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사도행전

다시 보는 사도행전 01 ( 행 1:6-14)

새벽지기1 2016. 11. 22. 07:09


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13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사도행전은 예전에 한번 했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한창 부흥하고 그럴 때는 사도행전을 선교적 안목으로 봤습니다.

이제는 그 보다 조금 더 깊이 보게되서 같이 은혜를 나눌 수 있다 이렇게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도행전 시작에 예수님의 승천으로 부터 시작이 됩니다. 

제자들이 묻죠.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라는 질문으로 시작이 되는 셈입니다.

제자들은 아마 그게 제일 궁금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제일 궁금했고, 부활도 처음엔 믿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 부활이 사실인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이제야말로 기대했던 하나님 나라가 이제 보란 듯이 선언되고 큰소리를 칠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당연히 기대했을 텐데,

예수님의 답변은 참으로 의외였습니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그렇게 됐습니다.

 사실은 이 부분에대한 이해가 적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그 앞의 제자들의 질문 정도에서 신앙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을 것입니다.

"어느 때까지 입니까?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원한을 풀어주시겠습니까? 고난에 찬 인생을 바꿔주시겠습니까?" 라는 여러 질문이 나올텐데, "그것은 아버지이 권한이요, 너희가 알 바 아니다" 이런 무서운 시작으로 사도행전을 시작해야 됩니다.

그리고 "권능을 받을 것이라"라고 얘기합니다.

마태복음 28장에 가면, 조금 확인하고 가야할 문제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 너희가 권능을 받는다하는 이 문제는 마태복음 28장 18절에서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이거든요.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든 권세를 내가 갖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끝절에,,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입니다.

 

그 권세를 예수님이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너희가 권능을 받을 것이다"입니다.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인데, 제자들이 물었던 권세는,

"주의 나라이 임하심이 이 때이니이까? 주께서 부활하셨으니 죽음을 이기신 권세로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의 큰 세력으로, 큰 증거로 소원하는 것들이 다 완성되는 게 지금입니까?" 에 대하여,

"그건 아니다" 하고 이제 제자들을 보내신다, 이거든요.

땅 끝까지 모든 민족에게 보내시는데, 권세와 권능으로 보내십니다.

예수의 부활권세와 성령의 임함으로 말미암아 주는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갈 것입니다.

그리고 올라가십니다.

그래서 그 승천이 본문 1장 9절로 돌아와,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잘 알고 또 좋아하는 결론을 가지고 읽으면 이런 구절들이 자꾸 다 빠져 나갑니다.

제대로 읽으면 이 1장 9절 이하가 무슨 뜻이 되느냐하면, 제대로 좀 냉정을 찾으시고 이렇게 제대로 된 정신으로 보면,

"아니 그럭하고 가시면 어떡하냔 말예요?"

"때와 기간은 너희 알 바 아니요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신다,,"

"아니, 부활하시고 그리고 가버리시면 어떡 하자는,, "

전부 얼이 빠져서,, 제 생각에는 그 그림들이 이렇게 현란하게 승천이 되어 있는데, 그게 아니고,,

"아니 그 정말 가시는 거예요,,?" 아니 이렇게 본문에는 안 나와 있지만, 그렇쟎아요?

"아니,, 정말 가시는 거예요? 아니 어떡하라고요,,?"

이렇게 지금 그러니까, 천사들이 "너희들은 왜 얼이 빠져서 그렇게 하고 있느냐?" 이렇게 보여진다고요.

아, 좀 이상하게 갔을까요? ㅎㅎ

 

여러분 예수 믿고 누구나 경험하는 비슷한 경험인데 한번 대입을 해 볼까요?
여러분 처음 예수 믿고 기쁘고 감동스럽고 뭐 모든 문제가 문제가 아니고, 예수 안에 있다는 것과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로 눈물이 펑펑나고 이제 평생을 이렇게 기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거,, 한 달이 안가요.ㅎㅎ

"아니 도대체 어디 가신 거예요? 그렇게 기쁘게 해 주시더니,," 지금 그 장면이라니까요.

