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손양원목사

목사 손양원의 신앙과 삶 / 강영부

새벽지기1 2016. 11. 6. 21:15

                                                                                                                     

 

손양원목사의 딸인 손동희권사가 쓰고 아가페출판사 발행한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이 책은 딸이 눈물로 쓴 손양원 목사의 신앙일대기다. 손 목사는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아들로 삼은 참신앙의 실천자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온 시간만큼 인생의 상처 또한 많고 깊다. 혹독한 일제의 압박과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가 당한 고난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저자 역시 마찬가지로, 손 양원목사의 딸로, 해방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두 오빠를 잃고, 아버지마저 순교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아버지와 오빠에 대한 그리움과 눈물 가득한 마음으로 모든 일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와 함께 과거의 아픈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 손동희권사는 자기가 직접 보고 듣고 겪은 이야기를 차곡차곡 기록해 두었다가 세상에 꺼내 놓은 것이다. 그 안에는 눈물과 울분, 하소연이 담겨 있다.

 

저자의 두 오빠는 좌익 반란군 학생들 앞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다 총에 맞아 순교했다.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말하면 살려주겠다는 회유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그러나 손 목사는 두 아들을 죽인 학생을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는다. 두 아들의 장례식에서 손 목사가 드린 9가지 감사 기도는 지금까지도 많은 성도들에게 깊은 감동과 눈물을 자아낸다. 그렇게 두 아들을 보내고 2년 후 손 목사마저 후퇴하는 공산군의 총에 맞아 순교하게 된다. 다정다감했던 아버지와 두 오빠를 잃은 어린 저자는 그 상처를 쉽게 지우지 못했다.

 

"이런 가슴 아픈 일을 혼자만 간직할 것이 아니라 자손만대까지 알려 참 신앙과 참사랑이 무엇인지 말하고 싶은 마음에서 이 책을 썼다"고 고백하는 한 글자 한 글자 속에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과 사랑으로, 죽기까지 하나님께 충성한 순교자요, 사랑의 사도였고, 기도를 호흡으로 삼고,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아, 전도가 생활이 되어 사신 분으로 원수에게는 사랑으로, 고난 받는 개인과 민족을 향해서는 소망을 던져 주었던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었던 고 손양원 목사님의 걸음을 더듬어 본다.

 

손양원 목사는 1902년 6월 3일,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653번지에서 손종일 장로와 김은주 집사 사이에서 삼형제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연준이고 호는 산돌이다. 남아프리카에 기독교를 전한 전도사이자 탐험가인 리빙스턴을 사모하여 자신의 호로 삼았다고 한다. 손양원목사는 성경대로 하나님만을 섬겼고 나라와 민족과 교회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알고 살았으며, 가장 소외되고 버림받은 한센병자와 두 아들을 죽인 원수까지 사랑했으며, 하나님의 은혜만을 사모하다가 순교하신 한국 교회의 사랑의 화신이요, 한국 교회사에서 세계 교회에 내 놓을 수 있는 자랑스런 목사이다.

 

신앙의 출발 제 1 기 (1902 ~ 1919)

 

한말(韓末), 일제 초기는 민족 수난기였다. 즉 민족이 수난당하는 슬픔 속에서 그가 아버지의 신앙인 기독교에 귀의하게 되고, 주일학교부터 시작해서 공부하게 되는 기간이다. 손양원목사가 태어나서 자랐던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은 교회사 적으로 볼 때 호주 장로교회가 선교했던 지역이다.

 

우리나라는 초기 외국의 여러 교파들이 한국에 들어와 선교를 했다. 크게 미국 남.북감리교와 남.북장로, 카나다장로교, 호주장로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물론 그 다음에 들어온 군소 교단들이 있지만, 대체로 1898년까지 이 6개 교단이 한국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교단들은 선교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지역을 각각 분할해서 선교했다. 그래서 경상남도 와 부산은 원래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 지역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훗날 호주 장로교의 선교 지역으로 넘겨주게 되었고, 미국북장로교의 선교 지역은 남쪽 지방으로는 경상북도 전 지역이 되었다. 대구 와 안동이 미국북장로교 선교사들의 선교 거점이었는데, 그들은 대구와 안동을 거점으로 학교, 병원, 교회등을 세웠다. 그리고 충청북도 남부 지역은 청주에 선교 거점이 있었고, 서울을 포함해서 경기도 남부와 중부 이천, 양평, 광주, 용인, 고양, 김포 지역이 또한 그들의 선교 지역이었으며, 황해도 중북부 지역과 평안도 대부분의 지역이 역시 미국 북장로교 선교 지역에 속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 지역은 호남지역과 충청남도 서해안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 카나다 장로교는 원산을 비롯하여 함경도를 선교 지역으로 삼았고 후에 간도 지역을 포함시켰다. 호주 장로교는 1889년에 서울로 들어왔지만 1892년에 선교사를 보낼 때는 서울로 보내지 않고 1889년 데이비스목사가 돌아가신 부산으로 보내어 부산과 마산, 통영, 거창, 진주 지역을 선교거점으로 활동하게 했다.

