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사도행전

다시 보는 사도행전 (4) (행2:14-21)

새벽지기1 2016. 12. 6. 07:17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15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사도행전 2장은 성령강림과 또 그 사건으로 인하여 놀란 사람들 앞에 베드로가 성령강림의 의미를 설명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21절을 지나서 42절까지 전부 베드로의 설교와 그 설교 내용들에 관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성령강림을 설명할 때 '이것이 하나님이 이미 약속하신 예언하신 일의 성취라' 라고 이 성령강림을 가장 중요하게 지적합니다.

요엘서 2장에 있었던 그 예언을 여기서도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17절 이하의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대로 다시 인용을 합니다.

이 설명의, 이 예언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말세의 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말세의 한 증거,,

'말세가 되면 내가 내 영을 부어주리라' 입니다. 그리고 '그 영을 받으면 가장 크게 예언을 할 것이라'  이 중요한 두 단어가 등장을 합니다.

말세라는 것은 보통 자연주의자들에게는 없는 개념입니다.

자연주의라는 것은 보이는 세상이 전부이고 자연의 이치가 전부라고 믿는 사람들은 결국 역사와 인생이 그저 윤회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끝이 없는 반복이죠.

그러니까 공전하는 거죠. 헛되게 반복한다고 믿습니다.

말세란, 즉 마지막이 있다는 것은, 시작과 끝이 있어야만 말을 할 수 있는 어떤 시기일 것입니다.

시간이 어떤 직선사항의 목표를 향하여 진행될 때에만 시작이고 끝이라고 그러지, 시간이 있어도 시간이 반복되는 것이면 시작이니 끝이니 라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세계관은 이 세상과 역사가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마치시는 진행으로 되어있다 그런 뜻이죠.

그 진행의 마지막 때가 되면, 내용을 부어주겠다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성령강림에서 그 확인해야하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는 그들이 예언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언을 한다는 말이 또 만만치 않죠.

지금 얘기한 이 말세에 주어지고 예언을 한다는 것은 다 묵시사상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묵시라는 말은 계시라는 말과 동의의로  `감추인 것을 드러낸다`라는 뜻입니다.

감추인 것을 드러낸다,, 뭘 감추어 뭘 드러내느냐,,?

역사와 인생의 끝이 무엇이냐를 살아있는 동안 모르지 않습니다. 그걸 드러내는 것이 묵시요 계시인 것입니다.

그 끝을 누가 어떻게 드러내느냐?

하나님이 드러내신다.

하나님이 어떻게 드러낼 수 있느냐?

그가 시간과 역사와 세계와 인생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그가 시작하셨고 그가 목적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다,,이걸 묵시사상이라 그러는데, 성경의 구약에서는 다니엘서, 신약에서는 요한계시록이 묵시록이라고 지칭될 만큼 그 사상이 강한 주된 주제로 등장을 하죠.

요한계시록 1장을 보시면, 지금 한 이 묵시사상의 표현들이 이렇게 등장을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그러니까 이 계시는 이러날 일들, 반드시 일어날 일들에 대한 깨우침, 보여줌이죠.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계획의 끝을 보이는 것.

그래서 우린 그냥 시간과 역사라는 개념에서 보면, 시간과 역사가 끝나는 거니까, 종말, 종말론, 종말론적인,, 이라는 용어를 쓰고,

지금은 아직 안 나타났으니까, 역사가 계속되고 있으니까, 감추어져 있죠. 아직 눈 앞에 현실로 안 나타났으니까,

묵시, 계시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그래서 성령께서 임하사 가장 중요한 증거를 뭘 삼았느냐?

`지금이 말세다` 하는 거죠.

여기서 말세는 끝이 왔다가 아니라, 끝을 보여주고 있다라는 의미에서 말세라,, 무슨 끝?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보내심으로 당신이 목적하신 것을 이루고 계시는 확실한 증거를 주셨다` 라는 의미에서 말세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영을 받아 예언을 한다는 것은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지난 주에 성령강림도, 성령이 오신 것 자체의 증거가 방언이 아니라,

성령이 오셔서 외국어를 첫 사역으로 행하셨죠.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지금 이장에서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예언을 한다는 것은 묵시적 개념에서 장래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장래일이란 여기서 하나님이 무슨 목적을 갖고 계시는 건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2014년에 IMF가 또 온다` 이런 예언말고,

우리가 다 한 예언! `예수천당 불신지옥` 예수 믿어야 천당에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간다,, 역사의 끝은 이거다, 죽음 이후는 이거다, 라고 얘기하는 이것이, 여기서 얘기하고 싶은 예언인 것입니다.

