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사도행전

다시 보는 사도행전(2) (행 1:15-26)

새벽지기1 2016. 11. 24. 13:09


15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
16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17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18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19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20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21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23 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24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26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성경의 약속들과 그 성취를 분명하게 가르치시고 저들의 궁금증, "하나님의 나라가 이제 완성됩니까?" 하는 질문에 대하여, "그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 있다. 너희는 하나님이 그 완성하실 때까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그리고 승천하셨습니다.

2장에 가면, 성령강림이 있죠.

그러나 그 전에 우리의 기대와 다르게 가롯 유다의 배신으로 생긴 사도 열 두명의 그 자리를 보충하는 맛디아를 뽑는 일을 합니다. 맛디아가 어떤 사람이냐는 전혀 설명이 없고, 그 외에 어떤 역할을 했느냐도 전혀 설명이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에 맛디아를 뽑는 일이 제자들이 행한 제일 첫 어떤 실천이 됩니다.

그 중요성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분부를 수행하기로 결심을 했다는 데에 그 가치가 있습니다.

맛디아라는 사람을 그 열 두 제자 중의 하나로, 사도로 뽑아 전렬을 정비했다, 그런 뜻이죠. 무슨 전렬?

땅 끝까지 이러러 증인이 되는 일을 이제 수행하겠다고 결심하고 그 첫 걸음을 뗐다 그런 뜻입니다.

결정을 한다, 선택을 한다, 하는 것은 자유인만이 가지는 특징적인 권리입니다. 결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에게 굴복하거나 강요되는 일이 아니고, 본인들이 그리 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은 분명히 순종적인 일이기도 했습니다.

주께서 제자들에게 맡기신 일을 감당하기 위하여 한 순종적 행위입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하나의 결정이요, 결심이요, 선택이면서 자유권이기도 합니다.

이 둘을 어떻게 병존시키는가 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기독교인이 된다, 신앙인이 된다, 신앙적인 책임을 진다,

실천한다, 하는 면에서 어떤 이해를 가져야 되는지를 오늘 본문이 가르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가시면, 이런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입니다.

어느 학교인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학교가 이 내용을 가지고는 있습니다.

대학에 가면, 진리, 자유라는 그 구호라 그래야 되는지, 선언이라 그래야 되는지, 고백이라 그래야 되는지,, 진리, 자유라는 것이 어느 학교에나 학문을 하는 기본적인 자세, 혹은 가장 중심이 되는 내용, 목표 같은 것으로 이렇게 새겨져 있습니다.

아마 대학에서 진리라 그러는 것은 학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 성경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에 의하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데, 대학에서 그것이 뭐라그래요,,? 무지목매한 자들을,,,?

무식한 자들을 계몽시키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한다면,

성경은 전혀 그렇게 얘기하지 않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가치를 만드시고 질서를 만드시고, 의미를 창출하시고, 유지하시고, 완성시키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어떤 이론이거나, 이상이거나 규칙이 아니라, 인격인 것입니다. 인격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할 것입니다.

예수가 우리를 자유케 할 것입니다.

예수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 그러면 또 이렇게 생각없이 구하고 매달리고 해서 얻어지는 초월적인 결과물, 방식으로만 갈 수 있는데, 지금 오늘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 속에서 바로 이 문제의 아주 그 분명한 사건 속에서 보여지는 설명을 봅니다. 자유란 가치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며, 그 존재가 그 가치를 행사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그러니까 이어나오는 말씀을 보시면,

 

33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이겁니다.

예수가 없는 사람은 죄의 종입니다.

죄를 선택하지 않고 그 권세 앞에 붙잡혀 있습니다.

죄 밖에 질 게 없습니다. 죄 밖에 질 게 없다는 것은,

예수를 모르면 생명이 없고, 진리가 없고, 의미와 가치를 가질 수도, 만들 수도, 유지할 것도, 물론 완성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헛 되게 살고 있습니다.