 

손양원목사는 7살이든 1908년부터 부모를 따라 주일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손양원목사는 1913년 칠원공립보통학교에 입학, 3학년 때 선교사 맥레이(Macrae, F.J.L.·孟浩恩)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910년 한일 합방과 함께 일제는 신사의 기본 정책을 수립하고 천황 사진 배례와 요배를 강요했다. 일제는 합병 직후, 관공서와 각 학교에 천황의 사진을 나누어주고 행사 때마다 거기에 경례를 하게 함으로써 천황 숭배의 이데올로기를 주입 하고자 했다.

 

1912년 7월 30일, 그들이 우상화하던 명치 천황이 죽자 일제는 각지에 요배소(遙拜所)를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요배를 강요했다. 이러한 요배의 강요는 일반인들에게만 그치지 않고 일제의 각종 제일, 축일마다 학생들에게까지 계속 강요되었다. 조회 때 동방요배(東方遙拜)를 강요당하자 손목사는 우상숭배라고 거절하여 퇴학당한 적이 있었다. 이때 선교사가 강력히 항의하여 복교되었으며, 1917년 7월 졸업하였다. 1918년 2월 서울로 올라가 신문 배달과 만두장사를 하면서 중동중학교에 다녔는데 이때도 안국동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1919년 3·1운동에 연루되어 아버지가 실형을 선고받고 마산형무소에 수감되자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자퇴하고 수중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70전을 출석하던 안국동 교회에 헌금으로 바치고 고향에 내려왔다. 1920년 봄 부친이 풀려나자 그는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스가모(巢鴨)중학교 야간부에 입학, 아침과 낮에는 우유와 신문 배달 등을 하고, 밤에 공부를 하였다. 이때 그는 일본 동양 선교회의 노방 전도에 큰 감명을 받고, 동경의 판교(板橋)성결 교회 중전중치(中田重治) 목사의 설교에 큰 은혜를 받고 참된 신앙의 의의를 체득하게 되며 1923년 졸업과 함께 귀국하게 된다. 이듬해 1월 함안군 대산면 옥열리에서 자란 정양순씨(19세) 와 결혼하고, 그 해 3월 23일에 일본에 다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는 학업에 임하는 도중 신앙의 새로운 도전과 확신에 찬 마음으로 중생하여 10월에 귀국했다. 귀국한 그 해 10월 23일에는 봉사하던 교회에서 집사로 피선되어 봉직하였다. 손목사는 3남2녀를 두었다.

 

신학교 입학

 

손양원목사는 1926년 3월, 경남 성경 학교에 입학을 하고 이곳에서 초량교회의 주기철(朱基徹) 목사와 친교를 맺고 그의 지도와 신앙에 감명받았다. 큰아들 동인이가 한 살이 되었을 때 부산 감만동의 한센병자 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당시 감만동 교회는 600여 명의 성도 대부분이 한센병 자들이었다. 손 목사의 첫 사역지가 이렇게 한센병자와 연결된 것이 훗날 그에게 사랑의 순교자가 되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의 시작이었다. 손 목사는 감만동 교회에 시무 중이었던, 1929년 3월 6일에 경남 성경 학교를 졸업했다.

 

원래 감만동 교회는 1934년까지 매견시 선교사가 목회를 했으며 손 목사는 외지 전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교회로 청빙이 되었었다. 사명을 받은 손 목사는 경남 울진 방어진과 남창에 교회를 세웠고, 부산 서구 부민동에도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개척했다. 교회 개척에 전념을 했지만 시간이 나는 대로 감만동 교회에서 설교도 하고 환우들을 보살피기도 했다.

