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사도행전

다시보는 사도행전(6) (행 4:23-31)

새벽지기1 2016. 12. 20. 06:55


23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24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미문에 앉아있던 앉은뱅이를 고쳤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 즐겨 암송하는대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어라` 였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 기뻐 뛰며 하나님을 찬송했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와 요한은 잡혀가죠.

여기가 이제 사도행전에서 분명하게 해두고 싶은 부분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 그 권세가 세상 권세 앞에서는 도무지 힘으로 어떻게 대항을 하지 못합니다.

장로들과 제사장 앞에 잡혀가 4장 18절을 보시면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고 명령하고, 또 21절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줍니다. 그 위협할 수 있다는 건 보이는 세력 속에서는 이 하나님을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자들이 실세인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권세를 가졌으나, 현실 속에서 정치적 실세는 다른 것이었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 두 사도가 초대교회로 돌아와서, 자기네들의 모임에 돌아와서 이 고백을 하죠.

24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과연 그렇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예언되어 있습니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거스려,, 거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렇게 찬송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사실 현실 속에서 잘 납득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권세가 유일한 권세인데 왜 현실에서의 세상 권세가 힘을 써는가? 그리고 그 충돌과 그 대치 속에서 성도들을 긴장과 고통과 핍박 속에 놓아두시는가? 그건 우리 다 이해 못하는 일이지만, 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세상 권세와 맞서는 세상적인 힘으로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뭐냐?

-그 증거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다- 이거죠.

-예수는 우리의 구세주이신데, 세상은 그를 죽이는 자들이다. 세상과 예수를 믿는 건 우리 둘이 영원히 타협할 수 없는 일이라-

그렇게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럼 왜 하나님께서 큰 권세로 이 일을 하시지 않느냐?

하나님의 권세는 다르다. 죽음으로 부활을 만든다.

-부활을 죽음이 삼켜버리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 죽음을 삼킨다-. 걱정마라,,

증거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죠. 끊임없이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모든 사건과 모든 해석은 그리고 모든 현실과 그기서의 충성의 내용들은 다 예수에 집중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누구냐? 그의 죽음이 뭐냐? 그의 부활이 뭐냐? 여기로 다 집중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않고, 이것을 믿지 않으면 우리는 단번에 권력화하게 됩니다. 금방 그렇게 됩니다. 밤낮 잠실 운동장에서 모이잖아요. 떼거지로 모여가지고 과시하는 거죠. 일부의 가치가 있어요. 

예수 믿는 게 극소수에 해당되는 비밀스러운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인류에게 준, 결국 모든 인류를 향한 뜻이다하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나 죄란 교묘한 것이라서 선하고 진실된 명분과 실천 속에도 따라 들어오니까 늘 조심해야 됩니다.

많이 모이면 그것으로 이기고 싶어집니다. 그것으로 이기고 싶어진다고요,, 그렇게 안하신다는 것이죠. 마태복음 16장으로 가시면, 교회는 커다란 권세를 받은 것으로 되어있는데도 우리는 늘 그 권세에 대하여 늘 오해하고 별로 감격하지 않는

것이 보입니다.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교회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이 반석 위에 이 교회를 세우리니 이 교회가 천국열쇠를 가져서 교회가 매면 하늘에서도 매고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권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가장 중심이 되는 근거, 그 본질적 권세는 뭐죠? 이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고백 속에 있거든요. 예수는 하나님의 그 약속한 종이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 사실! 예수가 누구이시며, 예수라는 이름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전능하심과 영광과 권능과 신실하심으로 찾아오신 성육신 속에, 교회가 근거를 가집니다. 그리고 그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고백 속에 교회가 있습니다. 정치권력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부분에서 늘 개인의 신앙현실에서나 자기가 몸 담고 사는 시대에서 늘 늘 오해합니다.


교회들이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준다 라는 말이 있고 펄펄 뛰는 일이 있습니다. 왜 그러시죠? 뭐가 그렇게 분하세요? 뭐가?