꼭 기억을 하세요.

이걸 놓쳐버리면 사도행전은 여러분들의 기대와 상상 속의 얘기가 되고 말아요.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실을 놓치게 되요.

우리가 그토록 답답해 하고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 하나님이 요구한 현실이라는 걸 놓치면, 원망과 치성 밖에 남는 게 없죠.

더 많이 치성을 드려 감동을 받아 내거나, 아니면 원망을 하거나, 체념해 버릴 수 밖에 없게 되는데,

교회사 내내 이 싸움에 교회 안에 있습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현실을 그만 못보는 사람이 되거나, 아니면 겉으로는 공동체에 나와서는 신앙인이고, 나가서는 세상대로 살 수 밖에 없거나, 거, 그것 밖에는 제대로 된 신앙을 이해할 수도, 어떻게 마주쳐야 되는지도 모르게 되더라, 그겁니다.

제 경우는 그랬습니다.

그래서 돌아와 이제 기도를 하는 겁니다.

기도란 뭐죠? 함께 계셔야 하는 주님이 없어서 이제 남은 게 기도 밖에 없다,, 그런 뜻일 수도 있는 겁니다.

물론 이건 대단히 부정적으로 소극적으로 얘기하는 것이지만, 사실은 이 문제를 확인하고 나서야 우리는,

기도가, 기도가 우리가 기대하는 주문이 아니다를 확인하게 됩니다.

떠나가신 주님, 약속과 하나님의 뜻만 우리에게 허락한 주님, 그의 백성으로 살아야하는데,

부활하시고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은 안 계시는 성도들,, 남겨진 건 기도,,

그러면 그 기도는 분명히 우리가 보통 하듯이 하는 기도로써 받아내는 응답용은 아닐 겁니다.

왜?

그렇게 할려면 기도를 줄 필요없이 주께서 부활하고 해결했어야 맞죠. 우리의 모든 것을 해결해 줬어야 맞지 않습니까?

그렇게 안하셨다는 사실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무든 권세를 가졌다고 얘기하는게 무든 뜻인가? 이게 맨 먼저 이해해야 할 성경적인 선언입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

신약시대란 구약시대와 뭐가 다르며, 예수님이 오셔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을 보내신다는 게 무슨 뜻인가? 신약시대는 뭐가 다른가?

이게 다릅니다.

예수님 이전 시대는 죽음이 끝인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이후로는 부활이 죽음을 이기는 시대다! 그것이 신약시대입니다. 새로운 약속이죠!

옛약속 속에는 이것이 없었다가 아니라, 옛약속에도 예수로 인한 구원이 예언되어 있고, 약속되어 있지만,

그 때는 아직 죽음을 이긴 부활승리가 현실과 역사 속에 사건으로는 주어지지 않았던 시대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모두 믿음으로 가져야 한다는 것은 동일하지만, 그 때는 역사적 사건이 아니어서, 그 시대는 죽음이 끝인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부터는 이제는 부활이 죽음을 이긴 시대가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를 사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권세를 가졌다는 것은, 그 전 시대와 이렇게 대비하라는 거죠.

죽음이 모든 권세를 가졌던 시대와 다른 시대, 새로운 시대다 이겁니다.

여러분 이 늘 들어왔을텐데도 분명치 않았던 설명인데, 세상을 살면 세상은 우리를 협박하고 그리고 들이대는 가장 큰 세력이 그겁니다.

"너 그렇게 살면 죽어" 입니다. "너 약하면 죽어" "너 물러나면 죽어",, 이 시대에 살다가, 예수로 인하여,

" 나를 믿으면 다 이겨!" 라는 시대에 온 것입니다.

나를 믿으면 다 이긴다는 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같이, 옛시대가 가졌던 힘! 사회적 정치적 권력이라는 의미에서의 힘이 아니고, 죽음을 이기면 부활 생명에 나타났듯이,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목적과 연결해서 세상과 인생과 운명을 보라! 는 말로의 초대요, 약속입니다!

