니, 여전히 甲에게는 자신이 가장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CV에 따르면 사람에게 주어진 의지의 자유는 자신이 가장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이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매우 자유롭다고 한다.

4. 적극적 · 소극적인 이성적 근거
① 행위자는 가장 강한 욕구에 따라 하나의 선택을 하게 된다. … 가장 강한 성향과 그 결과로서 행해지는 선택의 원인은 각 사람에게 존재하는 요소들에 반응하는 그의 본성이다.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은 일단의 요소와 상황들이 형성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 이것을 아심으로써 하나님은 특정한 상황이 주어졌을 때 우리가 하게될 선택을 아실 수 있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각 사람의 본성을 완벽하게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 본성이 그들에게 주어진 특정한 조합의 요소에 어떻게 반응할지 알고 계신다. … 도덕적 행위자의 본성 속에 주어진 상황 속에서 가장 강한 성향을 일으키는 복합적인 요소들을 주관하심으로써, 하나님은 효과적으로 행위자가 행하는 선택과 행동을 규제하실 수 있다. … 어느 경우든 하나님은, 행위자가 자유롭게 다른 선택을 하도록 상황을 바꾸심으로써막으실 수도 있었던 선택을 허용하시거나 허용하실 수도 있었던 선택을 막으시거나 하심으로써 행위자가 행하는 것에 대해 절대적이고 완전한 통제력을 갖고 계신다. [브루스 웨어,『더 큰 하나님의 영광』]
② 행위자는 행동할 때 당연히 그만한 이유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만일 행위자가 실제로 행한 일(즉 이유에 의해 정확히 그렇게 되는 일)과 다른 행위를 할 수도 있었다고 가정하면, 그로 하여금 그렇게 행하도록 만든 어떤 이유가, 다른 것을 행할 수도 있게 만드는 이유와 차이가 없다는 결론이 따라 나온다. 더 간단히 말하면, 구체적인 선택의 이유가 없어도 우리가 행하는 소위 '자유로운' 선택이나 행동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모든 '자유로운' 선택과 행동들은 무차별적인 것이 되고, 왜 우리가 그것을 선택하고 그렇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기초가 없어진다. [브루스 웨어,『더 큰 하나님의 영광』]
③ AM이 주장하는 의지의 자유 개념은 직관적으로는 그럴 듯하지만, 실제로 인간이 무언가를 선택하는 과정에 대입해보면 매우 많은 난점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④ 순수한 사실과 지식에 대한 모든 기억과 생각의 떠오름을 주관하는 것은 누구인가? 우리가 A라는 사실을 접할 때 그것이 (우리가 노력을 한 경우든 하지 않은 경우든) 암기되거나 암기되지 않게 하는 차이를 불로오는 것은 무엇인가? AM도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대답말고 다른 대답을 찾는 것이 가능한가?
⑤ AM에서는, 위의 예시에서 甲이 a를 선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b를 선택할 수 있었다면 무엇이 b를 선택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지(무엇이 甲에게 그러한 힘을 제공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여야 한다.
⑥ 우리의 의지가 행동으로 산출되기 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인지 → 정동(情動) → 의욕 → 실행의 과정을 거친다. 그 어떤 의지의 산출도 이 과정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런데 인지는 지각과, 회상, 떠오름에서 비롯된다. 이것을 사람이 조금이라도 주관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전적으로 인간의 소관 밖의 일이다. 이에 대해서는 "떠올림"을 예로 들며 반론을 펼 수도 있으나, 이것은 어떤 '실행'행위에 속한다. "떠올림" 이전에 어떤 인식에 의해 떠올려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 결과로서 행하게 된 어떤 실행에 속한다. 떠오름과는 구별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관하신다. 이 과정을 보면 알겠지만 우리의 모든 세세한 의지를 하나님이 주관하신다고 해서 우리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전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논리는 전혀 조작적이지 않고 당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CV의 의지의 자유 개념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우리의 직관상으로는 AM의 의지의 자유 개념이 당연한 듯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직관상으로만 그렇다. 깊이 생각을 해보면 전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모두 여호와께서 만드셨다."
5. 적극적 · 소극적인 성경적 근거
6. 검토