열심히 헛되든지, 뭐 성실하게 헛되든지, 정직하게 헛되든지,, 헛 될 뿐입니다.

이게 말하자면 성경이 말하는 자유입니다.

그 자유는 그 가치있는 존재로써 선택권을 가집니다.

의존적이고 누구에게 붙잡혀 있는 정도를 지나, 본인이 자신의 결정을 행사할 권리를 가집니다. 

그 권리는 그가 가진 신분과 가치의 높이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자유라는 것은 결국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라면, 순종이라는 것과는 같이 갈 수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지금 얘기한 대로 자유란, 선택권을 하나의 권리로 가지지만, 선택권이 자유의 본질은 아닙니다. 


본질은 진리입니다.

가치와 생명의 문제입니다.

그것이 비로소 선택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종이란, 이 가치, 이 생명의 근원이시요 주인이신 하나님께 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거기로부터만 가치와 생명이 나옵니다.

그래서 자유란 선택권을 가지면서도 그 선택권은 가치와 생명을 가지지 않고는 존재할 수도 행사할 수도 없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일을 초대교회가 맨 처음 반응으로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인지를, 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가지게 됨과, 부활 생명의 어떤 권세를 그 혜택을 누리는 자, 행사하는 자된 것을 여기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의 뜻을 순종하기로 결정하여 책임을 지기로 합니다.

그러면 이런 일들을 우리가 생각할 때에, 말로만 이렇게 묶여지지만 실제로는 신앙생활을 해 보면,

선택과 순종사이에 늘 그 긴장과 불혐화음이 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교회사 내내 지난 이 천년 동안 교회사 속에서 완전한 교회를 본 적이 없습니다.

교회는 늘 언제나 아무리 훌륭한 교회도 늘 흠이 있고, 실수를 합니다.

교회가 실수를 한다는 건, 교회사에 늘 너무나 명백하게 나타나 있어서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세교회들의 정치적인 부패, 너무나 잘 알고 있고, 종교개혁시대에 보았던 윤리적 부패도 분명히 보았고, 십자군 전쟁 같은 턱없는 실수도 했습니다.

한국교회로 얘기하면, 한국교회 초대교회 1900년대 초에 이미 신사참배를 총회에서 결의를 했습니다.

교회들은 이런 실수를 합니다. 교회마져도,, 개인은 우리 모두가 경험하듯이 더더욱 그러합니다.

남이 안보고 있으니까, 우리 다 소원은 있지만 그만큼 살지 못합니다.

우리가 가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우리의 선택권을 허락하셨으면 우리가 완벽하게 되도록 힘을 주시든가, 선택이 틀리지 않게 해 주시든가, 그렇지 않다면 선택권을 주지말고 그냥 막 확 하시든가,,

그게 이제 고린도후서 12장에 사도바울의 증언에서 이렇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사도바울은 아마 어떤 치명적인 질병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그것은 병 차체의 문제보다 그 병의 증세가 사람들에게 대단히 불쾌하고 거부감을 일으키게 하는 어떤 병이었 것같습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자기자신 개인의 명예나 자존심을 위하여 기도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복음의 사도인데, 개인적인 비호감이 복음에까지 누를 끼칠까봐 주 앞에 세 번 기도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뜻밖에 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였답니다.

현실적으로 풀어볼까요?

지금은 한국교회가 사회적으로 약간 비난도 받고 조롱도 받고 적잖이 협박도 받는 시기가 됐고, 또 실제로 교회 안에 그런 비난을 받을 만한 일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당연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한국교회에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의 증인으로 그 영광된 기관으로 거룩하고 흠없고 모두가 존경하고 감동하게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그냥 그렇게 살아라` 그랬다는 겁니다.

납득이 가십니까?

개인적으로도 이렇게 할 수 있죠.