구약선지자들은 예언자라고도 되어있죠, 앞날을 얘기하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앞날은 무슨 개념이냐 하면, 이스라엘의 신앙적 혼돈기에 선지자들이 등장하여 그들을 경계합니다.

너희들 이렇게 살면 안 된다, 그러면 너희들 벌을 받는다, 나라가 망한다, 이런 얘기는 다만 미래에 일어날 일을 먼저 아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결코 양보하지 않고 당신의 뜻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에, 거룩한 나라, 그의 기뻐하시는 거룩한 백성을 만들어 역사와 창조를 완성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길에서 떠나면 남는 것은 자멸밖에 없다!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 예언자들의 예언이요, 선지자들의 사역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그 영원한 심판과 영원한 하나님의 목적의 불변성을 보이기 위하여 역사적인 어떤 심판들이 있는거죠.

이 큰 하나님의 일하심의 종속되어 있는 현재적 증거로써 나머지들이 있지, 무슨 어느날 어떤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것들은 아주 큰 그림의 지극히 조각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언을 한다는 것은 뭘 신통하게 맞추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가 만드신 세상과 그가 지으신 백성들과 역사의 어떻게 개입하시고 무엇을 이루고 결국 어디로 끌고 갈 것인다에 대한 이해, 깨우침, 은혜를 입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내용들의 중요하기는 이겁니다. 끝에는 <구원을 받으라>로 끝납니다.

구원을 받으라 앞은 뭐냐하면, 돌아와서 2장 20장,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주의 구원의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심판이 있을 것이라 이겁니다.

심판이란, 결국 이 세상의 역사를 종식시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지 않는 세상과 그런 영혼들을 다 붙들어 지옥으로 던지실 것입니다.

그리고 새하늘과 새 땅에 그의 백성들을 다 불러 영원한 나라를 실현하실 것입니다.

그 길로 가고 있고, 그 일을 이루고 있고,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 영을 주셨고, 그 영을 주실 수 있었던 근거는 이제 <예수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요엘서를 인용하여 성령이 임하셔서, 지금이 말세인 줄,, 하나님이 그의 목적을 이루고 있는 줄 증거로 삼은 것을 근거로 하여,

이 증거가 갖는 가장 큰 의미가 뭐냐?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다!

그가 목적을 가지고 있고 그 목적을 지금 진행하고 계시다!

그 진행하시는 증거가 성령이신데, 그 진행을 가능케 하는 사람이 예수다!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이 성령은 예수로 말미암아 왔다, 중요한 논점이 있죠, 어떤 논점?

하나님이 이 세상과 역사와 인류의 운명을 당신의 목적과 뜻으로 기어코 목적하실 것이다, 그 증거가 성령을 보내신 것인데,

너희가 있는 상태에서 낙원을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거룩한 백성으로 자신이 지으시고 만든 인류를 당신의 형상으로 완성하는 창조의 완성으로 부르셔야 했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이하여 구원이 중간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해서 이 영이 왔다, 구원역사가 있었다,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메시야다! 그가 부활하심으로 약속한 성령을 보냈다 이거죠!

부활하심으로는 뭘 전제하고 있죠?

죽으심을 전제하고 있죠.

그건 또 성경 내내 하는 얘기죠.

하나님을 버리고 배반하여 자초한 멸망상태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냈다,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 핵심된 내용, 그 내용이 가지는 실제성,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하심이 성령의 강림으로 확인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그 분이 하나의 힘으로 하나의 동반자로 우리 편을 드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가장 중요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하여 오신 분이라는 것을 증거하는데, 당신의 가장 중요한 사역을 삼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위하여 성령 하나님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은 무지의 소치입니다.

요한복음 16장을 보십시다.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장래일을 알게 합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

한 인생 죽으면 끝나는 게 아니다!

진리의 가장 중요한 근본입니다!!

이 세상의 주인이 계시다! 역사의 주인이 계시다! 우리 인생을 주관하시는 이가 계시다!

그런데 그 분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창조하신 그 선한 목적을 포기하시지 않는 분이다!

죄지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그 아들을 보내신 분이다,,,! 이걸 증거하러 성령이 오시는 겁니다.

장차 예수가 오면 이럴 것이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과 베푸신 구원의 결과로 오셔서, 여기 14절 식으로 얘기하면,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시리니,, 입니다.

어떤 영광?