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지식의 내용

1. 지식의 종류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지식은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에 대한 지식을 말한다. 이 지식은 시간과 관련하여서 세 가지로 구분된다. ⓐ 첫째로, 이 세상에서 실제로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이 세상에서 발생할 수 있었던(could) 사건에 관한 하나님의 지식이다. ⓑ 둘째는 실제로 발생하게 될(will) 일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이다. ⓒ 셋째는 실제로 주어지게 될 조건과는 다른 조건이 주어졌을 경우에 발생하게 될 일(would)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이다. 하나님이 ⓑ를 가지고 계시다고 볼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대립한다. (ⓒ를 중간지식이라 부르곤 하는데, 일반적으로 중간지식이라고 하면, 아르미니우스주의에서 말하는 무차별적 자유의지 개념과 결합된 중간지식을 의미하기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있어, 여기서는 일부러 '중간지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2. 성경의 증언
①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분명히 알아라. 네 후손이 그들의 소유가 아닌 땅에서 나그네가 될 것이며, 종이 되어 사백 년 동안 고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섬기는 민족을 내가 심판할 것이며, 그 후에 그들이 많은 재산을 가지고 나올 것이다. 너는 장수하다가 네 조상들에게 평안히 가서 묻히게 될 것이다. 네 후손은 사대 만에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다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른성경 창세기 15장 13절 ~ 16절]
②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서 말하였다. "너희는 모여라. 훗날에 너희에게 일어날 일을 내가 너희에게 말하겠다." [바른성경 창세기 49장 1절]
③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보아라, 너는 네 조상들과 함게 누울 것이나 이 백성은 일어나 자신들이 들어가 살게 될 그 땅의 이방 시들을 따라 음행을 할 것이며, 그들이 나를 버리고 내가 그와 맺은 내 언약을 깨뜨릴 것이다. 그 날에 그들을 향한 나의 진노가 타오를 것이며, 내가 그들을 버리고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숨길 것이니, 그들이 삼킴을 당하고 많은 재앙과 고난이 그들에게 닥칠 것이며, 그 날에 그들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재앙들이 우리에게 닥치는 것이 아니냐?'하고 말할 것이다. …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어오게 한 뒤에 그가 먹고 배부르고 살찌면, 그들이 다른 신들에게 돌아서서 그들을 섬기고 나를 멸시하고 내 언약을 개뜨릴 것이다. 많은 재앙과 고난이 그들에게 닥칠 때에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거로 나타날 것이니, 이는 이 노래가 그들 자손의 입에서 잊혀 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오늘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들어가게 하기 전이지만, 나는 그들이 하려고 하는 그들의 의도를 알고 있다. [바른성경 신명기 31장 16절 ~ 18절, 20절, 21절]
④ 신명기 32장은 이미 이스라엘이 무엇을 행할 것인지를 단정지어 이야기 하고 있다.
⑤ 당신이 오늘 나를 떠나가다가, 베냐민 경계 셀사에 있는 라헬의 무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니, 그들은 당신이 찾으러 갔던 암나귀들을 발견했다는 것과, 이제 당신 아버지가 암나귀에 대한 염려는 놓았으나 당신들을 염려하여 '내 아들을 위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말한 것을 당신들에게 알려줄 것이오. 또 당신이 거기서 더 나아가 다볼의 상수리나무에 이르면, 베델의 하나님께 올리가는 세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니, 한 사람은 염소 새끼 세 마리를 끌고 가고, 한 사람은 둥근 빵 세 개를 가져가고, 또 한 사람은 포도주 한 가죽 부대를 가지고 갈 것인데, 그들이 당신에게 문안하고 빵 두 개를 줄 것이니, 당신은 그 손에서 건네받으시오. 그 후 당신은 블레셋 사람들의 수비대가 있는 하나님의 산에 이를 것이니, 당신이 거기서 그 성읍으로 들어갈 때, 비파와 작은북과 피리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그 산당으로부터 내려오는 선지자 무리를 만날 것인데, 그 때 여호와의 영이 당신에게 강하게 임하시어, 당신이 그들과 함께 예언하며 변하여 딴 사람이 될 것이오. [바른성경 사무엘상 10장 2절 ~ 6절]

3. 견해의 대립
CV는 하나님께서 ⓑ를 가지고 계신다고 주장한다. AM의 경우는 견해가 갈리는데, ① 하나님께서 ⓑ도 가지고 계신다고 주장하는 견해와, ② 하나님은 ⓐ와 ⓒ만을 가지고 계실 뿐, ⓑ는 가지지 못하신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 ③ 다른 일부 견해는 ⓑ를 아는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마음이 어떤 인과관계에 따라 필연적으로 작동해야 하는데, 인간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고 하여,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지식은 ⓐ에 한정된다고 주장한다.

4. 적극적 · 소극적인 이성적 근거
내가 보기에 AM내의 ②, ③견해는 사실상 신성모독이다.