`하나님 아버지 제가 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너무 초라하게 사니, 저도 괴로울 뿐만 아니라, 예수 믿는다는 이름으로 하나님에게까지 누가 끼치게 생겼으니, 하나님 제발 빌린 돈만은 갚고 죽게 죽게 해 주십시요` ㅎㅎ

`으잉! 넉넉케 하라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그냥 구박받고 살다가 내게 오너라` 이렇게 응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상하죠!?

이게 말하자면 순종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하시는 방법이 너무 신비하고 커서 우리는 알 지를 못합니다.

알 지 못하는 것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2장에 가면,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린도 교회에 전도를 할 때, 사도바울이 무엇때문에 떨었느냐하면, 이것이 하나의 사상, 하나의 이해가 되어서 진정한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나는 것을,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그래서는 안되는, 이해의 내용으로 멈출까봐 제일 떨었답니다.

무슨 교만할까봐 떨었거나 무슨 말을 잘못해서 충분히 설명 못할까봐  떨은 것이 아니고,

이것이 하나의 어떤 내용을 설명하여 납득을 시키는 것일 수 없는 것임을 알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저들을 변화시키기를 위하여 나 자신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가로막을까봐 떨었다,, 그래서 나는 뭐만 알기로 했냐하면, 그리스도와 그의 죽으심만을 알기로 했다!

이거 무슨 뜻이죠?

예수의 죽으심을 이해한 사도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 제자들은 다 너무 놀라서 다 도망갔습니다.

당시 예수를 따르던 군중들도 배신감을 느껴 바라바를 놓아줄 지언정 예수는 죽이라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길로만 하나님은 부활의 문을 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자로서 살 때, 우리가 당황하는 것은, 내가 곧 죽을 것같고, 나를 보는 자들도 함께 그것으로 끝인 것같은 상황들을, 내가 바꿔 놓을려고 애 쓰지 말고 죽으러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길이라는 것을 기억하여, 죽음 다음에 일어나는 부활을 향하여 책임있게 가야된다! 라는 것을 기억하자! 라고 바울이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삶의 가장 중요한 책임과 권세를 누가 갖고 있느냐! 라는 문제이죠!

내가 무얼 해야되며, 누구에게 호소를 해야 되는가?

우린 하나님 앞에 호소 합니다.

그러나 무얼 달라 그럽니까?

세상 것을 달라고 합니다.

그게 뭐 잘못입니까? 그것 자체로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큰 약점이 되죠. 큰 방해물이 되죠.

예수라는 이름을 거론하고 있고, 기독교라는 신앙을 말하고 있지만, 실제적인 권세와 가치의 주인이 세상이라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넘어서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세상이 줄 수 없는 더 큰 것, 보이는 어떤 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자녀로 우리를 부르기 위하여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냈다! 그것은 부활생명으로 가는 영생의 축복이요, 약속이다로 우리에게 보상했고 약속했고 허락했다!

이 이외에 아무것도 더이상은 안 주신다는 것이죠.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못 박히신 것 외에는 기억하지 않기로 하는 것이며,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는 말씀 속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 어떤 오해나 반대나, 또는 주를 위한 열심을 이뤄내기위한 능력이나 성공을 구해야되는 것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고, 책임도 아니고, `내가 약할 그 때에 주께서 강하시다` 는 믿음으로 모든 것을 감수하는 인생을 실제로 살아야 한다! 하는 걸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초대교회는 맛디아를 뽑습니다.

맛디아를 뽑아서 모든 짐을 그에게 떠넘겼다는 얘기도 아니고 맛디아를 뽑음으로써 그가 능력이 있어 모두를 안심시켰다는 얘기도 아니고,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것,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허락된 부활생명을 사는 자들의 기쁜 순종을 선택하고 결정하고 결심했다는 것이죠.

그러면 지금 얘기하는 것같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허락하심에 대한 우리의 순종과 우리의 권리들을 우리가 진심과 최선을 다하는 것과, 하나님이 답하시는 것 양자 사이에서 하나님이 더 주셔야합니다와 내가 더 보상을 받도록 열심히 해야된다라는 것이, 신적 방법의 신비 속에 감춰져 있어서 우리가 알 수 없는 문제라면, 내가 약할 그 때에 강하다로 넘어갈 수 있다면, 그 다음에 남는 것은 뭘까요? 실제로 하는 실패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라는 문제가 나오죠.