감만동 교회에서 열심히 사역을 감당 하던 중 1932년, 몇몇 목회자들이 당시 김교신이 발행한 성서 조선의 잡지를 가지고 사경회처럼 인도한 것이 문제가 되어 감만동 교회를 사임하게된 것이다. 그 후 손 목사는 자신이 개척한 부민정 교회로 옮겨 평양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부민정 교회에서 목회를 전념한 것으로 사료된다.

 

1935년 4월 5일, 33세에 평양 신학교에 입학을 한 손 목사는. 학창 시절에도 뜨거운 기도 생활과 함께 성경을 깊이 연구 하였다. 그리고 학우들을 대할 때에는 항상 사랑하는 마음과 겸손한 태도로 교제하였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평양 대동강변의 능라도 교회 전도사로 시무 하면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한국 교회가 일본이 강요하는 신사 참배 문제로 온통 뒤흔들리던 시기였다. 그래서 손 목사를 비롯한 신학생들은 그 어려움 속에서 공부하기에 많은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손 목사는 이때부터 신사 참배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 신사 참배 문제는 선교사들 사이에도 견해의 차이가 심하여 갈팡질팡하였다. 이 때 평양 신학교 교장 나부열(R. L. Roberts)목사는 끝까지 강경한 태도로 신사 참배를 반대하였다. 그래서 결국 1938년 3월 제33회로 졸업하고 손목사가 졸업한 그 해에 신학교는 폐쇄되었다. 따라서 33회 졸업생들은 학교가 폐쇄되어 버린 까닭에 졸업장을 우편으로 받는 일까지 생겼다.

 

손양원목사의 기독교 신앙

 

손목사는 효행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순진무구한 신앙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가 신사참배에 반대하면서 강골의 의지를 가졌던 것은 철저한 신앙 때문이다. 손목사는 "하나님 이외에 어떤 신(神)도 있을 수 없다" 라며 기독교가 유일신 종교임을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사랑의 원자탄 351페이지의 "유일신 종교"라는 글을 통해서도 알 수가 있다.

 

"하늘에 두 해가 있을 수 없고, 한 나라(一國)에 두 임금이 있을 수 있으랴!" 물론 이 말은 유교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우주의 주인이 어떻게 둘이 되겠으며 십자가의 도(道)외에 구원이 있을 수가 없고, 세상에는 주인도 많고 신(神)도 많으나 여호와 이외에는 다른 신 내게 없구나. 석가도 유명하고 공자도 대성이지만, 오직 내 구주는 홀로 한분이신 예수뿐이니 내 어찌 두신을 섬길 수 있으며 예수님 이외에 속죄 자 또 어디 있으랴. 이 신을 위하여 는 아까울 것이 무엇이며, 이 주(主)를 버리고 내 어디 가랴" 하는 운문체로 된 글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이 글을 보면서 오늘날의 종교다원주의 들과는 비교되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손양원 목사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아주 확고부동한 입장을 갖고 있었다. 손목사는 "기독교 신앙"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자신의 신앙관을 잘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는 "불붙는 듯한 열심, 이것은 신앙은 아니고. 산을 옮길 확신, 이것도 신앙이 아니며. 취하는 감동도 신앙은 아니다 .고생을 무시하는 인내, 이것도 신앙은 아니다. 현재를 가볍게 여기고 장래의 광명을 눈앞에 보는 신앙, 이것도 신앙이 아니다." 라고 강조 한다.

 

그는 내세에 다가올 소위 하늘나라의 영광과 이 세상에서의 생활 자체를 하나로 융합하려고 하는 말하자면 이원론, 이분법이 아니라 일원론적인 하나님 나라 관을 이미 갖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그가 얘기하는 신앙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스스로 "신앙은 진리이니라"하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페이지의 "나의 기독교 감명"이라는 것을 보면 그의 신앙관이 일부 나타나고 있다. 그는 이글에서 "내가 예수를 믿게 된지 벌써 25년 이 되었다. 나는 그 동안 여러 가지 종교로 복잡하였다. 각 신앙 이 말하는 신앙 관념에서 헤매 이기도 하고 나의 내적 실생활에 있어서 많은 의심과 고민 중에서 헤매다가 30세 되던 해(1932년경)부터 정통의 기독신자가 된 것 같다. 그전에는 기독자는 되었으나 이교도의 색채가 많아서 의심과 고민에서 불만을 종종 느꼈다. 그러던 것이 30세부터 참 기독인의 생활을 해왔는데 이제는 그것이 더욱 명확해졌다.