5. 적극적 · 소극적인 성경적 근거
6. 검토

Ⅵ. 성경이 말하는 예지와 선택(내지 예정)의 인과과정
1. 논점의 정리
①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를 예지(foreknowledge)라 한다. 예지(豫知)란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이전에 무언가를 알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알고 계셨다는 말일까? 이에 대해 AM은 복음을 수용하여 구원을 받을 자들을 알고 계셨다는 말로 해석한다. 반면 CV는 하나님께서 ⅰ) 모든 인간이 무가치하다는 것과 ⅱ)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택하실 자들의 구체적인 인격을 알고 계셨다는 말로 해석한다. 정리하면, AM은 구원 받게 될 자들을 알고 계신다는 것이고, CV는 구원할 자들을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② 또한 성경은 곳곳에서 하나님의 선택하심과 예정하심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선택하심이란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이전에 '구원받을 자들'을 선택하셨다는 말이다.
③ 예정은 넓은 의미로 쓰일 때는 이 창조세계에서 발생하게 될 모든 사건들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을 말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예정은 구원과 관련해서는 좁은 의미이다. 구원과 관련해서 하나님은 무엇을 미리 정하셨다는 것일까? 이에 대해 CV는 예정에 선택과 별다른 차이를 두지 않고,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이전에 복음을 수용하고 구원을 받게 될 자들을 미리 정하셨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반면 AM내에서는 예정의 객체를 CV와 동일하게 받아들이는 견해도 있고, 좀 더 이를 세분화하여, 예정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로 하시는 '구원의 방식'을 창세전에 미리 정하신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그런데 예정의 객체를 '구원받을 자들'이라 보든 '구원의 방식'이라 보든 견해의 대립을 풀어나가는데는 별다른 차이를 가져오지 않으므로, 논의의 단순화를 위해 이 글에서는 예정의 객체를 '구원받을 자들'로 보기로 한다. 또한 이러면 예정과 선택은 동일한 것이 되므로, 이 글에서는 예정과 선택을 구분하지 않기로 한다.
(이 때 '천지창조' 이전에 예지와 선택, 예정이 이루어진다는 점에 대해서는 예지예정설, 타락전선택설, 타락후선택설 모두에 있어서 이견이 없다. 다만 일부 현대 신학자들이 이에 대한 이견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참고로 타락전선택설과 타락후선택설의 대립은 이 글에서 다루지 않는다. CV와 AM의 대립과는 크게 관련이 없는 논의이기 때문이다.)
예지와 선택(혹은 예정)이 이루어지는 인과과정에 대해서는 견해가 대립한다.
2. 성경의 증언
(1) 하나님의 정하신 계획과 미리 아심을 따라 내어 주신 그분을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니 [바른성경 사도행전 2장 23절]
(2)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또한 미리 정하셨으니 [바른성경 로마서 8장 29절]
(3)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신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 [바른성경 로마서 11장 2절]
(4)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그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를 쓴다. [바른성경 베드로전서 1장 2절]
(5) 오직 우리가 말하는 것은 비밀 속에 감추어져 있던 하나님의 지혜인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시려고 영원 전에 미리 정하신 지혜이다. [바른성경 2장 7절]
(6)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영원 전부터 감추어져 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지 모두에게 밝히게 하시려는 것이다. [바른성경 에베소서 3장 9절]
(7)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한 부르심으로 부르신 것은 우리의 행위를 따라 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계획의 은혜를 따라 하신 것이다. 이 은혜는 영원 전에 이미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바른성경 디모데후서 1장 9절]
(8)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상을 주께서 내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바른성경 시편 90편 2절]
(9) 나를 위해 정해진 날이 하루도 시작되기 전에 그 모든 것이 주님의 책에 기록되었습니다. [바른성경 시편139편 16절]
(10)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고, 영생을 얻도록 작정된 자들은 다 믿었다. [바른성경 사도행전 13장 48절]
(11) 그분께서 창세전에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분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으며, 그분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우리를 예정하시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의 아들로 받아들였으니, 이는 그분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그분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함을 따라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용서를 받았다. …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행하시는 그분의 의도대로 우리가 예정되어 그분 안에서 유업이 되었으니, … 이 성령이 우리 유업의 보증이 되시니, 이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의 구속을 위한 것이며, 또한 그분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다. [바른성경 에베소서 1장 4절 ~ 7절, 11절, 14절]
(12) 주께서 밤에 환상을 통해 바울에게 말씀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침묵 하지 말고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므로 아무도 네게 손을 대어 너를 해하지 못할 것이니,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바른성경 사도행전 18장 9절 ~ 10절] 
(13) 그가 자기 천사들을 큰 나팔 소리와 함께 보낼 것인데, 그들이 그의 선택받은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바른성경 마태복음 24장 31절]
(14)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고 …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시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 없으며 [바른성경 요한복음 6장 37절, 44절]