로마서 8장 28절,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자, `우리가 약할 그 때에 강하다` 그러면 우리가 열악한 조건 속에 있거나, 열등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했을 때에도 겁을 낼 필요가 없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이미 그것까지 포함한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것이라면, 정작 우리의 실패는 뭐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답니다`

실패하셔도 손해보지 않는답니다.

그게 말이 되는 얘기입니까? 세상에서는 말이 안됩니다. 진 건 진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앙의 여러분의 지난 날을 회고해 보시면, 여러분이 모든 일에 하나님께로 하나님께로 떠밀려 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잘되면 잘되어서 하나님께로 한 걸음 더오고, 안 되면 안되어서 하나님께로 밀려오고 ,

그렇지 않은 자들은, 성공하면 성공해서 하나님을 찾을 일이 없고, 실패하면 실패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도망 갑니다.

안 그렇습니가?

실패를 걱정하지 마십시요.

우리는 완벽해서 하나님 앞에 쓰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부활생명을 허락한 그의 자녀라는 약속과 실제적인 능력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마치 끝난 것같은 과정이 오히려, 무엇으로도 만들어 낼 수 없는 부활의 길이었던 것같이, 우리의 실패와 부족함들은 결단코 하나님의 일과 그의 영광과 그의 자녀로 사는 우리 인생에 맡겨진 하나님의 손길들을 막을 수 없다! 그렇게 성경은 약속하는 것입니다.

`네가 약할 그 때에 강하다, 그래서 네가 약할 것을 자랑하리라`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그러면 됐죠. 그죠?

뭐가 겁이 나십니까? 뭐가 필요하십니까?

더 많은 실수, 더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합니다!

흠 없고 전능하고 잘났고 업적이 무한한 이력서를 쓰면 전화부 만큼 두꺼워지는,, 이런 것 다 필요 없고,,

<예수를 믿습니다! 하나님은 제 아버지 입니다!> 이 안에 다 들어 있다, 라는 것이죠

그래도 왜 얼굴이 안 펴질까요? ㅎㅎ

이 일을 이렇게 말로 하고 이해하고 선언하고 믿고로 부족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맡긴 이 기간이, 신약시대가 아버지께서 정하신 완성의 날까지, 구원의 날을 위하여 보류된 모든 민족을 위하여 보류된 이 기간이 시간과 공간의 기회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시간이고 그것은 땅 끝까지의 공간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1장에 가면, 사도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 속에 자신의 사역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살아 내셔야 됩니다.

고난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마음이 평안하고 마악 감격스럽고 좋아서 미치겠고,, 그런 건 없습니다. 약간 과장법입니다.

있습니다. 잠깐씩 있습니다.

그리고 많이 많이 괴롭습니다.

왜?

세상이 만만치 않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넉넉하게 주시지 않은 현실을 살아야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넉넉함은 우리가 말하는 넉넉함입니다.

건강, 지위, 뭐,, 이렇 것들을 우리가 요구하는데, 그런 것이라면 결단코 넉넉하게 안하십니다.
그래서 괴롭습니다.

그 남은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체우노라,,

기도하고 성경봐서 넘어가는 것 아니고, 그게 이렇게 살아내셔야 됩니다.

무얼 살아야 된다는가,,,?  이게 이제 가장 중요한 겁니다.

여러분 각자에게 준 시간과 공간의 자리, 현실, 실존, 여러분 각각의 자리,, 

그 누구의 남편이고 누구의 아내이고, 누구의 아버지고 누구의 어머니고 하는 그 자리, 시댁이 있고 처가가 있고, 사돈의 팔촌이 있고, 어려운 정치 형편이 있고, 그리고 경제 위기가 있고, 취직이 안되고, 그리고 내가 응원하는 야구단은 자꾸 지고,,, 이게 현실, 자기 자리입니다.