 

이제부터는 별 기이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려한다. 세중(世中)의 잡다한 학설에나 각 종교 등의 신비한 교리나, 기독인들 중, 그들이 행하는 별 이상한 여러 가지의 신앙에도 눈을 뜨거나 귀를 기울려보지 않으려 한다. 다만 예수의 죽으심을 나의 죽음으로 하고, 그 의 부활을 나의 부활의 사실로 하여 그 자체를 받아드려 내가 살고 있는 현재 생활이 즉, 예수의 생활 그대로가 됨을 믿어 나의 평범한 생활에서 그를 믿고 자라서 나아감을 믿는 신앙이 되게 되었다." 고 고백하고 있다.

 

신사참배 반대와 옥고

 

1938년 신학교를 졸업한 후 1년간 부산 지방 선교사 대리로 지방 순회 전도를 하면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펼치던 중 1939년 7월 14일 신학교 동창인 김형모 목사의 추천으로 여수(전남 여천군 율촌면 산풍리) 애양원 교회전도사로 부임하였다. 손 목사는 신학교 시절부터 신사 참배를 반대해 왔으며 특히 그가 졸업하던 해에 신사 참배가 총회에서 가결되는 것을 직접 목격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당시 신사참배를 결의한 경남노회는 손목사에게 목사 안수조차 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전도사 자격도 박탈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신학교 졸업 후 1년간 부산 지방에서 신사 참배 반대를 외쳤고 이로 인하여 경남 노회에서 순회 강도사 사역을 못하게 되었다.

 

손 목사는 애양원 교회에 부임해서도 설교 때마다 신사 참배반대를 외쳤으며 손 목사가 가는 곳곳마다 신사 참배에 대한 부당성이 지적되었다. 손 목사의 이러한 외침과 그의 심령 깊은 곳에서 용솟음치는 회개를 역설하는 설교로 인하여 가는 곳곳마다 회개의 눈물바다를 이루는 역사가 있었다.

 

그는 시간이 있을 해마다 주님의 뜻이 아닌 신사 참배를 강요하는 일본은 망하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일본 경찰에게 있어서 손 목사는 눈에 깊이 박힌 가시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손 목사가 시무하고 있는 교회가 보통 교회가 아니라 한센병자들이 모여 있다는 특수성 때문에 쉽게 건들일 수 있는 처지 또한 못되었다. 그러나 1940년 9월 25일, 손 목사는 수요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여수 경찰서에서 나온 형사 두 명에 의해서 연행되고 말았다. 처음에는 1년 6개월 형을 받았으나 구속 기간까지 하여 거의 3년의 옥고 치뤘다. 그 때 손 목사에게 적용된 죄는 신사 참배 거부와 백성들을 선동했다는 것이었다.

 

1943년 5월 17일, 만기 출옥할 날이 가까이 왔을 때 담당 검사는 손 목사를 불러 놓고 사상의 전환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담당 검사는 손 목사에게 "덴꼬(전향)" 해야 나간다는 위협을 하였다. 그러나 손 목사는 그 검사에게 전혀 굴하지 않고 "당신은 덴꼬가 문제이지만 나에게는 신꼬(신앙)가 문제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손 목사는 끝내 그들의 신사 참배의 유혹과 핍박의 손길을 뿌리치고 거부하여 광주 형무소에서 경성 구금소, 청주 구금소로 옮겨 다니면서 해방이 될 때까지 6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그는 옥중에서도 기도, 찬송, 성경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옥중에서도 사랑을 실천하여 옥중 성자로 그 이름이 높았으며 간수들까지도 전도하여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였다. 그는 8·15해방과 함께 감옥에서 나오자 곧장 자신의 사랑의 보금자리인 애양원 교회를 다시 찾았고 그리하여 교우들의 신앙은 더욱 불타오르게 되었다.

 

한센병자의 영원한 친구 손양원목사

 

애양원 교회는 전남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에 위치한 교회로 한센병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애양원 한센병자 수용소는 미국남장로 교회 선교회의 전도 사업의 일부분으로 1909년 광주 양림에서 시작했으나 1925년, 이곳으로 이전 확장되었다.

