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사도행전

다시 보는 사도행전 (5) (행 3:1-10)

새벽지기1 2016. 12. 15. 07:16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오늘 본문은 함께 읽은 것과 같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다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고친 기적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놀라운 일이죠. 아무도 고칠 수 없는 병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으킵니다.

이것을 지켜 본 사람들이 다 놀랐고 베드로와 요한을 경이롭게 쳐다봤을 것은 너무너 뻔한 일입니다.

그기에 대하여 베드로가 이 사건이 가지는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그 뒷부분에 나와 있습니다.

12절 보시죠.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13 아브라함이삭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라고 설명합니다.

뒷부분의 해명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오신 메시아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부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에 있는 사건은 누구나 다 놀랄만한 기적의 사건입니다.

이 둘 사이에 사실 적지 않은 불협화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 하나로 앉은뱅이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복된 약속일 수 있습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예수 안에 있다, 믿음 안에 있다, 그것은 분명히 무한한 특권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쪽에 너무 치우치면, 예수의 죽음은 약간 우리가 기대하는 굉장한 능력과는 아무래도 조화되지 않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강조하면 거기에는 감수하고 순종하고 희생하는 쪽으로 가니까, 굉장한 기대, 욕심같은 것들은 아무래도 또 함께 자리하기에 어려울 것입니다.

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또 이스라엘 백성의 거부가 이 사건과 연결되어야 하는가? 그것이 오늘 사도행전 3장의 중요한 논제이죠.

로마서 1장에 가면, 사도바울은 복음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무시무시하게 표현합니다.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라고 해서 복음이 능력이라고 증거합니다.

능력! 그러면 예수의 죽음이 먼저 떠오르십니까?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이 떠오르십니까?

아무래도 능력, 그러면 앉은뱅이가 일으난 것이 능력에 가깝죠.

죽으심은 능력으로 보이지 않죠.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기본적으로 아는 복음의 본질적 내용에서 우리의 죄를 속하러 오신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우리가 외면할 수 없고 빼놓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능력` 그러면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사건이 먼저 떠오르지 죽음이 떠오를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도행전의 진행을 보면, 논리적인 진행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의 진행이거든요.

하나님의 일하심을 초대교회의,, 또 그리고 두고두고 하나님이 일하실 모든 교회의 복음의 기본적인 그 내용을 설명하시는 이 사건들을 보면 이해가 가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고 승천하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예수의 부재로 부터 시작을 합니다.

복음서가 예수의 임재였다면 사도행전은 예수의 부재입니다.

그가 승천했지만 더 이상은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대신 성령이 오십니다. 그렇죠?

1장이 예수의 승천, 부재로부터 출발하여, 2장 성령의 임재였죠.

그러나 3장에 기적이 등장을 합니다.

이게 무슨 의미를 갖느냐? 우리 2장할 때, 확인했어요.

성령강림은 요엘서 2장 예언의 성취었습니다.

그 예언은 말세에 관한 예언이었죠.

'말세에 하나님이 그 영을 하나님의 여종과 남종들에게 주실 것이라'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령의 강림은 그 강림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 역사가 그의 강림으로 끝판에 다가와 있다`라는 증거였습니다.

이 세상이 끝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보통 우리가 갖고 있는 자연주의적 이해에서는 허무주의적이고 무상한, 그리고 무한히 반복되는 세상으로 이해하고 있는 세상과 역사에 대하여 충격적인 선언인 것입니다.

세상은 스스로 자존하거나 스스로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작과 끝이 있는데, 그 시작과 끝을 쥐고 있는 주권자가 있다, 하나님이 있다,

라는 얘기를 빼놓고 말세라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 끝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는 인격이 아니며 의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과 역사의 주인이시다, 그가 이 세상을 시작하셨고, 이 세상의 끝을 당신의 계획과 뜻 가운데 작정하고 계시다, 그 끝판을 향한 마지막 증거가 성령임재다!' 이것이 요엘 2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강림의 실제로 초대교회가 체험합니다.