그기서, 이 세상이 주는 현실적 위협! 현실적 도전! 현실적 시험! 그건 아주 현실적인 거죠!

현실적인 것을 어떻게 하나님의 일하심을 예수 안에서 본 자! 십자가로 부활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자녀로,

그 부활생명의 증거와 약속과 축복을 받은 자로, 그 완성을 기다리는 자로, 대응을 할 것이냐! 이게 살아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갖다가 십자가 세우는 것 아닙니다.

남편 출근할 때, "오늘도 열심히 사세요" 그러고 등에 이렇게 십자가를 그었다, 이런 간증 많이 들어 봤는데, 그 진심은 알겠습니다. 그러나 그래봤자 양복만 빵구나지, 아무 도움도,,,

살아내는 것입니다, 살아내는 것!


어떻게 살아내야 ,,?그 유명한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 입니다.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입니다.


하루 하루의 괴로움을 견디셔야 됩니다.

해결이 없는 것을 세상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지말고, 영원한 나라를 알고 있는 자로써 반응을 하십시요.

해도해도 안되는 것,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견디는 것입니다. 

울어야 할 때도 있고, 못 견디겠으면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닌, 하루를 사는 것입니다. 각자의 하루를 사는 것입니다.

이래갖고 무슨 답이 있단 말인가?

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럴 때가 아닙니다,, 지금 무슨 그 귀신이나 쫓아내고, 그 뭐 누구 죽은 사람 살려내고,, 할 때가 아닙니다,," 그런 도전을 계속 받으면서 공생애를 사십니다.

정치적 활동을 안하시고, 권력에 대한 의지가 없어 보여서, 많은 이들이 실망을 합니다.

오병이오의 기적을 이루시고, 많은 사람이 예수를 뒤좇고, 우리가 기다리던 해방자가 왔다고 생각했으나, 예수님께서 도망가셨습니다!

배타고 저 쪽으로 넘어가 버리셨습니다.


여러분 신자로써 산다는 것, 자기의 인생을 신앙으로 책임진다는 것, 해결해야 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삶입니다.

`내게서 이 가시를 빼주십시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를 여러분이 감수하셔야 됩니다.

"제가 늘 틀리고 아무것도, 아무 쓸모가 없는데 어떡합니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아멘! 하는 겁니다.

"거 이거 말만하고 실천이 안됩니다"

"그러니 멋있게 할려고 하지말고, 오늘 주어진 일에서 도망가지 마라" 오늘 설교 제목은 그겁니다.

<도망가지 마라> 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사십시요.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위로받을 수도 있고 누구에게 넋두리도 할 수 있지만, 아무도 여러분 자리를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기서 그 자리를 지키셔야 됩니다.

그걸 믿음으로 지키셔서 우시고 신음하시고 그리고 기도하시고, 그 자리를 지키시면, 하나님이 나머지는 다 만드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기독교 이 천년 역사입니다.

그것을 하기로 초대교회는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냄으로써 오늘 우리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의 신비한, 그리고 능력과 지혜의 인도함 속에 맡겨 여러분 하루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 앞에

믿음을 가지고 정직하게 여러분들의 삶을 직면하십시요.

다 이기지 못해도 좋습니다. 도망을 가지 마십시요.

앉아서 울고, 앉아서 화를 내고, 그 자리를 지키시면, 하나님이 그기 기적의 나무를 키우실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부활생명으로 확정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그 길을 걸어 우리 모두의 산 소망이 된 것, 우리로 알게 하셨으니, 우리의 자리를 지켜 우리가 죽어나가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부활생명나무를 기르시는 것, 지켜보는 우리의 인생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며, 주 앞에 엎드리는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겠다는 결심이요, 실천이요, 매달림이요, 인내요, 주 안에서의 순종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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