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사도행전

다시 보는 사도행전 07-4부 / 행 5:17-32

새벽지기1 2016. 12. 28. 06:51


17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18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19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21 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22 부하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23 이르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키는 사람들이 문에 서 있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24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25 사람이 와서 알리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26 성전 맡은 자가 부하들과 같이 가서 그들을 잡아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더라
27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28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오늘 사도행전 5장에서 보는 이 놀라운 사건, 이 사건은 그것이 놀랍다고 표현되는 이유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았던 앉은뱅이를 예수의 이름으로 고친 결과로 생겼다는 면에서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그들이 행한 일은 놀라운 일이라고 표현할 때, 기뻐할 자랑할 놀라운 일이었는데, 그 결과로 얻게된 것은 부정적이고 곤란한 결과를 받게 했다는 차원에서 놀랍습니다.

사도행전 5장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40절에 보듯이,

 

40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위협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을 하지마라, 예수를 증거하지도 말고 예수의 이름으로 뭘 하지마라` 라고 위협했을 뿐만 아니라 채찍질하여 놓아 보냈고 초대교회 제자들은 그것을 기쁜일로 받아 들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이해해야할 성경의 가르침이죠.

성전 미문에 앉았던 앉은뱅이를 고칠 때 이렇게 우리가 좋아하는 성경의 선언이 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였죠.

여기도 이름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4장 8절 보시면,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여기도 이름이 나옵니다. 17절에 가시면,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21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5장 오늘 본 본문에 의하면 28절에 보듯이,


28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에서, 28절의 싸움도 이 이름, 이 이름으로 무엇을 하지 말라고 했다,에 대한 답을 합니다.

`예수` 라고 하면 되는데, 왜 예수의 이름` 이라는 것이 강조되었는냐 하는 것입니다.

둘이  무엇이 큰 차이가 있는 것이 당연히 아닙니다.

그러나 이에 사도행전이 이 이름으로 자꾸 강조되는 데에는 그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예수라는 한 개인의 이름이죠.

성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실존 속에 들어오신 역사적 사실, 어떤 역사적 사실?

하나님이 그가 만드신 당신의 형상을 닮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가 도망간 자리까지 좇아 들어오신 구체적 사실을 가르치는 이름이죠.

기독교 신앙은 다만 도에 관한 것도 아니고, 소원에 관한 것도 아니고, 다만 치성과 진심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그 어떠하심이 가지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관한 증언입니다.

예수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찾아오신 하나님의 구체적인 역사요, 우리가 자초한 죽음의 자리까지 좇아들어오신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으로 할 때는 기독교가 가지는 신앙고백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어 하나님을 배반하고 도망가 스스로 자초한 멸망의 자리에 있는 모든 인류를 향하여 하나님이 힘을 다하여 찾아들어오시고 정성을 다하시고, 능력과 진심으로 일하셨다라는 표이죠.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심에 있어서 그가 가진 진심과 능력과 성의를 다 동원한 그것은 세상이 알고있는 권력과 방법이 아니요, 구원할 그 백성들을 찾아오신 하나님을 거절하고 배반하고 그를 죽이는 그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하나님의 기적과 신비와 이해할 수 없는 은혜의 방법이라는 것이 예수의 이름에 묻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인 예수, 우리가 나무에 못 박아 죽인 예수로 하나님은 그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제자들이 말하는, 그래서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능력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받았다는 이해는,

다만 어떤 신앙적인 헌신과 비장함과 작렬함의 묘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의 신비를 이해한 기독교인들만 해낼 수 있는 고백이 여기 선언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을 보십시다.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놀라운 선언이죠.

메시아의 오심을 예언하는 중요한 구약의 예언서입니다.

많은 냬용의 예언 속에 이사야 53장의 가치는, 그가 메시아일거라고 상상할 수 없는 모습으로 메시야가 오실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예상하는 모든 방법과 다른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가 와서 일할 것이다 입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이죠.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아니 이 분이 메시야라고,,? 이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죠.

그는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입니다.

하나님이 교회와 성도들을 불러 일하실 때, 세상 앞에 "그 예수 믿는 거 봐라" 하고 자랑할 만한 것 안주신다고 이해하셔야 됩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성공하고 승리해야 하나님이 영광받으시지 않습니다.

그건 여러분이 생각하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나타나시지 않았습니다. 4절 보시면,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하나님이 버린 자라고 생각했대요.

하나님이 이렇게 일하실리가 없다라고 생각을 했대요. 놀랍죠!