그래서 뭘 확인한다구요?

이 세상은 하나님의 목적과 뜻과 계획의 완성을 향하여 가는 시간이요 과정이다, 이것이 확인됐죠!

그런데 그 끝이 뭐냐?

하나님이 자신이 지은 세계와 자신의 형상으로 만든 인류를 죄 가운데 방치하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창조를 완성하기 위하여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진정한 창조의 완성을 성취하기로 작정하셨다 ! 그래서 예수를 보냈죠.

그러니까 성령의 오심은 종말의 최종적 증거이면서, 그 증거자는 그 종말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 계획의 성취를 말하고 있고, 그 성취를 위하여 예수가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하기 위하여 죽고 부활하셨죠!

이렇게 연결되죠.

그러니까 지금 일어나는 사건은 전부 뭐냐하면, 우리가 본문에서 보는바와 같이 본문에 돌아가시면, '이 사람을 성하게 하고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했데요'

보통 사람을, 정상의 사람을 더 어떻게 초월적인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정상이 아닌 상태에 있는 사람을 정상으로 회복시킨 거죠. 정상으로. 구원이 그거죠.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목표로 지은 인류를 원래의 목적답게 회복하는 거죠.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하는 것이죠.

그래서 <구원>이죠. 구원!

우리가 자초한 멸망과 실패, 사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 우리를 원래의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로, 하나님의 형상의 자리로, 하나님의 영광의 존재로 회복하는 것이죠.

그것이 이 앉은뱅이를 고치는 기적에 들어있는 진정한 촛점입니다.

그러니 우리 주로 얘기하는 능력이 더 가져야 하는 것, 더 되어야 하는 것, 더 욕심내는 것에 관한 능력으로 설명되어 있지 않고,

전정한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정상적인 인간이 되는 것!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에 참여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거죠!

그것이 뭐 능력이냐?!

회복, 우리 요새 많이 쓰는 치유, 이런 식의 무슨 조금 기독교적인 용어이기 보다 심리적이기도 하고, 무슨 미묘한 표현들을 많이 쓰는데, 이것이 능력인 이유는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종말을 얘기하고 예수를 말미암는 구원을 얘기하면 끝에 꼭 뭐가 권면이 됩니까?

회개가 권면이 되죠.

그기에 왜 회개가 등장을 하는가? 주로 첫 번째 이유로는 믿지 않으면, 정상적인 자리에 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약속과 뜻이 성취되는 마지막이 구원의 완성이 아니라, 심판과 멸망과 저주로 갈 수 있다, 하는 것이 우리 잘 알고 있는 구원에 관한 설명입니다. 회개가 촉구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있습니다.

로마서 3장에 가 보시죠.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이거 잘 보세요.

`우리가 범죄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라는 건 하나님의 창조에 원래 목적에서 벗어났다` 입니다.

그걸 회복하기 위하여 그 아들을 보냅니다.

그 아들의 죽음, 그의 피로 우리의 벗어난, 이탈한, 자초한 멸망과 그 심판에서 우리를 구합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서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느냐하면, 사도행전 3장으로 돌아오시면,

 

13 아브라함이삭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죽였도다,,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를 배척했을 뿐만 아니라, 죽여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것을 끝까지 거부하고 외면하고 배척하고 그 종을 죽여버린, 보내신 아들을 죽여버린 자들을, 그들이 한데로 갚지 않고, 우리가 한 걸 고스란히 감수하고 그의 구원의 목적과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그게 능력이라는 겁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능력은 은혜를 빼놓고 얘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런 건 우리 흔히 하는거죠.

"내 말 들으면 이렇게 해줄께" "네가 미흡했지만 성의를 봐서 편들어 주마" 이것도 가능한 얘깁니다.

그러나 "말을 해도 듣지도 않더라, 내가 무엇 때문에 해 주겠냐?" 이것도 늘 있는 얘기고,,

"아니 편을 드는데 바락바락 덤비는데 누가 해주냐? 지 복을 지가 찼는데,," 이건 우리 다 가지고 있는 우리의 정당한 반응입니다.