(15) 나는 세상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습니다. … 내가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니, 이는 그들이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른성경 요한복음 17장 9절]
(16) 진리에 속한 자는 누구나 내 음성을 듣는다. [바른성경 요한복음 18장 37절]
(17) 너희에게는 천국의 비밀들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으나, 저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른성경 마태복음 13장 11절]
(18)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바른성경 요한복음 10장 27절] 존재론적으로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반드시 듣게 되어 있는 것이지, 내 목소리를 들으면 그 때에서야 비로소 내 양으로 단지 평가해주시는 것이 아니다. AM에서 주장하는 것은 "너는 내 목소리를 들었으니 내 양이라 불릴만한 자격이 있다"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인데, 이것은 성경구절을 정직하게 읽는 태도가 아니다. 수학 시험에서 100점을 받아온 자녀에게 "그렇지 이래야 내 새끼지!"하며 기뻐하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니다.
(19) 나에게는 이 우리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는데, 나는 그들도 인도해야 한다. 그들도 내 음성을 들을 것이고 한 목자 밑에서 한 떼가 될 것이다. [바른성경 요한복음 10장 16절]
(20) 아들과 아들이 계시해 주고자 하는 자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가 누구이신지 알지 못합니다. [바른성경 누가복음 10장 22절]
(21) 이는 내가 광야에서 물을 주고, 사막에 강을 내어 나의 백성, 나의 택한 자가 마시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으니, 그들이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다. [바른서경 이사야 43장 20절 ~ 21절]
(22) 이스라엘 온 백성과 유다 온 백성이 내게 붙어 있어 내 백성이 되고 내 이름을 드러내며, 내 찬양과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 [바른성경 예레미야 13장 11절]
(23) 너희는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고, 왕 같은 제사장들이고, 거룩하 나라이고, 그분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움에서 그분의 놀라운 빛에 들어가게 하신 분의 덕을 선포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으나,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들이다. [바른성경 베드로전서 2장 9절 ~ 10절]
(24)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의 선택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 … 그러면 무엇이냐? 이스라엘은 그들이 찾던 것을 얻지 못하였지만,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는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해졌다. [바른성경 로마서 11장 5절]
(25) 그러므로 내가 택함을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는 것은 그들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는 것이다. [바른성경 디모데후서 2장 10절]
(26)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억울함을 풀어 주지 않고 그들을 오래 버려두시겠느냐? [바른성경 누가복음 18장 7절]
(27)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다. 그러므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 [바른성경 요한복음 15장 19절]
(28)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바른성경 사도행전 13장 17절]
(29)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소하겠느냐? 의롭다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바른성경 로마서 8장 33절]
(30) 그 자식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분으로 말미암아 서게 하시려고 [바른성경 로마서 9장 11절]
(31) 주님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 곧 내 어머니에게 문안하여라. [바른성경 로마서 16장 12절]
(32)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있는 것들을 쓸모없게 하시려고 세상의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바른성경 고린도전서 1장 27절 ~ 28절]
(33)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 곧 거룩하고 사랑하심을 받는 자들 답게 인애와 친절과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어라. [바른성경 골로새서 3장 12절]
(34)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가 택하심을 받은 것을 안다. [바른성경 데살로니가전서 1장 4절]
(35) 그러나 주께 사랑을 받는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로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마땅히 감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희를 처음부터 택하셔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셨기 때문이다. [바른성경 데살로니가후서 2장 13절]
(36)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님과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숙히 명령하니 [바른성경 디모데전서 5장 21절]
(37)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어라,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을 택하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바른성경 야고보서 2장 5절]
(38)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와 나의 아들 마가가 너희에게 문안한다. [바른성경 베드로전서 5장 13절]
(39) 장로인 나는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 자녀들에게 편지를 쓴다. 내가 참으로 너희를 사랑하며,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이들이 그러하니 [바른성경 요한이서 1장 1절]
(40) 택하심을 받은 너희 자매의 자녀들이 네게 문안한다. [바른성경 요한이서 1장 13절]
(41) 초대받은 자들은 많으나 선택받은 자들은 적다. [바른성경 마태복음 22장 14절]
(42) 만일 그 날들이 단축되지 않는다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선택받은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이 단축 될 것이다. [바른성경 마태복음 24장 22절]