어느 시대에나 교회는 자기가 존재하는 시대의 사회와 세상 앞에 도전을 받습니다.

세상이 가자는 길로 가자는 타협의 위협과 시험을 당하며, 동시에 세상에게 인정을 받으라는 유혹을 받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라서, 여러분 근자에 많이 듣고 경험하다시피, `교회가 좀 잘 해서 세상에서 욕을 안먹었으면 좋겠다`

이 생각을 가지는 것,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잘 해도 욕은 먹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다른 무엇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도덕성에 있어서 완벽하면 세상이 지원해 주는 것 아니요, 세상이 사회적으로 쓸모 있다고 해서 호감을 가지는 것 아닙니다. 세상은 우리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 는 말을 듣기가 싫은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5장에서 보다시피, 그들이 그렇게 질색을 하는 당시의 권력자들은 다 예수가 싫은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방식, 신앙을 가지는 방식에 있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부름 앞에 순종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 은혜를 입고 하나님과 크신 예수로 말미암는 구원과 화목과 교제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것이 세상이 그러는 거야 뭔 문제겠습니까마는 바로 그 세상을 꺽지도 않고 그 세상을 항복시키거나 그 세상에 호감을 받는 방식이 아닌 식으로 하나님이 일한다는 게 우리에게는 문제이죠.

그건 능욕을 받게 되죠. 빌립보서 2장에 가 보실까요.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여기에 또 예수의 이름이 나오죠.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십니다.

무슨 일로 이 일이 결과 되었다고요?

예수님의 순종, 예수님의 희생이라는 말이 그것 자체로 성립합니다마는 이 희생과 순종을 약간 날카롭게 오늘 대조시키고 싶습니다.

희생이란 말 속에는 내가 나의 권리를 포기한, 그래서 그 손해를 자초하는 그런 가치가 크게 부각이 되죠.

예수를 믿는 것은 이런 희생하는 것, 헌신하는 것,, 이렇게 해서, 기독교의 가치가 이런 마땅한 권리, 당연한 권리를 포기하여 가지는 덕목으로 되는 것은 큰 일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희생을 하신 것이 아니라, 순종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길로 가시는 것입니다. 그게 희생의 길이었죠.

희생을 한 것이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순종을 한 것이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우리 잘 아는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였습니다.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비켜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게 순종의 길입니다.


오늘 보는 사도행전 5장에서 보는 제자들이 고백하는 `주의 이름으로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 그들이 능욕받는 길로 인도함을 받은 건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인하여 순종하는 길로 이해하고 있지, 능욕, 오해, 억울함같은 것들은 문제가 아니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요? 예수의 이름으로 강조된 이것,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내어 우리의 거부와 반역과 모욕과 죽임을 감수하여 그것을 뒤짚어 엎은 반전, 부활을 기억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기독교인들은 끊임없이 예수의 이름이 강조하고 있는 구체적인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 자기를 거스르고 베푸는 은혜와 자비를 배반하고 오히려 선을 악으로 갚은 바로 그 방식을 끌어안아 만드시는 하나님의 기적, 그 은혜의 반전을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의 진심, 우리의 소원, 우리의 믿음이 클수록 자기방식을 고집하고 그 방식에 하나님 보고 힘을 더해달라는 기도만 하게 됩니다. 그것으로 사람들을 항복시키고 압도하려고 듭니다. 

그기에 예수는 없어집니다.

여기에 있는 죽기까지 복종을 하신,, 그리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순종, 오늘 본문식으로 얘기하여 <능욕>에 살아야죠!


우리는 예수 믿고나서 사실 적잖이 당황하게 됩니다.

이 예수를 믿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세상의 욕심과 세상의 유혹을 극복하고 하나님께 나를 의탁하여 말하자면 우리의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께 나를 바쳤는데, 하나님은 보상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제일 당황하는 거죠.

내가 나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 욕심과 영광을 포기하고 내가 사는 날 동안 내 인생과 내가 사는 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소원하는데 하나님은 아무 답이 없어십니다.

왜요?

예수님께서 걸어신 길이 그것 아니었기 때문이죠.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영광의 자리를 놓고 내려오셔서 예수님께 세상을 준 것이 아니라, 세상이 자기의 죄와 권력으로 예수를 죽이는 자리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에 들어가 죽으셨죠.

예수님은 자살하지 않았다 강조하는 부분 아닙니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억울한 자리요 능욕의 자리입니다. 오해받는 자리입니다.