우리의 운명과 역사의 결국을 쥐고 계시는 분이 어떤 분인가! 입니다.

어떤 분이십니까?

구원하시려는 분입니다. 복주려는 분입니다.

그것이 어디에 가장 중요하게 증거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입니다.

죽어버린,, 하나님을 떠나 자초한 죽음 속에 누워버린 우리를 구하기 위하여 죽음을 건너 찾아오신 주님!

죽음의 자리에 당신을 내어놓으신 주님!

그리하여 당신의 부활에 묶으신 주님이 예수의 영광이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랍니다.

그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성령님이 오십니다.

이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게 뭡니까?

더 이상 너희는 사망의 권세에 묶이지 않았다를 가르치죠.

너희의 나약함, 너희의 실패, 너희의 무지, 너희의 외로움, 너희의 한계가 너희 운명을 결정하지 않는다!

너의 실력과 자격과 조건과 다른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자비와 긍휼과 복주시려는 그의 중단하지 않는, 모자람이 없는 사랑이 네 운명을 쥐고 있다!

예수의 영광으로 권세로 성령이 우리에게 와 있는 것입니다.

 

조 주승 목사님하고 햇수를 삼 년을 그 대담을 했습니다.

오랜 시간을 일 주일에 한 번씩 만나면, 너 댓시간씩 앉아서 신앙에 대해서 서로 대화를 나누었죠.

그래서 이미 그 책을 한번 냈었습니다.

그걸 내고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 머뭇거리고 있자, 이제 그 책으로 마무리를 하는 일에 조주승 목사님이 다시 좀 더 보완을 위해서 또 한 달을 찾아 왔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보충을 한 후에, 맨 마지막에 '이제 다 끝났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묻겠습니다'로 이걸 물었어요

"목사님은 믿음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 때 어떤 정말 섬광같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믿음이란, 도망갈 수 없는 하나님에게 붙잡힘입니다!" 그런 것 이해하시겠어요?

믿음은 해 보면요, 잘 믿으려고 그러면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런데 안 믿을려고 그래도 대단히 어렵습니다. 포기할 수 없습니다.

제가 가진 믿음의 힘입니다.

`내가 내 맘에 안드는 믿음생활을 하는 때는 있어도, 내가 버려도 믿음은 없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놓아 놓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성령님께서 오셨다는 것은, 여러분이 어느 날 어느 날, 아시게 됩니다. 혼자가 아닌 줄,,

성령께서 내 안에 계셔서, 나에게 끊임없이 격려하시고 기다리시고 붙들고 계시다는 걸 알게 됩니다.

우리는 성령이 오셨으면 우리 마음을 확실하게 하고 시원하게 하고 부족함이 없게 할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지막에도 확인해 보겠지만,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구원이 그렇듯이, 믿음이 그렇듯이, 성령의 임재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같이, 신속한 해결, 신속한 확신으로 이끌지 않습니다.

더깊고 넓은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이 문제가 우리 본문에 보듯이, 뒤에 베드로의 설교를 따라가 보면, 이 모든 문제는 어디로 가느냐?

사도행전 2장,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리로 갑니다.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회개하라 입니다.

회개란 뭐죠?

우리는 회개를 윤리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면, 회개부터 합니다.

회개를 꼬치꼬치합니다.^^

뭐 소소한 것, 다 말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기도 안들어주실 것같고, 또 하나님이 말 안한 것에 대해서 뭐 어떻게 벌을 내리실 것같고,,

그래서 그 우리 기도의 재미없는 점은 그 앞의 회개 때문에 본론을 못들어 가고 지칩니다.

피부가 벗겨질 때까지 벗겨내는 일들을 하는데, ㅎㅎ

회개란 그런 일이 아닙니다.

지금 회개는 이겁니다.

성령이 임하셔서 말세인 것을 증언했으니, 말세가 있다는 것을 증언했으니,

하나님이 인생과 역사의 끝을 정하고 일하고 계시다는 걸 증거했으니, 결정을 해라,

세상과 함께 다만 다만 한번 존재하고 쓰러질 것이냐, 하나님이 약속하고 일하고 계시는 세상에 자기를 맡길 것이냐,,

두 길 중에 하나밖에 선택할 수 없다! 그게 회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윤리성을 가지고 회개를 하니까, 뭐는 놓치고??

지금 우리가 사는 인생이 만만치 않고, 확실치 않고, 버겁고 분명치 않을지라도,

나는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고 인생을 산다라고,

 내 짧은 인생을 가장 현실적으로 오늘 하루를 거기에 기대서 막막할 지라도, 버거울 지라도 의심이 들지라도 이렇게 연결하고 있느냐?