그러니까 옛시대가 죽음이 끝이라는 것은, 살아있는 동안이 전부이고, 세상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창조주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역사와 세계를 심판하실 하나님을 아는 시대, 세계관으로, 인간의 의미와 운명을 보는 눈이 바뀌어진 시대를 살라!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해하면 쉬워지는 것은 아니죠.

그러나 분명히 이 믿음을 가진다면! 우리는 가장 우선적으로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바꿀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 없이 예수를 믿는다고 얘기를 하는 것은, 가운데를 비워놓고, 그러니까 현실을, `자기인생을 비워놓고 예수 믿고 비워놓고 죽은 다음 천국,,`으로 묶어 논,, 가운데를 비워 논 인생을 살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로 여기를, 구시대에,, 세상이 전부이고 권력이고 보상인 것을 신앙이라는 방법으로 답을 얻으려는, 말이 안되는 타협과 혼란의 시기를 살 게 됩니다.

죽어도 좋다 라는 것은 결사의 각오가 아니라, 죽는 것이 끝이 아닌, 죽음을 극복한 부할이 있는데, 그 부활은 죽으면 살려준다는 뜻이 아니라, 죽음이 끝인, 죽음이 최고의 권력인 세상이 아닌 세상을 사는 것이다! 라고 아는 것이다, 말이죠.

그래서 이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은 최고의 무기가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동일한 조건과 환경 속에서 말이죠!

갈라디아서 2장에 가면,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를 산다, 내 안에 예수가 산다라는 것은, 예수가 오신 목적, 예수가 사는 방식, 예수가 가지신 인생에 대한 이해, 예수가 이루시고져 했던 목적으로 사는 자다! 이겁니다.

예수가 그런 것처럼.

세상이 전부인 것으로 사는 것과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이루려고 했던 것, 우리가 눈으로 본 증거로 알다시피,

예수가 오시고 예수가 산 방식은 그냥 방식이 아니라, 원리와 내용과 목적과 가치가 다른 것이죠.

나는 이제 더 이상 내가 아니고 예수다 라는 것은, 무슨 신비로운 종교적 어떤 존재가 되어 어떤 꿈결같이, 어떤 이상과 종교적 보상에 의한 희열에 차서 모든 고통도 고민도 없는 둥둥 날아가는,, 그런 얘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무슨 인생관이나 세계관이나 역사관이나 인간의 가치나 존재론이나,, 이런 모든 것이 다른가 하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아니고 더이상 예수다! 하는 얘기는, 예수에게서 나타난 인간에게 하나님이 무얼 요구하시느냐, 무얼 채우시려느냐 어떻게 하라느냐? 에 대한 완벽한 구체적 증거들, 성육신하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아간, 섬기고 죽고, 그리하여 영광의 자리로 들어간 그의 부활의 승리의 의미가 무엇이냐? 로 나를 사는 것이다! 라고 얘기한단 말이죠!

그러면 그것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그런 환경과 조건을 주시지 않고, 승천하시고, 떠나버리시고, 성령을 보내어 우리보고 이 땅을 계속 살라고 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에베소서 2장에 가면,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부르사, 교회를 이루십니다.

교회란 건물이거나, 조직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자녀들을 부르는 신약시대의 이름입니다.

그 교회란 하나님의 자녀들을 예수 안에서 불러 예수와 묶은 자들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지어져 간답니다. 함께,,

그 함께가 어디까지냐? 하는 것입니다. 그 함께는, 가장 좁게는 같은 신앙의 동지들이라고 그렇게 이해하고, 우리가 아직 고난 속에서 살아야하는 이 인생과 환경조건을 얘기하기도 하고, 가장 넓게는 역사입니다. 가장 넓게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하심의 대하여 가장 큰 오해가 뭐냐하면, 이제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로 인하여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고, 예수님께서 부탁하신 복음을 나가 전하여,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렇게 이렇게 구원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하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과 달리,

사실 성경을 자세히 종합적으로 보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십자가에서 이루시고, 제자들이 그 증인이요, 제 일차 제자들이요, 그걸 가지고 전해야되지만,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이 세상의 구원을 허락하셨다를 전하러 갑니다.