(43)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큰 표적들과 놀라운 일들을 행하여, 할 수만 잇으면 선택받은 자들까지도 속이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른성경 마태복음 24장 24절]
(44)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단축해 주지 않으셨다면,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 선택받은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단축하셨다. [바른성경 마가복음 13장 20절]
(45) 그때에 그가 천사들을 보내어,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그의 선택받은 자들을 모을 것이다. [바른성경 마가복음 13장 27절]
(46) 내가 그를 선택한 것은 그가 그의 자식과 그 가족들에게 명령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것을 그에게 이루러 하는 것이다. [바른성경 창세기 18장 19절]
(47)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모신 민족 곧 그분께서 자신의 유업으로 선택하신 백성은 복이 있다. [바른성경 시편 33편 12절]
(48)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셔서 주님의 뜰에 사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바른성경 시편 65편 4절]
(49)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서 말하였다. "너희는 모여라. 훗날에 너희에게 일어날 일을 내가 너희에게 말하겠다." [바른성경 창세기 49장 1절]
(50)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로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는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시어 우리로 그것들 가운데 행하게 하려는 것이다. [바른성경 에베소서 2장 10절]
(51) 그들은 내 백성이 되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줄 것이니, 그들과 그 후손들의 복을 위하여 그들이 항상 나를 경외할 것이다. 내가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고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할 것이며, 나를 경외하는 마음을 그들 속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할 것이다. [바른성경 예레미야 32장 38절 ~ 40절]
(52)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들 속에 새 영을 주겠으며, 그들의 육체에서 돌 같은 마음을 없애고 살 같은 마음을 주어, 그들이 내 율례 가운데서 행하며, 내 법도를 지켜 실행하도록 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될 것이다. [바른성경 에스겔 11장 19절 ~ 20절]
(53) 내 영을 너희 가운데 두어 너희가 내 율례 안에서 행하고 내 법규를 지켜 행하게 할 것이다. [바른성경 에스겔 36장 27절]
(54)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모신 백성은 행복하다. [바른성경 시편 144편 15절]
(55) 하늘과 하늘 위의 하늘,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여호와 네 하나님의 것이지만 여호와께서는 오직 네 조상에게만 마음을 두고 그들을 사랑하셨으며, 모든 백성들 가운데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선택하셨으니 오늘과 같다. [바른성경 신명기 10장 14절 ~ 15절]
(56) 주께서 그 말씀을 야곱에게 알리시고, 그 율례와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알리셨다. 다른 어떤 민족에게도 이렇게 행하지 아니하셨으니, 그들은 그 법규들을 알지 못하였다. 할렐루야. [바른성경 시편 147편 19절 ~ 20절]
(57)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신 대로, 너를 자신의 보배로운 백성이라고 오늘 선포하셨으니, 그분의 모든 명령을 지켜야 한다. 여호와께서 너를 그분께서 지으신 모든 민족들 위에 뛰어나게 하셔서 네가 칭찬과 명예와 영광을 얻게 하실 것이며, 그 분께서 말씀하신 대로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다. [바른성경 신명기 26장 18절 ~ 19절]
(58)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오늘 너를 그분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분께서 네 하나님이 되시려는 것이다. [바른성경 신명기 29장 13절]
(59)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고,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 중에 평화이다. [바른성경 누가복음 2장 14절]
(60) 여호와 그의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예루사람에서 아비얌에게 한 등불을 주시고, 그의 뒤를 이어 아들을 세우셔서 예루살렘을 견고케 하셨다. [바른성경 열왕기상 15장 4절]
3. 견해의 대립
예지와 선택(혹은 예정)이 이루어지는 인과과정에 대해 CV는,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이전부터, 불가항력적 은혜를 베푸심으로써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시는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를 인격적으로 아시는데, 하나님께서 그 자들을 천지창조 이전에 선택하심으로써 그들이 구원을 받게 된다고 주장한다.
  AM내에서는 견해가 갈린다. ① AM 내의 어떤 이들은 인간은 외부의 어떤 간섭도 없이 자신의 자유 의지만으로 복음에 대해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인류 가운데 어떤 자들이 복음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할지를 창세전부터 아셨기 때문에, 이렇게 긍정적으로 반응할 이들을 창세 전에 예정하신다고 주장한다. 결국 이 견해는 ⅰ) 인간의 자유로운 반응, ⅱ) 하나님의 예지, ⅲ) 하나님의 예정(선택)의 질서 정연한 열거다. 이 세 요소들 사이의 순서 파악이 이 이론 이해의 관건이 된다. 다시 말해서, 비록 ⅰ) 인간의 자유로운 반응이 시간적으로는 ⅱ) 하나님의 예지나 ⅲ) 하나님의 예정보다 더 나중에 발생하지만, 논리적 순서의 관점에서는 ⅰ) → ⅱ) → ⅲ)의 순서가 된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이 견해의 두 가지 필수불가결한 명제가 등장한다. 첫째, 하나님의 예정은 자신의 예지에 기초한다<ⅱ)와 ⅲ)사이의 논리적관계>. 둘째 복음에 대한 반응 촉구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간섭에 의해서조차 영향을 받지 않는 온전한 자유가 있음을 보여준다<ⅰ)과 ⅲ)사이의 논리적 관계>. [송인규, 내가 표현을 수정함]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을 창조하시는데, 하나님의 지성으로 장래에 발생할 일들을 알아 보신 결과, 그들 중에 그들의 자유의지에 따라 당신이 베푸시는 구원을 받아들일 자들을 선택하신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복이 많은 사람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복'은 실체적이고 원인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결과를 두고 평가하는데 사용하는 평가적 표현에 불과하다.
