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손양원목사

성경대로 살자 (로마서 2:17-29, 빌립보서1:27)

새벽지기1 2016. 11. 10. 11:11

 

기독교인이란 어떠한 사람인가?

 

한마디의 말로 답하면 66권 신구약 성경대로 살려는 자입니다. 불교인은 불경(佛經)대로, 유교인은 삼강오륜(三綱五倫)대로, 회교인은(코란)대로 각자 자기네들의 경문을 좇아 살려는 자일 것입니다. 성경의 교훈과 우리 신앙생활은 양궤도(兩軌道)와 같습니다. 성경의 명령한 바를 행하고 금하는 바를 하지 아니하여야 합니다. 내가 불교에 관한 책을 보았는데 거기 기독교를 평하기를 기독교는 저급(低級)의 종교입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의 성경은 "하라" "하지말라"는 것을 명하는 것 뿐입니다. 위로 무한히 전개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는 십자가(+)의 종교라 하기 보다는 정자(丁字)종교입니다. '차라리 우리 불교가 사방으로 제한이 없는 십자가의 종교다'라고 하였습니다. 저희들이 기독교를 비평하느라고 이런 말을 하였으나 여기에 예수교의 참됨을 말 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하나님께서 "하라" "하지말라"고 명령 할 수 있으며 우리는 순종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자율(自律)종교인고로 범신론을 말하고 만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순종의 종교입니다. 순종하려면 그 대상자에게 권위가 있고 믿음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순종하기 전에 그 권위를 알아야 합니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한 법칙이니라'하였습니다 성경을 의심하는 자는 순종하지 못합니다. 나는 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생명을 걸고 증거합니다. 누가 성경을 의심한다면 나는 그와 상종하기도 싫습니다.

 

①만물이 성경입니다. (요한 12:25) '우주 만물은 성경이고 신구약 66권은 그 주석이다:라고 루터 선생이 말하였습니다. 다윗도 공중의 일월성신을 보고 찬송하며 푸른초장에서 여호와를 찬양하였습니다.

②기록된 성경이 있습니다 (딤후 3:16)

③예수 자신이 성경 입니다 (요 5:39)

④신자의 행위 가 성경 입니다 (고후 3:2~3)

 

기독자가 보는 성경은 66권이나 불신자가 보는 성경은 신자의 행위입니다(롬 2:17~29 빌 1:27상) 불신자는 거듭나지 못했으니 66권 성경을 보아도 알지 못하나 오직 신자의 행위로 성경을 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성경대로 살자.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나더러 '너는 성경대로 살 수 있느냐?'하고 반박할런지 모르겠으나 나는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성경대로 살 수 있는 가능성

 

성경 속에 예수님이 계시고 신자 속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여기 주머니가 있는데 콩을 넣으면 무슨 주머니라고 하는가? 콩주머니라고 합니다. 쌀을 넣었다면 쌀주머니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안디옥에서 비로소 사용하였는데 그리스도의 신을 소유한 자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옥토에 뿌린 씨와 같이 30배,60배, 100배의 열매가 맺혀야 합니다.

 

 (막 4:8) 베드로 전서 1:16에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할지어다. 하셨느니라'했는데 이 말이 과도한 말이겠는가! 이 말은 불신자를 보고 명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를 보고 한 말씀입니다. 자녀를 보고 너희 부모만치 되라고 하지못하겠는가. 초목은 재배하고 가축은 길들이고 인간은 수양을 한다고 하나 그 근본 종자를 변경 할 수는 없습니다.

 

보리를 아무리 가꾸어도 벼가 되지 못하고, 개를 아무리 길들여도 사람이 못됩니다. 마찬가지로 중생치 않고는 아무리 해도 죄악의 자식입니다. 첫째 아담에게 속한 사람은 아무리 수양하더라도 공자와 석가만치 될는지 모르나, 하나님만큼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생한 사람은 될 수 있습니다. 여기 부모만치 되라고 한 것을 오해하지 말라. 그 지위나 영광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요. 그 부모의 성품과 특성을 닮으라고 말함입니다. 에덴 동산의 아담은 하나님의 지위를 빼았으려다가 범죄하였느나, 둘째 아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보라. 그리스도 안에서는 능히 성경대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를 가르칠때 불가능한 일을 가르치지 않으십니다

 

결코 부모가 불가능한 일을 그 자녀에게 명하지 않습니다. 어느 아버지가 열 살 된 아들더러 쌀 한 섬을 지고 오라고 하겠는가! 신명(神命)은 성신 받으면 가능하게 명하십니다. 바울, 베드로같은 사도들이 실천하고서 교인들에게 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신이시요 억지의 신이 아니십니다. 어떤 청년이 산상보훈을 다 배우고 말하되 '다른 것은 행해도 우편뺨을 치거든 좌편 뺨을 돌려대라 한 것은 젊은 나로서는 할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아야지 편견(偏見)해서는 안됩니다. 이 문구는 여자(如字)적으로 해석 할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의 뜻은 우편 뺨을 맞고 좌편 뺨을 돌려 댈 만한 아량이 아니면 타인에게 맞고 견디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매 맞을 때에 '너희가 법 없이 나를 치느냐'고 항의한 것입니 다.