그걸 하셨습니다. 그게 능력입니다.

뭘 하셨다구요? 우리를 영화로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거부하고 반대하고 발악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하셨습니다.

그게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겁니다. 그기에 나타나죠.

그 사람이 자기가 기대 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는 일을,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라`를 한 겁니다. 

우리 모두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뭘 더 원하십니까? 돈을 더 버셔야겠습니까? 더 건강하셔야겠습니까? 더 높은 자리를 가지셔야겠습니까?

그건 것들과 전혀 상관없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라는 신분과 그 인생을 주십니다.

영원한 영광의 운명을 허락하십니다.

그것이 시작된 표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모든 사람에게 허락된 신약시대의 복이죠.

모든 믿는 자들이 이제는 누리는 복들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이면 누구나 가지는 복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 가시면,

 

18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니
19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20 그들이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 보라고 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21 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게 뭐죠?

정상으로 돌이키는 일을 주께서 하십니다.

신자가 되는 건, 비로소 창조주 하나님 그의 영광과 형상을 입은 신분과 정체성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랑스럽고 얼마나 성취의 인생을 사느냐는 세상적 잣대에 묶여있지 않고,

고급한 영원한 가치의 존재로 살게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윤리적 문제가 아닙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죄 많이 지었습니다'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예수 안에서 하나니의 백성이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자기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써 사는 자유와 특권 속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회개>입니다.

예수가 이미 오셔서 죽고 부활하여 그의 영을 보내사, 이루고 허락하고 우리가 믿어 고백하여 가지게 된, 현실입니다.

그래서 어떤 초월적 성취나 윤리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자꾸만 믿은 것이 안 믿은 것하고 차별화 되지를 않는 겁니다.

윤리적으로 제대로 신자생활을 못하는 것 같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늦췄다 믿을 걸,, 양심의 가책이나 없게,," 그죠?!

그래서 뭐 많은 사람이 이 기도를 한다고 그래요, 실제로.

"갑자기 죽여주지 마세요. 회개할 시간을 주고 죽이세요,," ㅎㅎ 이렇게 어쩌구니 없는 건 없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를 무슨 눈으로 보느냐할 때, 이 능력의 눈으로 봐야합니다.

밖에서부터 온 구원인 겁니다 .

예수로 인한 구원!  내가 같이 있고, 뭘 잘해서 얻은 것도 아니고, 무얼 함으로써 유지하는 자리도 아니고,

이해할 수 없는 우리가 거부하고 우리가 원치 않았던 일을 하나님께서 하신 능력으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가 우리에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참으로 놀아운 일이죠.

예수를 믿게 됐다니, 영생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의 운명을 가지게 됐다니, 거 하루에도 몇 번씩 "이게 말이 되나?" 이렇게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은 참성도십니다. 훌륭한 성도십니다.

다른 것에 이거를 이 크고 비교할 수 없는 이것을, 작은 것과 비교해서 놀라지 마십시요!

아, 여러분들은 기억 못하시겠지만, 625 때, 로스께들,,  러시아에 있는 군인들을 만났는데, 그 아마 보낸 병사들 중에는 상당히 야만스러운 수준의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팔목부터 어깨까지 양 손에 시계를 차고 그러고 돌아다닌, 전리품이고 자랑이고, 이 뭐 좋은 예화가 아닐 수 있지만, 실상은 매우 비슷합니다.

성도들은 양 손에 시계차고 으시대며 걸어다니는 것이 신앙의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흉보자는 게 아니라) 그기에 다른 사람들이 목을 메는데 큰 일나는 겁니다.

그기에 목을 메지 마시고, 우리가 누구인가, 구원이 무엇인가, 능력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받은 자로써의 확인과 감사와 이해가 있어야 된다는 설명을 위해서 예를 드는 겁니다.