  ⅰ) 전지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 은혜를 자시들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로 받아들이기로 선택한 사라들 모두를 알 고 계신다. ⅱ)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예지에 기초해서 그들이 영생을 받도록 예정하신다. ⅲ) 그리고 이와 같이 하나님은 구원을 위해 자신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도 아시며, 이들을 공의롭게 영원한 정죄로 예정하신다. 이것이 바로 고전적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예정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이다.
  이 견해에 따른 예정은 "하나님은 영언 전부터 영원 후까지,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을 믿을 모든 이들을 아들의 형상을 닮도록 작정하시는 것"을 뜻한다.
  ② AM 내의 다른 이들은 인간이 가진 의지의 자유와 예지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예지는 인정할 수 없는 것이라 주장한다. 예정도 말할 것도 없이 양립할 수 없으므로 역시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 
  CV는 논리적으로 예정이 예지에 선행하거나 동시에 이러우지는 것으로 보지만, AM의 경우는 예지가 예정에 반드시 논리적으로 선행한다. AM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종국적으로 구원을 받을지 여부는 하나님의 주권 밖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예정이 선행할 수는 없고, 하나님이 당신 밖에 있는 정보들을 미리 아신 다음에, 그에 따라 구원받을 자들을 선택하시고 예정하신다. AM에 따르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베풀어져도 자신의 자유에 따라 그 은혜를 수납한 자만이 구원의 길에 등정하는 것이 되므로, 하나님의 구원 은혜는 구원의 가능성을 확보해 주는 것에 그친다.
4. 적극적 · 소극적인 이성적 근거
① AM 내의 ② 견해는 오늘날 많은 지지를 받고 있으나, 사실상 신성모독이므로, 언급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② AM 내의 ① 견해의 가장 큰 해석상의 문제점은, '선택'을 무의미하게 만든다는데 있다. 성경이 굳이 수십번에 걸쳐 하나님의 (부작위에 대비되는 의미로서의) 작위(作爲)로서의 선택을 언급한 것을 무색하게 만든다. 하나님이 선택이라는 것을 하지 않으셨다 하더라도 선택을 한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게 만든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선택하셨음을 수십번 강조하고 있을 뿐더러, 그로부터 비롯되는 수 많은 당위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쓸데 없는 것을 수십번 반복하고, 그 쓸데 없는 것에 열을 내시고, 그 쓸데 없는 것을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기 바라시는 분으로 생각해야 하는가? 그럴 수 없다. 우리는 선택을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시원적(始原的)인 작용으로서 해석해야만 한다.
③ AM 내의 ① 견해가 말하는 선택은, 하나님에게 다른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측면에서도 선택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이 부분의 논의를 인간이 가진 의지의 자유에서의 논의와 혼동하면 안 된다.)
④ AM 내의 ① 견해의 치명적인 약점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탁자들의 '공로'를 미리 아셨든' 믿음'을 미리아셨든, 그것이 영생과 영벌이라는 어마어마한 차이를 가져 올만한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데 있다.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뜬근없는 기준을 영생과 영벌의 구분점으로 택하신 것이 되어서 하나님의 '선택'은 자의적인 것이 된다. 이러면 AM이 그토록 거부감을 갖는 구원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자의성을 해결하지 못한다. 만약 선행을 기준으로 구원 여부를 가르면 A, B는 구원 받고, C, D, E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고, 믿음을 기준으로 구원 여부를 가르면 B, E는 구원 받고, A, C, D는 구원 받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어떤 기준을 택하시느냐에 따라 A와 E의 구원여부가 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에도) 자의적이신 분이 아니어야 한다는 전제를 고수한다면, 믿음은 구원여부를 가를만한 어마어마한 차이가있는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⑤ AM 내의 ① 견해에 따르면, 논리적으로, 각 개인 설계 이전에 하나님에게 없었던 정보가 하나님께 새로 도입되어 들어옴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이에 따르면 하나님의 지성 바깥에 존재하는 어떤 시원적인 객체를 인정해야 한다. 
⑥ AM 내의 ① 견해는, 하나님의 미리 아심 역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결과물로 만든다.
⑦ AM 내의 ① 견해는, 시종일관, 최소한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구원을 얻는 일에 있어서 만큼은, 하나님 측에서는 모든 사람에 대해 균등한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견고한 전제로 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구원 받는 반면, 어떤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게 되는 그 차이는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⑧ 반면 CV는 구원을 받거나 받지 못하게 되는 차이는, 하나님 측에서 은혜를 차별적으로 베푸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 은혜를 베푸시는 반면, 어떤 사람에게는 이 은혜를 베푸시지 않는 이유는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차이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5. 적극적 · 소극적인 성경적 근거
① 믿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양이 아닌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양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가? 당연히 후자다.
② 양의 소유권은 양의 어떤 내재적 원인과 관계 없이 (내가 계속해서 공로와 원인을 구분하고 있음을 주의하라) 정해지는가 아니면, 양의 어떤 작위에 의해 A의 소유였던 것이 B의 소유가 되거나 반대로, B의 소유였던 것이 A의 소유가 되는가? 당연히 전자다.
③ 복은 자기 밖에서 왔기 때문에 복이다. 그렇다면 복 있는 사람이 율법을 지키는가? 아니면 율법을 지킨 사람이 복이 있는 것인가? 전자다. 율법을 지키는 마음이 있는 것 보니, (이 마음이 너에게서 났을 리는 없고) 하나님이 이 마음을 주신 복있는 자라는 걸 알겠구나. 이 소리다. 너는 율법을 지켰으므로 복이 뒤따를 것이다. 이 소리가 아니다.
④ 또한 복은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복이다.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을 두고 복이라 하지 않는다.