 

어떤 선교사가 하루 아침에 자고나서 매우 실망한 안색을 띠고 있으니 하녀가 묻기를 '선생님은 매일 쾌활하시며 기쁨이 넘쳤는데 오늘 아침에는 왜 이같이 안색이 변하였습니까'하니 선교사가 대답하기를 '나는 간밤에 성경을 읽는 중에 쉬지말고 기도하라 한 것을 보고 이것은 불가능 하다고 생각하여 실망하였는데 어떻게 사람이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쉴사이 없이 기도만 하고 앉았겠는가'고 하였습니다.

 

하녀가 말하기를 '선생님 그것이 나는 가능할 줄 압니다'했습니다. 선교사는 '네가 어찌 자지 아니하며 먹지 아니하며 다른 사무도 없이 기도만 하겠는가'하니 하녀가 다시 대답하기를 '성경에 어디 자지 말라 먹지 말라 일하지 말라 하였습니까 나는 잘 때마다 일 할 때마다 기도하니까 나는 쉬지않고 기도합니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하루에 숨을 몇번이나 쉽니까? 백번인가, 천번인가,나는 끊지 않고 쉽니다.

 

이렇게 성경을 편식하는데서 이단이 생깁니다. 성경대로 산다고 해서 오늘 예수 믿고 내일 바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라 점점 자라갑니다. 우리도 날마다 성경을 배워 자라갑니다. 기도하며 성경 읽고 우리 신앙이 자라 우주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 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창기(娼技)속에서도 진리를 발견하고 바리새인들에게서도 외식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시조 아담 하와를 유혹하던 마귀는 오늘도 우리들의 신앙이 자라지 못하게 유혹하고 있습니다.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되지 아니한다고 낙심하지 말라, 하나님의 천지 창조도 육일 간에 완성하지 아니하였는가 오순절 성신역사를 오해하지 말라 나는 다음과 같이 봅니다.

 

'너희가 나를 믿으면 나보다 더 큰 일을 하리라'한 것은 사도들의 큰 역사를 말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는 성신으로 하시지 않고 개인 개인 대상으로 일하였으나 성신 시대에는 성신이 오셔서 역사하시나니 하루에 삼천명씩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성경저작 교회설립 등 큰 일을 위하여 성신께서 특별히 역사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신앙도 자라감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처음에는 '나는 사도 중에 작은 자'라고 하더니 다음에는 '신자 중 작은자'라 하고 나중에는 '죄인 중 괴수'라고 하였으니 이는 신앙 장성의 표입니다.

 

'손목사 너는 잘 믿는가'물으면 나는 '아닙니다. 악한 것뿐이다'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여러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은혜를 입혀 주신 것뿐입니다. 비유컨대 은행원이 매일 돈 취급은 몇 십 몇백 만원 한다해도 자기 소유는 그달 월급 조금 뿐인 것과 같습니다. 나에게도 불결한 것을 많이 발견합니다. 그러나 나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어느 집회 때에 부인이 울면서 내게 말하기를 '그것이 곳 중생된 증거입니다:하였습니다. 나도 나의 중생이 언제 되었는지 분명히 모릅니다.

 

본성 문제(각 사람 본성에 대하여)

 

본성은 못 고친다고 하여 방종하는 이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는 이도 고칠 수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셨을 때에는 육신의 병을 고치셨고 성신(성령)으로 오신 주님은 우리 마음을 고칩니다. 이적이란 무엇인가? 자연 법칙을 초월하여 인간 지식으로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하심이 이적입니다.

 

어떤 청년이 내게 말하기를 '내가 예배당에 가서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니 새빨간 거짓말만 합디다. 5병 2어 (五餠二魚)로 5천명이나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니 이런 거짓말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내가 대답하기를 '이 사람아, 조(晁)밭에 조 이삭이 몇 알이나 되는지 아는가'하니 '수천개 일 것입니다'하기로 '그러면 처음 한 알이 수천개가 되었는데 그 수천개가 되게 한 이는 누구인가, 농부가 하였는가, 어떤 과학자가 하였는가, 이 일이 되게 하신 이가 곧 하나님이 아니신가.

 

그러면 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5병 2어로 5천명을 먹일수 없겠는가 어떤 개미가 지렁이를 끌고 갈려고 애를 쓰는데 한 아이가 지나가다가 발로 차버리면 개미에게는 아이고 이는 이적이라고 하겠으나 아이에게는 보통인 것이 아니겠는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이적이라 하겠으나 예수님에게는 보통인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에게는 이적같으나 하나님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다'했습니다.