그렇게 해서 내 짐을 안지겠다는 거죠. "너희 잘 해라 그래서 내 좀 편하게 해다오" 그건 안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고백 속에 있지 않으면, 무엇으로도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다른 안전장치도, 다른 방법도, 다른 선택도 없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 로 가지 않으면 은과 금이 큰 문제가 되죠. 그게 이어지는 사도행전 5장 1절에서 11절까지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인 것입니다. 자 거리가기에 조금 더 보죠. 천국열쇠를 쥐며 (뭐가 이기지 못한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합니다. 이 권세가 등장하는 이유가 뭘까요? 흥분하지 말고 ,, ^^ 누가복음 4장에 가 보시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예수님의 시험입니다.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 무슨 싸움일까요? 세력의 싸움이 아닙니다. 세상을 누가 가지느냐의 싸움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케 하기 위하여 오십니다. 사단과 누가 더 힘이 센가를 증명하러 온 것이 아니고,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가 증명하는 일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그건 무슨 누가 덤빌 수 있는 일도 어떻게 바뀔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창조주십니다. 역사와 우주와 인생과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무슨 핑계를 댈 수도, 상상할 수도, 무슨 대안을 찾을 수도 없는 엄연한 진리입니다. 그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를 그가 목적하신대로 완성하시려고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사단이 뭐라고 그러는 건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단을 이렇게 시험을 합니다. "내게 절하면 이 세상 만물을 네게 주겠다" "사단아 나는 너랑 싸우러 오지 않았다 모든 사람으로 하나님을 경배케 하려고 왔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며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으로 너희를 다시 부르러 왔다 내 백성들을 찾으러 왔다" 그 싸움을 계속 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이 이 싸움입니다.

하나님을 외면하며 거부하며 반대하며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찾아오신 예수, 그를 못 박은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죽음의 자리에 당신을 맡기신 예수, 그리하여 이루어 낸 하나님의 구원과 복주심을 만민에게 펼치시는 일, 이것이 예수가 하신 일이요, 교회에 맡긴 일입니다.


교회에 맡긴 일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자기 길을 가는 것과 다른 길을 갑니다. 이것이 늘 충돌적입니다. 왜요?

세상은 죄가 다스리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묶여있는 꼴을 보지 못합니다. 그것이 핍박의 일입니다.

모든 것을 들어 공격을 하죠. 뭐든지 들어서 공격을 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안전이죠. 안전!

"너 그렇게 살면 죽어" 이 이게 제일 무섭죠. 자식들 한테 늘 했던 거,,

"너 따위로 하면 어떻게 먹고 살려고 그래?" 이게 아마 그 공갈의 한 가지일 겁니다.

"너 사람은 그렇게 사는 것 아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을 이렇게 뭉뚱거려서 얘기하지 말시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십시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란다!" 이렇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십시요.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렇게 가르치십시요.

그 일들을 우리가 우리 삶 속에서 싸우는 것이죠.

예수의 권세가 우리에게 교회에게 어떻게 주어졌는가? 다시 확인하십시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최종적 궁극적 권유와 뜻과 약속과 성취가 하나님 손에 있고, 그것이 실패될 수 없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음을 뒤집은 부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사도행전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

이것이 모든 사건의 배경에 있고, 근거에 았고 설명과 해석의 유일한 증거로 등장을 합니다.

그렇게 사셔야 합니다. 그게 교회입니다.

잘 난 척 할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교회는 안 그래,," 이런 값싼 증거입니다.

"우리 목사님은 훌륭해" 이런 것으로 떼우지 마시고 여러분 스스로가 모두와 함께 하는 세상, 사탄이 "내게 절하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노라" 라는 위협과 도전 속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를 지켜내는가를 증거해서 살아내라 말입니다.

왜 일부만 아멘을 할까요?

그래서 사도행전 5장에 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봅니다.

이 무슨 싸움일까요?

 

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7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9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10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처음으로 교회라는 이름이 등장을 합니다)
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무슨 사건일까요?

`헌금 떼어 먹으면 죽는다` 그런 사건일까요?

 그렇죠. 그렇습니다. 훨씬 깊은 이유가 있죠.