6. 검토

Ⅵ. 하나님의 사랑의 균등성 여부
1. 논점의 정리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분분할 수 있으나, 최소한 사랑이라는 것은 그 객체에 대해 갖는 호의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균등하게 사랑하시는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대립한다.

2. 성경의 증언
①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모신 민족 곧 그분께서 자신의 유업으로 선택하신 백성은 복이 있다. [바른성경 시편 33편 12절]
② 이들은 모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이며, 이것은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 각 사람에게 축복한 것이니, 그가 각자의 복에 따라 그들을 축복하였다. [바른성경 창세기 49장 28절]
③ 주께서 자기 종들의 피를 갚으며, 그 대적들에게는 복수하시지만, 자기 땅과 백성에게는 죄를 용서해 주시기 때문이다. [바른성경 신명기 32장 43절]

3. 견해의 대립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균등하게 사랑하시는지에 대해 CV 내에서는 견해가 갈린다. ① 어떤 이들은 하나님은 선택하신 자들만을 사랑하실뿐, 그 외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② 또 다른 이들은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사랑하시지만, 선택하신 자들에게는 그 이상으로 특별한 사랑을 베푸신다고 주장한다. 균등하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AM 내에서도 견해가 갈린다. ① 어떤 이들은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사랑하시고, 모든 인류에 대해 균등한 사랑을 베푸신다고 주장한다. ② 또 다른 이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균등하게 사랑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적게 사랑하시는 자라 하더라도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시는 정도의 호의는 베푸신다고 주장한다.

4. 적극적 · 소극적인 이성적 근거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피조물에 대해 동등하지 않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풍성함을 훼손시키는 것은 아니다.

5. 적극적 · 소극적인 성경적 근거

6. 검토

Ⅶ. 한번 받은 구원을 상실할 수도 있는지 여부

1. 논점의 정리
이것은 사람이 신앙을 놓아 버리면 신앙이 끊어지는지의 문제다. 어떤 사람이 신앙을 유지하는 거싱 너무 힘들어서 믿음을 놓아 버렸을 때 그는 나가 떨어지게 되는지에 대한 문제다. 이 논점을 다룸에 있어서는 '믿음'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논의를 뒤섞어 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때의 믿음은 구원을 얻는 믿음을 말할 때의 '믿음' 이 아니라, 단순히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무언가를 믿는다고 말할 때 사용되는 의미의 '믿음'이다.

2. 성경의 증언 
① 주께서 나를 주님의 교훈으로 인도하시고, 후에는 나를 영광으로 영접하실 것이니 [바른성경 시편73편 24절]
② 참으로 이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우리의 하나님이시니, 죽을 때까지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바른성경 시편48편 14절]
③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끝까지 붙드신다는 것이 성경적인 사상이다.
④ 한 번 비췸을 받고 하늘의 선물도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자가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오는 시대의 능력을 맛보고 나서도, 타락한 자들은 회개에 이르도록 다시 새롭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바른성경 히브리서 6장 4절 ~ 6절]
⑤ 산들이 예루살렘을 감싸고 있듯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감싸 주실 것이다. [바른성경 시편 125편 2절]
⑥ 내가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고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할 것이며, 나를 경외하는 마음을 그들 속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아니할 것이다. [바른성경 예레미야 32장 40절]
⑦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으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사람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그는 죄를 지을 수 없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났기 때문이다. [바른성경 요한일서 3장 9절]
⑧ 또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시게 하지 마라. 너희가 성령으로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으니 [바른성경 에베소서 4장 30절]
⑨ 나는 너희 가운데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까지 이루실 것을 확신한다. [바른성경 빌립보서 1장 6절]
⑩ 내 양들을 내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니,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을 것이다. [바른성경 요한복음 10장 28절]

