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현수:조직신학

신현수 박사의 조식신학 (121)

새벽지기1 2016. 10. 16. 07:24


주 되심의 영성 <하나님 형상>

의지는 사람의 본질적 국면이다. 하지만 그 의지는 자유로운 것이 아니고 사로잡혀 있다. 그 의지가 속박의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순종의 자유의 형태로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사람의 자유는 사람이 이 땅에서 살아갈 때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것을 통해 완전히 알거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어긴 죄 때문에 흐려지게 되었다. 흐려진 자유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통해 회복된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는 죄 때문에 계속 일그러뜨려진다.
그것은 하나님이 장차 하실 새 창조에서 완전히 실현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전히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그러한 자유가 완전히 실현되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기름 부은 성령은 하나님이 가난하고 얽매여 있으며 억압받는 사람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그를 보낸 수단이다. 자유는 희년이 오는 것과 떨어질 수 없다. 그 때에는 모든 것이 자유롭게 될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에서 그리고 오순절에 보냄을 받은 성령을 통해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현재적 경험으로 다가온다.


사람의 자유는 사람의 존엄성의 한 표현이다. 사람의 존엄성은 하나님의 창조의 뜻이다. 하지만 사람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이 사람이 현실적으로 살아가는 특징적 방식이 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이 있게 된 데에는 사회적 차원에서 여러 요인이 작용할 수 있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어긴 죄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죄는 단지 피상적인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됨의 뜻의 본질이 근본적으로 타락한 것이다. 사람의 존재의 뿌리가 철저하게 뒤틀린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성품은 죄가 들어온 후 자기 중심의 교만이 되었다. 사람의 삶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모든 국면에서 타락하였다. 한 마디로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하게 되었다.   


‘전적’이라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차원을 가리킨다. 사람의 삶에는 죄의 영향을 받지 않은 분야가 없다. ‘부패’란 ‘제거된 것’을 뜻하지 않는다. 죄란 본래의 의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존재가 타락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야 그것이 가능하다. 새 생명으로 태어나려면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인류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사람을 새롭게 하셨다. 그것이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는 방식이었다.   


죄는 사람이 이 땅에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죄를 감정에 관계된 것이라고 본다. 곧 죄는 그것을 일으키는 행동이나 삶이 아니라 단지 즐겁지 않은 감정이나 당혹스러움 혹은 기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전통은 죄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과 다른 사람 앞에 옳지 못한 상태라고 가르친다. 이러한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죄를 고백함으로써 용서받을 수 있다(요일 1장 8-10절).


죄 용서함은 죄 때문에 뒤틀려지고 손상된 인격을 고치고, 죄를 뉘우치는 사람이 죄의 억압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주신 두 가지 주요 계명을 지키며 하나님, 이웃 및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하는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이 점에서 자기 사랑은 건강한 자존감을 해치기보다 지지한다.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사람이 존엄성을 잃어버린 것은 하나님의 뜻을 어긴 죄와 그것으로부터 비롯된 비참한 결과 곧 하나님, 이웃, 피조물 및 자기 자신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이다. <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