마태복음 28장에 가십시다. 예수님께서 승천 직전에 이 말씀을 하시죠. 같은 오늘 맥락에서 짚어 본 중요한 내용입니다.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중요한 건 이겁니다.

땅 끝까지 가라, 제자를 삼으라, 물론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전제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주께서 주시는 명령이요, 항상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 속에서 주어지는데,

우리는 땅끝까지 가는 것이 정복하러 가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정복하듯이 가는 것이 힘을 가지고 큰소리 치고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나와 보니 땅끝까지 떠밀려 갈 수 있다는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신앙생활과 신앙인된 현실에 대하여 늘 마음이 답답하듯이, "이게 예수 믿는 게 맞나? 하나님이 정말 그 아들을 보내신 구원이 이 정도밖에 안되나?" 라는 답답함 속에 있는 것은 정상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에 가면, 메시야에 관한 예언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오셨을 때, 아무도 그를 메시야라고 아마 이해하지 못 할 것이다라는 예언이죠.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놀랍죠?

예수는 영광과 권세로 두르고 오시지 않았답니다.

아무도 그가 그렇게 그렇게 중요한, 그렇게 두려워해야 될 분인 줄 아무도 몰랐답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살면, 여러분이 예수 믿고 사는 일에 대하여 여러분 스스로가 행복스럽지 않고, 주변에서도 "당신은 예수를 믿는다는데도,,예수 믿으면 복받는다는데 왜 그 꼴이야?" 라는 소리를 아마 적잖이 들었을 것입니다.

큰 문제 중의 하나죠.

기도하면 다 된다던데, 선착순에서 밀려서 그러는지, 늘 응답도 못 받고, 그러고 누가 예수 믿는다 그래도 거들떠도 안보고, 핍박이라도 받아봤으면 좋겠는 거예요,, 아무도 뭐,,"네 까짓게 믿든지 말든지"싶고, 나라는 존재가 있는지 누가 아는 것 같지도 않고, 존재감이 없다구요.

예수님께서 그런 모습으로 오셨데요. 놀라운 일이죠.

우리의 거부와 외면과 죽임이라는 방법을 가지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아까 그랬죠.

그 능력이 어떤 가능과 불가능의 효능이나 기술적인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성품과 직결된 용어로 씌여진 능력같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건,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오늘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 일부분인데) 그의 불품없는 성육신, 죽임을 당하시는 그 고난들로 일하신 동일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광과 그 목적을 이루신단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의 하잘 것없음, 실패, 막막함, 한계, 묻혀있는 것같은, 상실된 존재감, 그리고 그 자리같은 것들로 하나님이 얼마든지 능력을 행하신다! 그 얘기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 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 믿는 신자의 특권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어디까지 밀리든 땅 끝까지 쫓겨 갈지라도 내가 너와 항상 함께 있다, 걱정마라! 그렇게 읽으십시요.

여러분을 확인해주는 건 세상이 아닙니다.

세상은 예수를 알지 못했고, 예수를 멸시했고, 그가 세상을 위해서 왔으나 그를 조롱하고 그를 죽여버렸습니다.

죽어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죽음을 받아드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그의 목적을, 그의 신실함을 너무나 충만히 보여주셔서,

우리 예수 믿는 자들로 하여금 어떤 모습, 어떤 자리, 어떤 경우에도 놀라질 수 없는 기독교의 믿음을 증언하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오늘 제가 베드로의 흉내를 한번 내어 이 설교를 마루리짓죠.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

자기 자리를 지켜라!

복된 인생을 살라!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미천한 것, 우리의 볼품 없는 것 우리 인정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식으로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없는 것,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 예수 안에서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떤 자리, 어떤 자리, 어떤 경우, 어떤 모습이든 하나님이 능력으로 축복받고 살아가는 존재인 것을 인정합니다.

그 믿음 갖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우리 인생을 걷게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있는 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고 그 기적도 반복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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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주일예배설교 녹취록 이택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