3. 견해의 대립4.적극적 · 소극적인 이성적 근거
5. 적극적 · 소극적인 성경적 근거
6. 검토

Ⅷ. 칼빈주의에 대한 비판에 답함
1. 칼빈주의는 결정론이라는 비판에 답함 : 극단적으로, 설사 CV가 결정론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CV가 틀렸음을 말하는 근거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적 진리가 결정론인 동시에, 죄책은 인간에게 돌아가는 것이라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무엇인가?
2. 선택의 교리가 불공평하다는 비판에 답함 : 선택의 교리는 불공평하기 때문에 CV가 틀렸다는 주장은, 모든 인간이 죄악됨에 있어서 동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서로 다른 대우를 하시는 것은 ① 불공평하고, ②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리가 없다는 논법이다.
똑같은 사람들을 똑같이 대우하지 않는 것을 불공평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선택의 교리에는 좀 더 정교하게 고려해야 할 요소가 있다. 선택의 교리가 불공평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의 경우는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이 되어야 하는데,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이 지옥에 가는 것은 본래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라는 점이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선택 교리는 공평의 관점이 아니라, 은혜의 관점에서 판단되어야 한다. 공평의 관점에서 판단하면 부정의 한 것이 은혜의 관점에서 판단할 때는 왜 반드시 정의로운 것으로 변모되는가에 대해서는 (시간이 되면 충분히 답하도록 하겠다) 잘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주님은 그것이 악하지 않다고 답하신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Ⅸ. 결론
AM의 주장은 자유의지, 상과 벌의 전제조건, 계명과 요구가 가능하기 위한 전제조건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을 고수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 관념들을 고수한 채 "영원전 선택"과 "영원전 예지"를 수용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양자를 결합하려는 시도를 하는 이론이다. 자유의지, 상과 벌의 전제조건, 계명과 요구가 가능하기 위한 전제조건에 대한 성경의 견해가 무엇인지 '마음을 비우고' 부지런이 탐구하여 그것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종래에 가지고 있던 관념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말이되는 것이 무엇인지는 차후의 문제다.

Ⅹ. 보론
은밀하게는, 이 논쟁은 주지주의(Intellektualismus)와 주의주의(Voluntarismus)의 대립이기도 하다. 주지주의는 하나님조차 객관적인 진선미를 따르지 않으실 수 없다는 주장이다. 명제 자체의 타당성을 떠나서, 이러한 생각의 문제는 여기서 말하는 진선미가 결국은 인간의 관점에서 납득 가능한 진선미로서 결국은 해석되어 왔다는 점에 있다. 이 주장 자체만으로는 논리적으로 타당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항상 이 주장은 결국 인간의 이해에 하나님의 행동을 끼워맞추는 해석으로 귀결되어 왔다.
그리스도인의 입장은 수정된 주의주의적 입장이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것은 객관적인 진선미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이 점에서 철학자들이 말하는 순수한 주의주의와는 다르다), 우리가 인간인 이상 가질 수 밖에 없게 되는 한계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객관적인 진선미는 언제나 일치한다고 믿는다. 다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객관적인 진선미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의지의 행사를 토대로 객관적인 진선미를 추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객관적인 진선미가 무엇인지 명료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 중에는 이해되지 않는 것들도 많고, 납득할 수 없는 것들도 많이 있다. 핵심적인 신앙의 내용일 수록 더욱 그러하다. 예컨대, 복음전도가 그렇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온 지구의 하늘에 복음과 당신의 하나님 되심을 구름으로 써주신다면, 복음 전도는 하루 아침에 끝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사랑하는 자들을 죽음으로 내 몰아가시면서까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가라고' 명하신다. 성화 역시 그러하다. 우리의 성화는 이땅에서 절대로 완전히 이루어질 수 없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화를 요구하신다. 또한 왜 하필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욕구를 제어하며,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마음껏 즐기고, 마시고, 누리며 만사형통하고 어디가나 잘되는 것이 되어서는 왜 아니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이 모든 것을 '우리의 행복을 위해 주어진 명령'으로서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독교적 주의주의다. 하나님은 행하신 바 옳으시다.
CV는 주의주의의 입장을 따르고 있고, AM은 주지주의의 입장을 따르고 있다. 이 글의 맨 앞에서 제시한 AM의 CV에 대한 문제의식은 주지주의적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CV는 이해가 되든 안되든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걸 받아들인다. 그것이 말이 되는지,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지는 그 다음의 문제다. 배운 것이 없고, 신학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성경을 읽은 것 외에는 없는 사람일 수록 CV의 입장을 취한다.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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