우리 먼저 믿은자들을 통하여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구원은 십자가 안에서 성립된 것입니다.

우리가 전해서 구원이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모두를 붙잡고 예수 믿어라고 강요하는 데에서 복음이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땅끝까지 가서`라고 요구하는 모든 조건, 환경, 사회, 배경 속에서 먼저 믿은 자들이,

아직도 세상이 전부인 구시대를 살아가는 세상 앞에서, 죽음이 전부인 세상 앞에서,

부활생명을 가진 자는 뭐가 다른가? 삶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무엇을 목적하는가? 라는 차원에서 구별되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게 무얼 의미하는가? 구체적으로 이런 뜻입니다.

"예수 믿어 안 믿어? 너 안 믿으면 지옥 가,, 글쎄 뭐 내 말 듣고 나 따라서 기도해" 이게 신자로써의 최우선 책임이 아니라,

이 평생을 지지고 볶아서 결국 죽음으로 몰고가는 고난에 찬 인생 속에서,

세상 사람들이 죽을 수는 없어서, 발버둥을 쳐 그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윤리도 없고 이상도 없고 가치도 없는,, 다만 존재를 위한 발버둥을 치느라고 악하고 미련하고 어둡게 사는 것과 구별되어서, 그게 겁이 안나는,, 모든 삶의 실존적인 시험과 위협과 유혹 속에서 그것들로 영향받지 않는,, 그것으로 채울 수도 없고, 그것으로도 방해받지 않는,, 예수의 부활생명을 가진 자로서는 고난을, 위기를, 유혹을, 시험을, 억울함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어떻게 감수하는가? 왜 그런가? 보상이 무언가? 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쓸모가 있어서가 아니라, 존재자체의 다름인 것입니다.

저 사람은 다른다! 저 이는 도대체 왜? 왜 여기서 양보를 하는가? 저 사람은 왜 질 수 있는가? 뭐가 그를 우리와 다른 존재로 만들었는가? 위하여 산지사방에 존재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두움 속에 존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성경이 말하는 빛이고 소금인 것입니다.

그것이 권력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요!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저 사람은 다르다!,, 예전엔 그것을 한국교회가 윤리로 주로 이해를 했습니다. 아닙니다!

윤리 정도가 아닙니다. 실존적인 것입니다.

실존적이라는 것은, 삶의 한 가운데서 생명을 위협하고 세상의 가치로 시험하는 현장에서 예수를 읻는다는 이름으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제시하는 바와 같은, 예수가 살아간 방법으로, "네가 남은 구원하였는데 너는 왜 죽느냐? 네가 메시야여든 내려와 보라" 를 당하는 삶을 살아야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눈치만 빠른 사람들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 믿어서 좋은 것 안 쪽에 걸고, 세상으로 이익 보는 것 한 쪽에 걸어가지고 살고 있죠.

어, 분명하게 난 크리스챤이다! 이렇게 뭐 걸고 나가서 뭐 시위를 하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를 세상이 보면, 미련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보면 이해가 안 가는 사람입니다.

그걸 말과 명분과 시위와 어떤 봉사로 대신 할 수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여러분 각자의 존재가 갈라디아스 2장 20절을 순종하셔야 합니다.

하루 아침에 되지 않는다는 것 압니다.

그러나 이 설교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것으로 스스로를 속일 수 없습니다!

로마서 4장에 가면, 이 이야기는 알고 보니까 이미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있더라는 사실입니다.

 

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은 뭐죠? 믿음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은 뭐했죠?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에서 부름을 받아 모르는 나라에서 나그네로 삽니다.

그건 무슨 뜻이냐하면, 정치적 사회적 기반이 없어서 정치적 사회적 기반이 없는 사람으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자기 고향에서 살았으면, 누군가 누군가 비빌 사람들이 있었겠죠.

그러나 전혀 모르는 곳의 나그네로 그 인생 전체를 나그네로 부름을 받아서 생각해 보십시요. 