그 길로 하나님이 전세를 역전시키는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다는 사실이 <부활>이거든요.

그 부활을 만들어 내는 예수의 이름을 인하여 그들은 능욕받는 일이 이제 겁이 안나는 것입니다.

뭐가 겁이 안나는 거죠?

고통이 없어진다는 뜻도 아니요 그렇게해서 씩씩해지고 남들이 놀랜다는 뜻도 아닙니다.

세상은 끝까지 예수가 누군지 몰랐고, 우리도 몰랐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이해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죠.

그러니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인생을 이제 예수 믿는자로써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순종하셔야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묻겠죠.

"그렇게 예수를 열심히 믿는데, 뭐 나아진 게 하나도 없냐?" 그러겠죠.

그럼 여러분 할말도 없고 분하고 하나님 앞에 가서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저까짓거 하나 오해받는건 상관이 없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는데는 제가 못 참겠습니다`

그렇게 안하셨다니까 자꾸 그래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내려와 보라` 에 한 답이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 저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알 지 못하나이다,,`

예수님만 입 밖에 내는 거고 우린 내면 안되는 겁니다.

"하나님 이렇게 살면 아무것도 안됩니다" ,, "그 방식으로 하나님이 일하신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허락한 구원"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는 이름이라니깐요.

그러니 그냥 죽으세요. 죽으면 끝인 부활이 있다니까요.

그냥 죽어버리세요. 병신이 되세요. 각오하지 마세요. 각오는 꼭 거기가 끝이에요.

각오한 것이 혈서를 쓰죠. 그러니까 혈서를 쓰지 말래니까요.

순교란 장렬하게 죽는 게 아니예요.

병신이 되어서 죽는 거예요.

"너희가 하나님을 믿고 이렇게 해서 고문도 당하고 죽는데 왜 네가 믿는 하나님은 왜 가만히 계시냐?"  그걸 감수하는 거예요!

죽어 나가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그가 믿는 하나님이 없는 것같이, 저가 스스로 속아서 저 자리에 온 것같이 그렇게 가는 길이죠.

아~하 싫죠? 싫습니다.

그러나 그게 명예요 기적이라는 걸 초대교회가 알았고, 그 유산 속에 오늘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힘인가는, 여러분과 내가 예수 믿고 있잖아요.

여러분이 아우성치는 그 모든 기도에 하나님이 한번도 답을 안 주셨는데, 놓을 수가 없쟎아요. 그쵸? 안 믿을거예요? 안 믿을거냐구요?

 

저의 선배 중에 믿음이 좋았던 선배가 몇 분 있습니다.

제가 자라난 교회 선배들인데 사실 대학교 다니고 졸업하고 하는 이십대 무렵에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드뭅니다. 방황기입니다.

좋은 믿음을 갖었던 선배들이었는데 같이 열심히 모여 기도하는 사 오명의 회원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함께 기도하던 중에, 그 중의 한 사람이 신유의 은사를 받은 걸 알게 되었습니다. 기도하면 병이 낫는 거예요.

나머지 사람들 중에 적지 않은 시험에 드는 거예요.

같이 열심을 냈는데 왜 저 친구한테는 하나님이 하나님이 함께하는 표를 주고 우리는 안 주었는가가 됐죠.

그래서 이 공격을 한 겁니다.

 "네가 받은 능력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 사단의 능력이다" 이렇게 되었어요. 거, 당황했죠.

그런데 아무리 확인을 할래도 긴가 만가 한 거예요.

하나님 한테 물어도 답을 안 주시고, 하나님이 주신 겁니까 아니면 악한 영의 장난입니까에 답이 안되어서 2년을 고민 했어요.

그래서 완전히 사람이 마르고 체중이 12킬로까지 줄고 완전히 사경을 헤맬 즈음 성경을 보던 중에, 요나서 2장 4절을 보게 되었어요.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라는 요나 선지자가 물고기 뱃속에서 하는 회개를 들었어요.

현대어로 제가 번안을 하죠.

어느 날 여러분이 `하나님 신자답게 살기를 원합니다. 쓸모있기를 원합니다. 힘을 주시고 이 시대의 빛이요 소금이 되게 하옵소서`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이렇게 밝은 빛이 비추더니 천사가 내려와서

"아무개야 내가 네 기도를 듣고 미안해서 찾아왔다. 사실 나는 너를 택하지 않았다. 너는 죽으면 지옥가게 되는데 네가 하도 정성스럽게 신앙생활을 해서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라도 잘 살라고 가르쳐줄려고 왔다` 그러면 어떡할래? "  그러면 안 믿을 거예요?