 

손 목사가 애양원 교회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평양 신학교 2학년 때, 애양원 교회에 사경회 강사로 초청된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당시 애양원 교회는 외부 사람이 예배를 인도할 때나 방문했을 때는 하얀 가운을 입고 장갑을 끼고 들어가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손 목사는 교회에 들어가면서 흰 가운을 입는 것조차 거절하고 그렇게 했던 사람들에게 "호랑이를 잡으려고 호랑이 굴에 들어 온 사람이 호랑이를 무서워해서야 어찌 호랑이를 잡겠느냐. 이곳에서 일을 한다는 사람들이 병을 무서워해서야 어떻게 일을 하겠느냐?“ 라고 하면서 호통을 치고 그냥 들어갔다고 했다. 이 때 애양원 성도들은 손 목사의 설교에도 은혜를 받았지만 그의 이러한 모습에 더 큰 감동을 받게 되었다. 이것이 후에 그를 애양원 교회로 청빙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애양원은 처음 9명으로 시작하였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1천 명이상을 수용하는 대규모의 한센병자 수용소가 되었다. 손 목사는 신학교를 졸업한 후 36세의 젊은 나이로 이곳에 와서 순교할 때까지 목회를 하셨는데 그는 환우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으며 잠자리도 같이할 만큼, 사랑을 말로써가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다하여 실천하면서 살아간 목자였다.

 

애양원에서의 손 목사의 하루는 한센병자들과 함께 하는 생활 이외에는 없었다. 당시 애양원에 있는 분들 중에는 병에서 완쾌된 상태의 분들도 많았지만 그 동안 심한 병마와 투병 과정에서 눈을 잃어버린 사람, 손이 꼬부라진 사람, 걸음걸이가 부자유한 사람, 얼굴이 알아볼 수 없을 형태로 일그러진 분들이 많았다. 그들은 부모 형제가 없는 고아들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들을 따스한 사랑으로 감싸주면서 인간다운 대접을 해 주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애양원에서 일생을 보내려는 분들이 많았다.

 

만에 하나 그들이 자유롭게 밖에 나간다 할지라도 나가는 그 순간부터 만나는 사람들이 자신을 피해 다니기가 일쑤였고, 차를 탄다거나 사람이 모이는 장소인 식당, 다방, 극장, 목욕탕이나 이발소에 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일이었다. 아무도 그들을 사람으로 대접해 주지 않았고 심지어는 가족들에게까지도 철저하게 외면된 삶을 사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손 목사는 그들에게 있어서 신체적인 병을 치료해 주는 의사 못지않은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들이 비록 육체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지만, 그들의 영혼은 찬송과 감사와 기도의 옷을 입혀서 아름다운 성도로 만들어야 한다는 결심이 손 목사에게는 힘이 되어 주었다.

 

당시 애양원에는 병으로부터 완치된 상태에 있는 분들과 함께 병이 악성으로 진행되고 있는 분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14호실은 애양원 전체에서 가장 상태가 심한 중환자들이 모여 있는 병실이었다. 14호 중환자실에는 같은 환우들도 가기를 꺼리는 곳으로 온 방안에 진물과 핏자국, 땀들이 엉겨 붙어 도저히 그냥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상처를 살펴보려면 방바닥에 신문지 세 장 정도를 깔고 들어가야 했다. 고 한다. 그래서 신문을 깔고 들어가려고 하면 그 환우들이 목침을 던지면서 같은 환자끼리 차별을 한다 하여 화를 내곤 했지만 이러한 방을 손 목사는 서슴치 않고 들어가서 맨손으로 방바닥을 치우고 그 곳에 앉아서 그 흉한 환자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안아 주기도 하고 목을 껴안고 이마를 대고 기도를 해 주었다. 그리고 기도 후에 그 곳에서 음식을 나누어 먹기도 했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버림받아 의지할 곳 없이 외로이 지내던 한센병자들이 이와 같은 언행이 일치되고 사랑이 넘친 손목사의 신앙 지도를 받으면서 소망으로 살고, 기쁨으로 넘치는 찬송을 부르는 신앙의 소유자들로 변화되었다. 손 목사는 그들 신앙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원수까지 사랑한 목자

 

손양원목사는 1946년 3월 경남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더욱더 심혈을 기울여 한센병자들과 같이하면서 그들을 위하여 일하고 있을 때 1948년 10월 19일 여순반란사건이 터졌다. 당시 제주 폭동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서 여수에 집결했던 군인들 중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남로당 계열의 군인 일부가 반란을 일으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반란군이 된 것이다. 이 세력에 동조했던 반란군들은 불과 4시간 만에 여수 시내의 경찰서와 각 파출소, 군청, 역 등 주요 기관을 장악할 정도로 기세가 등등했다.