 

일본에 있는 어떤 도서관에 가보니 약 이십만권의 책들이 있는데 그중에 철학사가 대부분인데 우주가 어떻게 생겼으며 인생은 어떻게 낳으며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결론은 다 의심뿐이라고 의문부(疑問府)를 붙일것 뿐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자이면 누구나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고 압니다. 가장 무식한 할머니들에게 '천지를 누가 지었는지요'하고 물으면 '하나님이 창조하셨지요' 라고 대답합니다. 무식한 할머니라도 철학박사보다 유식합니다. 이는 마치 농부들이 일년에 수고하여 쌀을 산출하지만 나는 수고없이 밥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같이 믿으니 학박사(學博士)들이 평생 연구했어도 모르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천성(天性)문제도 갑자기 고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죄 짓는 천성을 못 고칠리는 없습니다. 혈기 많던 자가 예수님을 믿고 온유해지고, 악질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서 선량해집니다. 성질의 늦고 급한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숯은 아무리 비누로 씻어도 그래도 검지마는 불 가운데 넣으면 불꽃과 같이 변합니다. 우리 한국에 김익두 목사같은 이는 불량꾼으로 유명하던 이 아닌가. 그가 예수님을 믿고 목사가 된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 본성 즉, 죄의 뿌리는 쑥 빠지지 않는 법입니다. 이것으로 해서 날마다 싸우면 하늘에 가서 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일제 시대 신사 참배 문제가 일어날 때 어느날 아침에 형사들이 평양 신학교 기숙사에 와서 재학중인 이상업(李相業)목사의 방을 수색 하면서 묻기를 '당신이 가진 것이 이것뿐인가?'하였습니다. 사실은 다른 중요한 것을 상자 밑에 감추어두고 있었는데 없다고 할려니 하나님이 두려워서 거짓말은 할 수 없고 있다고 하자니 형편이 딱하고 해서 얼핏 나온 말이, 내가 있다고 하면 믿으며, 없다고 하면 믿겠는가, 있는대로 찾아보시오'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니 형사 말이 '당신은 작은 예수인데 내가 당신을 못믿으면 누구의 말을 믿겠는가'했다고 합니다. '불신자도 우리를 믿는다고 신용해 주는데 또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는데 어떻게 우리의 생활이 이같이 거짓인가? 나는 때마다 눈물을 흘립니다. 나는 작은 예수니 성경대로 살지 않고 되겠는가, 옛 성도들은 충성하였건만 우리는 왜 이런가? 나는 '죽을지언정 주께서 금하신 것은 행하지 말게 하시고, 하라고 명하신 것은 행하게 해주소서'하고 기도합니다. 오늘이란 오늘이 과거의 마지막 날이 되고 미래의 신출발(新出發)의 날이 되도록 힘쓰자.

 

순천에 있는 선교사들이 자기들 부흥회 때에 어떤 여선교사가 인도하였는데 그 방식은 각각 성경을 읽게 하고 '당신은 이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또 남에게도 가르치는데 당신은 이대로 하는가?'하고 책망 할 때에 거기서 회개하고 큰 부흥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불순종이라는 것은 하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요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교훈과 우리의 신앙 생활을 조화하는 방법

 

성경은 성신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주의 제자들도 기도함으로 성신(성령)을 받았습니다. 기독자는 성신을 받아야 기독자가 됩니다. 성경속의 성신과 내 속의 성신은 동일한 신입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아라 만날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리리라: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신을 주시지 않겠는가! 오직, 기도함으로 성경 교훈과 내 신앙생활이 조화가 됩니다.

 

오늘 우리 신앙 생활이라 하는 것은 도덕적 행위만 말함이 아니고 기도하는 생활도 말함인줄 압니다. 일 중의 일이요 생활 중의 생활이 이 기도입니다. 일 중에 가장 어려운 일은 기도이니 이 기도가 유일의 생활 원칙입니다. 앉고 서고 할 때마다 기도하자. 기도하지 않고 우선 보기에 얌전하고 점잖한 것은 공자 맹자를 따르는 도덕가들이 훨씬 낫지 않을까? 기독교는 기도의 종교요 기독자는 기도의 사람입니다.

 

왜 그런고하면 예수님 자신이 기도의 사람인 까닭입니다. 그의 생활 전부가 기도였습니다. 그런고로 기독교를 이해하려면 기도없이 할 수 없고 기도하지 않고는 기독자의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얼마나 좋은가! 육체와 마귀와 세상을 이기는 힘은 기도뿐입니다.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고, 성경대로 전하여야 합니다. 기도는 일대 전쟁입니다. 전쟁은 저가 안 죽으면 내가 죽는 것입니다. 육체와 나, 세상과 마귀와 내가 전쟁함입니다. 오직 우리의 신앙 생활이 성경 교훈에 부합되게 하는 것은 기도의 전쟁 승패 여부에 있습니다. 때는 말세지 말입니다. 

 

기도하다가 죽자, 

 

성경대로 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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