 

여러분이 이해관계와 다른 모든 조건을 떠나서 예수를 믿고 있다는 걸 아세요?

여러분의 선택이기 전에 붙잡혀 있다는 걸 아세요? 그 신비한 하나님의 붙잡으심 때문에 예수의 죽음이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붙잡아 낸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예수 믿는데 대한 영광된 어떤 자랑스러운 뭐가 없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게 붙잡혀 와 있습니다.

거기에다 대고 오늘 이제 말씀하는 겁니다.

  "내가 하는 일, 내가 하는 방식을 알겠느냐?

  내가 어떻게 사망을 뒤집어 그기서 생명을 다시 만들어 내는 줄 알겠느냐?

  나에게는 능치못할 일이 없단다.

  내가 베푸는 것은 은혜요 자비요 긍휼이요 용서요 구원이요 능력이란다.

  왜 네가 내 편을 들고 날 도울려고 하느냐?

  내가 내 아들을 보내 어떻게 일했는지 내가 그렇게 분명하게 세상 역사와 성경 속에 밝혀 놓았지 않았느냐?

  너 뭘 두려워 하냐?" 이거죠.

그래서 고린도후서 4장으로 갑니다.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예수께서 그런 것같이 우리가 매일 사망에 넘겨진답니다.

이렇게 이렇게 하면 뭐 예수 믿는 건 고사하고 하루를 살기도 바쁜데 "하나님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제가 대신 대답을 하죠. "죽어라는 거다.

쌀이 떨어졌습니다, 굶어라. 병이 났습니다, 아파라. 아니 이래 갖고 뭘 해, 내가 한다 두고봐라"

그 싸움을 하는 거죠.

조금 극단적으로 얘기했습니다.

우린 살기 위하여 발버둥을 쳐야합니다. 그건 우리의 기본적인 책임입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존재하기 위하여 발버둥을 치는 게 아니라, 생명이 그 위협 앞에서 발버둥을 쳐야합니다.

먹고 살고 하루를 버티기 위한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책임을 성의를 노력을 해야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지는 우리가 볼 때 허탈함, 그 그 억울함, 그 낙심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걸로 내가 한다, 그걸로 내가 한다"

그게 오늘의 사도행전 5장의 선언입니다.

제자들은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기뻐하면서 물러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지못하면 우리는 신앙의 진위를 확인하는 일에 전생애를 소진하게 됩니다.

과연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맞는가? 내 인생이 쓸모있기는 있는 건가? 이게 뭔가? 여기에 붙잡혀 있지 마십시요.

우리에게 넘겨진 기독교는 나라가 가르친 것도 아니고, 저 훌륭한 사람들이 가르친 것이 아니며 죽어넘어간 사람들에 의해서 전달되었습니다.

신기한 일입니다. 신기한 일이예요.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기억해야할 신자의 자기 정체성과 인생과 현실을 사는 현장에 대한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 승리를 하십시요. 이 믿음을 가지십시요.

나라와 사회와 무슨 교육 교회까지도 여러분을 대신하여 여러분의 이 고민과 이 고난과 이 갈등을 겪지않는 조건 속에서 살기를 바라지마십시요. 그런 것은 약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처한 자리는 하나님이 정한 붙드시고 요구하시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 길에서 예수님에게서 부활의 승리를 만드신 그 능력으로 여러분을 동원하여 하나님은 생명을 만드실 것이요,

주 예수의 이름 앞에 모든 무릎을 결국 꿇게 하실 것입니다.

그 힘있는 신앙의 승리가 여러분들에게 허락되어 있는 것을 아는 감사로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제자들의 고백에 동참하시는 오늘의 말씀이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의 이름으로 사는 귀함과 자랑과 능력과 그 기이함을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헌신과 희생과 소원 속에 일하시는 것 보다 크게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기적과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일하고 계시고 우리에게 그 일에 동참토록 부르고 있는 우리 각자의 자리요 인생인 줄 알게 하시옵소서.

저 제자들에게 허락한 주의 이름을 위하여 능력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았다는 말씀을 아멘으로 받게 하시옵소서.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극진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하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의 명예와 자랑과 영광을 기억하고 주께서 부르시는 삶을 순종으로 충성하리라 약속하고 돌아가는 심령들 위에 영원토록 함께 있을 지으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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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주일예배설교 녹취록 이택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