 

순천까지 반란군에 의해서 점령되면서 두 도시는 공산 폭도들의 세상이 되어 버렸다. 반란군들은 그 동안의 불만 세력과 좌익 추종 세력을 한데 묶어 인민 위원회를 만들어 자기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사람이나 단체는 무조건 잡아 죽이는 천인공노할 민족 대학살의 광란 극을 벌였다. 반란군들은 어제까지의 친구를 원수로 만들었고, 이웃이 적이 되어 고발하고 보복하는 인민재판이 열리는가 하면 계속해서 인민 대회를 열어 공포의 분위기를 고조시켜 나갔다.

 

이때에 손 목사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은 각각 순천 사범학교와 순천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신앙과 민족정신에 불타는 이 두 형제는 학교 안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산주의의 잘못을 폭로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히 학교의 공산 프락치들은 가장 먼저 그들을 색출하여 체포하였다. 그리하여 두 형제는 인민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때에 두 형제는 서로 대신하여 죽기를 자원하였다. 그러자 형제는 무자비하게 안재선에 의해 처형을 당했다. 애양원 교회에 손 목사의 두 아들이 반란군에 의해서 순교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사고가 발생한 나흘 뒤인 10월 25일 이었다. 두 아들이 한꺼번에 변을 당했다는 급보를 전해들은 손목사 내외는 물론 애양원 식구들과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반란군이 어느 정도 진압된 26일에 애양원 성도들은 손 목사의 두 아들의 시신을 거두어 교회 앞에 시신을 안치한 후 다음날 27일, 애양원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장례식을 치른 후 지금의 애양원 동산에 묻히게 되었다.

 

손 목사의 두 아들이 순교당할 그때 애양원 교회에서는 이인재전도사를 초청하여 부흥회를 열고 있을 때였다. 부흥회 도중에 이런 변을 당하게 되자 부흥회 강사는 장례식의 집례까지 맡게 되었다. 장례식은 간단했으나 그 날 손 목사가 장례식 끝 부분에 고백했던 마지막 인사는 또 한 번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한 편의 복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여러분, 내 어찌 긴 말의 답사를 드리리요. 내가 아들들의 순교를 접하고 느낀 몇 가지 은혜로운 감사의 조건을 이야기함으로 대신할까 합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을 나오게 하였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 이리

          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 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합니다.

 

끝으로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 일들이 옛날 내 아버지, 어머니가 새벽마다 부르짖던 수십 년간의 눈물로 이루어진 기도의 결정이요, 나의 사랑하는 한센 병자 형제 자매 들이 23년간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기도해 준 그 성의의 열매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두 아들을 떠나보내는 장례식장에서 억장이 무너지는 쓰린 가슴을 안고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찾아서 아들로 삼겠다는 그 뜨거운 사랑은, 활활 타오르는 예수 사랑의 용광로가 되어서 참석한 사람의 마음은 물론 손 목사를 대하는 모든 분들의 마음을 녹일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 었다.

 

이후 안재선은 체포되었고, 총살형이 내려졌다. 그 소식을 들은 손 목사는 계엄 사령관에게 찾아가서 "나의 죽은 아들들은 결코 자기들 때문에 친구가 죽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 애들은 친구의 죄 때문에 이미 죽었습니다. 만일 이 학생을 죽인다면 그것은 동인, 동신 형제의 죽음을 값없이 만드는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그 학생의 석방을 간청하였다.

 

오빠의 죽음을 알고 있는 딸 동희가 아버지의 뜻에 반대하자 손목사는 “그 학생이 안 잡혔다면 또 모르되 일단 잡힌 이상 모른 채 할 수가 없구나. 내가 무엇 때문에 (신사참배 거부로) 5년 동안이나 감옥 생활을 견뎌 냈겠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겠느냐? 제1, 2계명 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원수를 사랑하는 말씀도 똑같은 하나님의 명령인데…..