아까 누가복음 4장에서 본 바와 같은 사단의 시험이었으며 위협이었죠?

`온 세상 만물이 내 것이니라 내게 절하면 네게 주겠노라`

`나는 세상을 탈취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인류의 영혼을 회복시키려 왔노라`

이 둘은 같은 지위에서의 싸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 이시고, 사단을 그를 대적한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 싸움이 아닙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 다만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를 섬기라, 모든 존재와 권세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할 것입니당.

그 일을 묻고 있습니다.

헌금을 한다는 것은, 돈이란 세상 권력의 대표적 성격을 가지는 것이죠.

돈이란 세상 권력의 대표성을 가지는 상징물입니다.

`그것을 마치 그 큰 권세의 일부를 동양하듯이 내는 것은 안된다` 이런 뜻입니다.

"십일조를 떼어 먹으면,, 절반만 내면 안되나?" 이런 간단한 얘기가 아닙니다.

여러분 헌금을 한다는 것은 한국교회가 기복적으로 갖다 뜨는 바람에 많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생겼습니다.

헌금이란 중요한 것이죠.

우리가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발 앞에 놓는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놓는다` 는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예배행위입니다.

중요한 예배행위인데, 이렇게 헌금함을 이렇게 돌이는 것이 예식상 그렇게 멋있지 않아서 우리는 안하고 있습니다.

뭐 주머니를 뒤져서 주섬주섬 꺼내는 꼴이 아니니까,, 그 꼴을 못봐서 안하는 겁니다.

준비 해 오지않고 이렇게 보고 당황해서 할수 없이 인상 써서 지갑 꺼내는 꼴이 보기가 싫어서 그렇게 안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이, 여러분이 헌금을 하고 주일 나오는 자체를 얼마나 큰 문제인지 이해를 못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헌금을 하셔야 됩니다. 십일조를 다 하시지 못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셔야합니다.

"하나님, 제가 믿음이 적어서 이 돈을 다 낼 수 없습니다. 믿음이 좋아지면 다 내겠습니다. 지금은 용서해 주십시요" 그건 괜찮습니다.

-마치 내가 이 헌금을 내서 교회라는 기관이 존속하는 것같이, 전심을 다 바치지 않아도 되는 것같이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게 <아니니아와 삽비라 사건>입니다.

그러니 알아서 하십시요. 앞의 사건들과 연결해 보십시요.

이것도 오늘 나오는 김에, 무기명으로 하지 마십시요. 그건 잘 난척 입니다.

"난 이름 안 걸어" 그럼 맘대로 하십시요. 생명책에 무기명으로 기록해 놓을테니까,,^^ ㅎㅎ 알아서 하십시요! ㅎㅎㅎ

헌금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일에 와서 예배를 본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엄위하신 하나님 존전에 부름을 받아 기쁨과 감사로 나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바쳐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기뻐하는 행위들 입니다.

그리고 무서워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신앙의 얕음과 어린 아이같음으로 인하여 용서하는 것과, 기본적인 신앙의 두려움과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오늘 사건에서 보는 바와 같은 우리가 가진 권세와 그 권세를 통하여 우리의 인생을 바쳐야 한다는 걸 기억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이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이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한 자리 건너서 해설만 하게 됩니다.

편파중계,,그죠? 편파중계,,

자기 편한 얘기하고 자기 맘에 들라고 얘기하고 참여하지 않고 자기 인생을 바치지 않는 것- 아나니아와 삽비라 -,, 알아서 기세요.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온 교회와 이를 듣는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 했다고 합니다.

공포의 문제가 아니고 겁을 주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우리의 신앙고백의 길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고 합니다.

천국열쇠를 네게 주노라하는 큰 권세를 가진 줄 알게 하사 우리의 신자된 자리와 고백과 함께 모인 교회 공동체 책임을 이해하는 무리들 되게 하사 이 말많은 세상 앞에서 우리가 받는 공격들을 예수님이 그리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로 이겨내는 우리의 인생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2.09.02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주일예배 설교 녹취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