아니면 잊고 오늘은 그냥 세상하고 그기에 맞추어서 바쁘게 세상의 도전에 반응하고, 세상의 시험에 응하고 그렇게 막 살다가 저녁에 와서 정신없이 잘 때나 '아이고 하나님 오늘도 정신없이 살아서 죄송합니다, 내일은 안 그러겠습니다' 그러고 아침에 깨면 또 정신없이 살고,, 이러고 있는가를 묻는 겁니다.

신앙생활을 잘 해라는 이차 문제입니다.

제 일차 문제는 회개를 했느냐?

네가 어느 길에 들어섰고 무슨 세계관과 인생관 속에 있는지 아느냐?를 결정해라 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입니다.

세례는 예수의 세례는, 요한이 준 물세례와 대비되죠.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예수님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라,, 불과 성령은 거기서 동의어로 등장을 합니다.

요한의 세례는 자기가 구원자가 아니니까, 구원이 필요한 너희들이다를 지적하러 온 사람이니까, 결례를 행하는 겁니다. 그 세례가,,

'나는 죄인입니다. 죄씻음이 필요합니다. 나는 씻겨져야 하는 더러운 죄인입니다' 이게 요한의 세례입니다.

예수의 세례는 예수로 말미암는 구원에 들어가는 세례입니다. 성령세례죠.

성령이 오신 것은 하나님이 찾아와 우리와 동거하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완성입니다.

하나님과 화목된 것입니다.

그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하나님과 화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회개하라, 세례 받어라, 성령을 받을 것이라는 다 같은 맥락에서, 셋이 같은 뜻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은 일은 하나죠.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했으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 믿는 기쁨은 뭐죠?

예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법은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계명은 여기서 뭐죠?

복받는 조건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 법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것들이 예수와 함께 가는 법입니다.

그것을 지켜야 신앙인이 된다의 조건이 아닙니다.

그걸 지켜야 신앙을 완성한다도 아니요 그 길을 가는 하나의 이정표들 입니다.

그러니까 그것과 상치되는 길을 가면서 내가 주 안에 있다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거의 매일 여러분의 삶은 말씀으로 비춰 보셔야죠.

윤리의 차원이 아니라, 방향과 그리스도의 동행이라는 차원에서의 자기확인입니다.

내가 옳바른 길을 걷고 있는가? 거리가 멀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 좁히죠.

인생은 예수님과 함께 걷는다고 해서 쉬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실 생각해 보면,

인생이란 풀어야할 숙제가 아닙니다. 걸어가야할 여행입니다,,,

하나님이 왜 그의 백성을 예수 믿자말자 불러가시지 않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렇게 불러가는 것보다 이 세상에서 살게 하는 것이 더 더 큰 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생각해보자면, 하나님이 우리를 손해보게 하거나, 일부러 어렵게 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건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의 아들을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에 배치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은 복된 것일 겁니다.

 

히말라야는 올라가는 재미입니다. 장애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바다는 건너가는 재미입니다. 빠져 죽어라고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인생이 그렇습니다.

히말라야 태평양이 문제가 아니라, 누구랑 가느냐 죠.

누구랑 사느냐? 누구랑 가느냐?

여행은 어디로 가는 게 제일 좋죠?

어디가 아니라, 누구랑 가느냐 입니다.

아무리 좋은 데도 그 웬수랑 갈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험한 곳도 그 사람하고는 갈 수 있습니다.

인생을 예수와 함께 사는 겁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려합이라,,

고단하십니까? 외로우십니까? 억울하십니까?

예수님 보다야 더 하셨겠습니까?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충만케 하려고 우리 인생을 주께서 같이 걷자고 하십니다.

그러니 기대를 하십시요.

어려운 일이 있걸랑 혼자 다 해결하지 않아도 된다고 담대한 마음을 가지십시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부유하게 하시고 기적으로 채우시고 놀랍게 하시고 감격하게 하실 것을 성경이 증언합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사랑을 입은 자요, 주와 함께 사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믿음을 갖게 하시옵소서. 담대한 마음과 은혜를 입은 자의 순종과 충성과 기대를 가지고 자신의 인생을 걷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주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인생의 동반자시고 나의 모든 어려움과 모든 형편에 동행하고 책임지고 보호하는 줄 아는 기쁨으로 예수 믿는 인생을 채워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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