 

그 학생을 죽여서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되겠느냐? 그가 죽는다고 오빠들이 살아 돌아오겠느냐?…… 지금 시대가 바뀌었으니 보복이 반드시 뒤따를 것이다. 골육상잔은 민족의 비극이고 국가의 참사인데 이 민족이 이래 죽고 저래 죽으면 누가 남겠느냐?” 라고 말 한 손양원 목사의 눈에는 앞으로 닥칠 민족의 비극이 보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간청은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손 목사는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양아들로 삼아 이름을 손재선이라 불렀다. 손 목사는 재선이를 부산의 고려 성경 고등학교에 수학하도록 하여 전도사로 키워내는 놀라운 사랑의 역사를 보여 주었다.

 

해방 후 이데올로기의 환상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서로 죽였고, 전쟁으로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총탄과 폭탄에 산화했다. 누가 남았으며, 무엇이 남았나...

 

순교자로서의 최후의 영광

 

1950년 뜻하지 않는 6·25동란이 이 땅 위에 발발했다. 파죽지세로 38선을 넘어 서울로 쳐들어온 북한군은 한강을 넘어 수원을 점령하고 대전을 빼앗고 대구로 진격하는 한편, 일부는 호남으로 진격하여 호남 일대도 점령하게 되었다. 이 때 교회도 문을 닫고 피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손 목사는 피난하지 않고 교회에 남아 계속 교회 종을 쳤으며, 자신이 강사가 되어 계속하여 교회에서 특별 집회를 했다. 집회의 주요 내용은 '잘 죽자'라는 것이었다.

이 때 애양원 교회의 교인들은 손 목사를 피난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했으나 허락을 하지 않자 결국은 교회의 제직들과 교역자들 모두 함께 떠나자고 간청을 하였다. 우선 몸부터 피하고 보자는 제직들의 간청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손 목사는 함께 송별 예배를 드리고 배에 올라가 마지막 찬송을 부른 후 갑자기 혼자만 배에서 가방을 들고 뛰어 내렸다.

 

교인들이 "목사님, 왜 피난을 가지 않고 다시 배에서 내려가시는 겁니까?"라고 묻자, 손 목사는 "나는 원래 피난을 가지 않는다고 했지 않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죽는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그리고 만일 내가 피신한다면 일천 명이나 되는 양떼들은 어떻게 합니까? 내가 만일 피신을 한다면 그들을 자살시 키는 것이나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하며 피신하기를 완강히 거부하고 제직들만 보냈다.

 

그리하여 손 목사는 마침내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 되어 1950년 9월 28일 저녁11시 여수 근교 미평에서 총살당하여 순교의 영광을 간직하였다.

당시 손 목사의 나이는 48세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양들을 보호하고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총의 개머리 판으로 입을 맞아 얼굴이 피투성이 되었으며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서 두 손 모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시다가 공산군의 총에 순교를 하셨다.

 

마무리 글

손양원 목사가 우리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외치는 하나님의 말씀이 간절하다. "원수를 사랑하라"

 

그의 사상에는 항상 민족의 정황이 문제가 되었고, 민족정신을 복음으로 승화 시켰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하나님만으로 즐거워하며 사는 하나님 중심사상과 오직 하나님의 은혜 사상, 국가와 민족의 사랑 과 순교의 각오를 가지고 살았으며, 성경으로 시작해서 성경으로 끝내겠다는 하나님의 말씀 중심 사상, 종말에 대한 소망의 말씀과 삶의 일치 등의 사상을 가지셨다. 다시 말하면 그의 삶 자체가 신구약 성경 66권의 본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근심과 걱정은 절대로 할 필요가 없다. 근심과 걱정은 불신의 죄가 된다.’ 이 편지 내용을 통해 고난 속에서도 주를 신뢰하고 순종하는 손양원목사님의 믿음을 엿볼 수 있었다. 영적인 생각은 자족하게 하니 모든 상황 속에 만족할 줄 안다고 하였다. 그것이 설령 감옥이 되어도. 정말 그는 그러한 삶을 실천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네, 좋습니다. 나는 감옥에 있어도 예수와 함께 살 것이고, 밖에 나가도 예수와 함께 살 것인즉 예수와 함께라면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감옥에서의 시간이 나에게는 유익이며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내가 만난 손양원 목사는 예수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일념으로 오직 예수님만을 섬겼던 그의 신앙은 오로지 감사와 자족의 충만함이었다. 그는 기도와 찬송과 성경읽기로 신앙을 굳게 지켰다. 감옥에서도 수감된 사람들과 간수들에게까지 전도하고 설교하는 일을 쉬지 않아 '옥중성자'로 널리 알려졌다. 취조 때도 기독교의 국가관, 신관, 그리스도관, 성서관, 말세관 등을 설명하느라 조서가 무려 500여장에 달했다. 고 한다.