정착하지 않은 사람이 무슨 정치적 권력을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여 무얼 했다구요? 그를 부르신 하나님, 창조의 하나님이고 부활의 하나님이랬죠!

자기 권력, 자기 기반이 있어야 뭘 심고 거둘 것 아닙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기반과 권력을 가져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했기에, 그는 과연 그의 자손을 하늘의 별같고 바다의 모래같게 될 수 있었다는 것이죠.

아브라함은 창세기에서 어떻게 나옵니까?

'내가 네게 복을 주어 내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아무런 정치적 사회적 실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나그네가 모든 족속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고통스럽고 외로운 인생을 사나, 그가 복의 근원입니다.

그를 저주하는 자가 저주를 받고, 그를 축복하는 자가 복을 받는 존재입니다.

그게 빛이고 소금입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나 그랬듯이 신자들은 이 삶의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렇죠?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보상은 멀고, 세상의 협박은 눈 앞에 있습니다.

그 싸움을 평생하는 거죠.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얼마나 쓸모있는 인생을 살았나라고 돌아 보는 것이 신자의 회상이 아니라.

`결국 세상은 거짓말이었구나! 세상이 준다고 하는 보상들은 보상이 되지 않는구나!` 를 알아,

`맞아!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가`를 아는 자리에 오면, 그게 그게 신자의 인생의 답인 것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때 더 잘 할 걸,,` 그 실패없이 이 자리에 못 옵니다.

우리 교회의 큰 공통점, "목사님을 십년전에 내가 만났어도,, 잘 나갈 때 만났으면 제가 그냥 꽝꽝 밀어드릴텐데,,`

`지금이나 잘 해,, 망한게 복이야, 안 망했으면 날 만났겠어요? 안 망했는데, 잘 나가는데,, 우리 교회 오겠어요?`

"잘 나가면 잘 나가는 얘기하는데 모이지,, 우리는 망하라는 거 아니야! 왜? 예수를 믿는다 그랬잖아! 사업을 한다고 그랬으면 내가 왜 망하라고 그랬겠어? 예수를 믿잖아! 예수를 ,,!"

세상의 것으로 보상과 목적을 삼을 수 없는 자들이예요.

그 너머에 보상이 있어요.

그게 사도행전의 시작이예요.

"자, 너희는 새시대를 산다, 어디가서 `넌 왜 그러냐? 넌 왜 그래?` 이 싸움하지마라,, `넌 왜 불교신자가 됐냐? 너 왜 예수 안 믿냐?`이렇게 싸워서 내 인생을 보상받거나 증명 받으려 하지말고, 그 옆에서 같은 조건과 환경 속에 살아라! 그들 앞에, "이 사람은 다르다!" 그것 받아내라!

누구 비난하고 정죄해서 댕댕거리지 말고, 네 위치를 확보하지 말고, 그런 거 없다. 숨기고 감추어지고 세상에 떠밀려가는 속에서 억울함과 누명과 오해와 우겨쌈과 비난 속에서 너희는 세상이 전부가 아닌 사람으로 살아라!

그들이 보고, 당신은 도대체 왜 우리와 다릅니까? 라고 묻게 하라!"

예수님 올라가십니다.

"살아라"

"아니, 올라가시면 어떡합니까?"
"뭘 보고 있느냐? 너희가 본 이 예수는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주어진 시간에 힘을 다하여 너희에게 주어진 신앙의 내용들을 너희 삶에 순종하라!" 이렇게 사도행전은 시작합니다.

정신 차리고 긴장하시고 겁을 먹고 그리고 도망가지 마시고, 사도행전 끝날 때까지 집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부활생명을 주셨고 우리에게 우리 삶 속의 하나님 자녀로 존재하며 살라고 하십니다. 그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를 믿는 자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무슨 권세를 가졌고 무슨 위협과 시험과 유혹을 뿌리쳐야 하는지, 무슨 힘으로 감수해야 되는지,

기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겸손하고 순종하고 실천하는 우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http://www.lamp.or.kr/zb41/zboard.php?id=net_sermon&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175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주일예배설교 녹취록 이택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