 

손양원목사는 신앙의 확신뿐 아니라 신학적인 입장도 대단히 분명하다. 특히 그의 성경관을 볼 때 그의 신학과 신앙의 확신이 어디에서부터 나왔는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신학과 신앙 면에서 진보와 보수의 차이가 별로 없다고 말하는 분들이 더러 있는데, 실제로 과거에 첨예하게 대립되었던 진보와 보수가 요새는 서로를 상당히 수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회운동이나 사회의식 같은 면을 볼 때 오히려 복음주의 계열이 청년층에서는 훨씬 더 활발하고 예리한 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로 수렴되지 아니한 특별한 것 하나는 성경관이다. 이것은 변한 게 없다. 복음주의의 대명제는 “성경은 유일무이한,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하는데 비해서 진보주의자들은 확신을 거의 못 갖고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했다가, 또 필요에 따라서는 “어느 성경을 말하느냐?" 하는 식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손목사의 성경관은 우선 "성경은 유일 절대 지상의 교리“라는 표현으로 알 수 있듯 확고했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다“라는 확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을 우리는 본받아야 한다.

 

“죄 짓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깨끗한 죽음이 신앙정절에 기상이 되리로다. 오, 주여 ! 하루를 살지라도 무죄(無罪)의 생활, 백년의 괴로움이라도 무죄(無罪)의 생활, 나는 원하고 또 원하오니 피 묻은 그 손으로 나를 도와주소서. 죄 짓고야 이 땅에 살 맛 없사오니 차라리 이 몸을 데려 가소서."

이글에서 그가 죄에 대해서 얼마나 민감한 반응을 가졌는가가 나타나 있다. 다시 말하면 그의 경건생활에 대한 기초,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이것을 바꾸어서 말하면 죄에 대한 두려움, 즉 죄를 멀리 하려는 것으로 나타나있다.

내 입에서도 그런 고백이 나오길 나는 기도한다.

 

손양원목사는 목회자들에게 아래와 같이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 지능을 의뢰하고 나의 지(혜)를 믿지 말 것."

 

둘째, "주님을 나타내지 않고 자기를 나타낼까 삼가조심 할 것." 흔히 부흥회 를 인도할 때

        제일 빠지기 쉬운 유혹이 바로 이것이다.

 

셋째, '성경원리를 잘 모르고 내 지식대로 거짓말하지 않을 것.

 

넷째, "간증 시에 침소봉대하여 거짓말 되지 않게 할 것."

        우리는 흔히 이런 유혹을 많이 받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간증에서 거짓말을 많이 한

        다.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은 자동적으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습성이 있어서 자기가 조

        금 살을 붙이게 되면 나중에는 자신의 원래 체험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실을 얘기 한다.

        자기의 진실을 얘기하는 것이 중요한데 '사람들이 이 말을 하니 흥분하고 저 말을 하니

        좋아 하더라' 해서 곧장 왜곡시킨다.

 

다섯째, “나도 못 행하는 것을 남에게 얘기하여 무거운 짐지게 하지 말 것." 오늘날 부흥강사

           들이나 설교자들이 빠지기 쉬운 유혹 가운데 하나가 이것이다 설교자들이 정말 양떼

           들의 신앙적 수준을 생각 한다 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얘기를 많이 하고 있다. 물론 얘

           기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한다고 하는데 참조심해야 할 때가 많다.

 

여섯째, '내 한 마디 말에 청중의 생사가 좌우됨을 깊이 알고, 말의 조심도, 열심도, 충성도

           다할 것.

 

일곱째, '음식과 물질에도 크게 주의할 것.

그 중 첫 번째는 주님 대신 받는 대접이니 대접받을 자격이 있는가 스스로를 살펴라.

        두 번 째는, 배를 위하여 입맛에 취해 먹지 말고 일하기 위하여 먹으라.

        세 번째는, 물질과 선물에는 하등 관심을 두지 말 것이다. 사례가 얼마 나올 것인가

                  심을 두지 말 것이다:'

 

목회자들이 꼭 듣고 배우고 생활화해야 하는 것으로 매일 나를 점검해야 한다.

손양원목사님의 숭고한 신앙 정신을 나도 본받고 예수님이 사신 그 삶을 나도 온전히 살아 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